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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명 선생님을 추모하며
news letter No.826 2024/4/16
2024년 2월 15일 종교학자 황선명(黃善明) 선생께서 83세를 일기(一期)로 우리 곁을 떠나셨다. 빈소는 국민건강보험 일산병원 장례식장 10호실이었고, 2월 17일 토요일 오전 9시에 발인하였다. 장지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선영이었다. 예전에는 회갑이나 정년 퇴임 때 제자들이 기념 논총을 만들어 스승의 학덕을 기리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이런 것으로 고인의 이력과 저술 목록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선생에 관해서 알려주는 자료가 많지 않다. 추모하는 의미에서 여러 군데 뒤져서 선생의 생애와 이력과 저술 등을 정리해 놓고자 한다.
선생은 194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창원(昌原)이고, 시중공계(侍中公系) 22세손이다. 부친의 휘(諱)는 규면(圭冕)이고, 1955년까지 이승만 대통령의 비서로 일했다. 종로구 내수동의 큰 한옥에서 살았는데, 사랑방에 한학자 우전(雨田) 신호열(辛鎬烈)이 식객으로 있었다. 부친은 신호열의 도움을 얻어 이승만이 구한말 옥중에서 지었던 한시들을 묶고 번역하여 1961년에 이승만의 시집을 간행하였다. 선생은 어린 시절 집안에서 신호열에게 한문을 배웠다.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2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종교학과에 입학하였다. 1965년 2월에 학부를 졸업하였고, 병역을 마친 후 1968년 12월부터 1973년 12월까지 중앙일보 기자로 근무하였다. 1972년 3월 대학원에 입학하여 1975년 2월에 석사학위를 받았다. 석사학위 청구 논문의 제목은 〈종교의 사회통제에 관한 소고: 미개사회에서의 Magic과 Witchcraft를 중심으로〉이고, 지도 교수는 장병길 선생이었다. 논문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선생은 종교학 가운데서도 종교인류학 분야를 주로 공부하였다. 그런 연유로 1980년에는 루스 베네딕트의 저서를 번역한 《문화의 유형》(종로서적)을 간행하였다.
석사학위를 받고 1년 만인 1976년 1월 명지전문대학의 교수로 부임하였다. 아울러 1979년부터 1988년까지 10년 동안 서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감리교신학대학교 등에 출강하기도 하였다. 1979년 3월 박사과정으로 진입하였다. 장병길 선생께서 1984년에 정년 퇴임하자, 금장태 선생의 지도를 받으며 박사학위 청구 논문을 제출하였다. 논문 제목은 〈근세 한국 종교문화와 후천개벽 사상에 관한 연구: 근대화 과정에 있어서 문화의 지속성 인식〉이었다. 논문의 심사위원장은 윤이흠, 부위원장은 정진홍, 그리고 심사위원은 안병주, 한상복, 금장태였다. 1987년 2월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선생의 박사학위 청구 논문은 한국 신종교 연구에서 관건(關鍵)에 해당하는 후천개벽 사상을 주제로 한다. 석사 과정에서는 종교인류학 관련 공부에 몰두했는데 어떻게 해서 한국 신종교 연구로 넘어오게 되었을까? 선생께서 살아계실 때 여쭈어보았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하여간 선생은 박사과정에 입학한 1979년부터 한국 신종교 관련 연구를 하였고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에도 꾸준히 관련 논문을 발표하였다. 1999년 3월에 동료 학자들과 함께 한국 신종교학회를 창립하고, 초대부터 제3대까지 회장직을 역임하였다. 명지전문대학에서 30년 동안 교수로 봉직하였으며 2006년에 정년 퇴임하였다.
선생이 남긴 종교학 저서는 세 권이다. 먼저 1980년에 《민중 종교 운동사》(종로서적)를 간행하였다. 이어서 1982년에는 《종교학 개론》(종로서적)을 내놓았다. 1975년에 나온 《종교학 개론》(장병길, 박영사)과 1980년에 나온 《종교학 서설》(정진홍, 전망사)의 뒤를 잇는 세 번째 종교학 개론서이다. 마지막으로 1985년에 일지사에서 《조선조 종교사회사 연구》를 냈다. 책의 머리말을 읽으면 일화가 하나 실려 있다. 이 책의 3분의 2가량은 학위 논문으로 상재되었다가 학위 논문 통과가 좌절되자 책으로 엮었다고 한다. 그러고도 다시 새로운 원고를 써서 2년 뒤에 박사학위를 받았으니, 선생의 박람강기(博覽强記)도 대단하다.
선생은 소설도 두 편을 썼다. 2004년에 《달과 전쟁》(열상진원)을 냈고, 2007년에는 《평양에서 만나요》(북캠프)를 냈다. 그리고 몸담은 직장의 요청 때문인지 직업윤리에 관한 책도 세 권 썼다. 1988년의 《직업윤리》(일문사), 1991년의 《직업의 세계》(정우사), 2001년의 《장인의 세계: 40인의 산업장인들의 이야기》(지구문화사)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학자로서 선생은 언제나 종교학자였다. 선생이 쓴 종교학 논문들을 찾아서 그 목록을 만들어 보니 25편 정도 된다. 대부분 민중 종교운동, 메시아니즘, 후천개벽, 예언비결 등에 관한 논문이거나, 보천교나 무극도 등 신종교 교단에 관한 논문이다. 그러므로 민중 신앙과 신종교 분야의 연구가 선생의 학문 세계 전체를 관통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한편 선생이 남긴 글 가운데 정식 논문은 아니고 붓 가는 대로 쓴 수필류도 있다. 선생은 2002년부터 2005년까지 3년 동안 7회에 걸쳐서 《종교문화비평》(제2호~제8호)에 〈종교문화기행〉을 연재하였다. ‘민중의 성지 십승지지’라는 부제로 유구, 계룡산, 풍기 금계촌, 단양 등을 다니며 옛 답사 기억도 되짚고 새로 만난 인물과 나눈 대화도 담았다. 그리고 《종교문화비평》 28호(2015)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제국의 수도를 옮긴 연유를 풀어서 쓴 글 〈황제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싣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자잘한 글들은 많이 있을 터이지만 미처 수집하지 못했다.
선생의 신종교 연구를 조명하는 일은 내 좁은 소견으로 감당할 수 없으므로 넘어가겠다. 다만 선생의 책과 논문 몇 편 그리고 십승지지 기행을 읽으면서, 문득 선생은 학계의 이단아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현이며 용어며 논법이며 파격으로 일관하고 있다. 점잖은 어른들이 보실 적에는 영 눈살을 찌푸릴 대목도 적지 않다. 자유를 구가하는 그 호방함이 대단하기는 하지만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경지여서 학문적 소통에는 제약됨이 많다. 그렇지만 선생의 학문 세계에는 독보적인 면이 있다. 선생은 “조선 말기 민초들의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 “자유분방한 발상법에 따라 머릿속에 그려보는 후천의 이상세계”, “양반님네들이 음사라고 질겁해 마지않는 갖가지 사신(祀神) 행위” 등등을 언제나 애정을 가지고 주목하였다. 선생의 연구 성과를 학술적 논의의 장에서 평가하는 기회가 만들어지기를 기대한다.
나는 늘 뉴스레터 원고를 원고지 10매로 적었다. 어쩌다 보니 오늘은 글이 조금 길어졌다. 독자들께 사죄의 말씀을 올린다. 언젠가 선생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는 일을 기획할 때 참고할 만한 자료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것저것 찾아서 적었다. 황선명 선생님, 신산했던 인생의 짐보따리를 내려놓고 이제 편안히 쉬시기를 빕니다.
조현범_
한국학중앙연구원
올해 쓴 글로는 〈시암 대목구 선교사 브뤼기에르 신부와 조선 선교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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