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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흙으로
news letter No.861 2024/12/17
죽음을 대면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가장 근본적 본질과 마주하는 일이다. 이는 인간이 겸손해질 수 있는 가장 강렬한 계기이기도 하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성공의 욕망 속에 살아온 한 개인이 죽음 앞에서 모든 인간적 가식과 허영을 벗어던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죽음의 임박함 가운데 일리치는 자신의 삶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그 모순을 깨닫는다. 과시를 위한 삶, 화려했으나 죽음 앞에서 어떤 위로도 되지 않는 공허한 삶을 돌아보며 고통스러운 독백을 이어간다. 이는 단지 개인적 회한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 진정한 인간성을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일리치가 맞이하는 죽음의 순간은 “죽음의 끝”, 즉 죽음이란 더 이상 없는 상태로 그려진다. 삶이 끊어지는 곳에서 죽음도 함께 멈춘다. 삶과 죽음이 대립관계가 아닌 하나임을 전하는 통찰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철학적 사상과 종교적 텍스트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죽음을 삶의 종말로 보지 않고 인간 존재 상태의 변화로 이해한다. 인간의 숙명인 죽음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며, 단지 일종의 전환점일 뿐이다. 그는 “죽음이 경과한 후라면 죽음은 선도 악도 아니다. 죽음이 사람들에게 악이 되는 것은 고통스럽게 죽어가며 죽임당하고 있었을 때이다”라고 말하며 죽음의 과정을 인간 존재의 상태적 변화로 구분한다. 한편, 하이데거는 죽음을 인간이 자신의 진정성을 성취하는 계기로 바라본다. 횔덜린의 시 구절, “삶은 죽음이니 죽음은 또한 삶이리라”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단다. “죽을 자들은 살면서 철저히 죽는다. 이런 죽음 속에서 죽을 자들은 불멸적으로(un-sterblich: 비-죽음적으로) 된다.” 하이데거에게 죽음은 단지 끝이 아니라 삶의 본질적 일부이며, ‘잘 죽기’를 통해 인간은 존재의 의미를 완성한다. 이는 인간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과정과 밀접하게 연결된 철학적 통찰이다.
이러한 점에서 퇴비화 장례라는 새로운 시도는 인간이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임을 상기시키는 사례가 될 수 있다. 몇 달 전 독일 한 마을에서 만난 지인은 레에어디궁(Reerdigung: 다시 흙/땅으로)이라 불리는 퇴비화 장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마을의 삼림 관리인으로 평생 살아왔던 그의 친구는 퇴비화 장례를 유언으로 남겼고, 유족과 친구들은 고인의 뜻을 이루고자 함께 움직였다. 현재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에서만 시범 운영 중이며, 다른 지역에서는 아직 허가되지 않은 상태이다. 삼림 관리인의 시신은 장례식 후 허가된 주로 이동해 퇴비화 과정을 거쳤다.1) 이 지역 사람들은 퇴비화 장례를 일반적으로 정원 한 켠에 자리 잡은 퇴비함인 ‘콤포스트’(Kompost)를 연상하며 받아들인다. 개방형이 아닌 뚜껑형 퇴비함 안을 찍은 사진에는 친숙한 지렁이를 비롯하여 온갖 벌레들이 뒤엉켜 부엽토를 만드는 역동적 과정이 생생히 드러난다. 관 속에서는 시신이 잘 안 썩어서 문제라는 이야기를 사람들이 서로 나눈다. 생명의 순환 속에 시신이 영양이 풍부한 거름으로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후무스’(humus)는 부엽토, 부식토라는 의미로 일상적으로 사용된다. 어떠한 일의 자양분이 되었다고 할 때 후무스를 쓰는 경우도 있다. 비옥한 땅의 의미로 쓰인 라틴어 후무스와 호모(인간)의 관계는 고대 히브리어로도 역시 농사 지을만한 땅이라는 의미인 ‘아다마’와 인간을 뜻하는 ‘아담’과 병행으로 등장하며 인간의 본래적 위치를 상기시킨다.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로서, 인간은 철저히 잘 죽고 잘 살아가는 과정을 통해 인간됨의 가치를 드러내며 또 대자연의 순환에 기여할 수 있다.
물론 퇴비화 장례 방식에 대한 실존적·윤리적 반응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여타 화장과 비교해 얼마나 친환경적인지, 약물 투약 이력이 퇴비화 후에도 잔류하는지, 40일 이후 완전히 퇴비화되지 않은 신체 조직이 남는다면 그 처리 문제 등 실질적인 쟁점들이 있다.2) 또한 퇴비화 장례가 독점적 업체에서만 운영되는 상황에서 기존 장의사들이 입을 타격이나 제도적 확산 가능성 등도 논의의 대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비함 속에서 부엽토가 생성하듯, 퇴비화 장례는 인간이 생명의 순환에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인간은 개체로서의 생명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생태계 순환에 기여하며 자연으로 스며들 수 있다.
삶을 잘 살아본 적이 없다는 것은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지 못한 채, 인간의 본질적 한계와 책임을 외면한 상태를 의미한다. 죽음과 삶의 유기적 관계를 이해할 때,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조율하고 조화로운 삶을 그리며 나아갈 수 있다. 이는 죽음 앞에서 삶의 진정성을 깨닫는 과정과도 연결된다. 흙에서 나와 흙으로, 먼지에서 나와 먼지로 돌아가는 존재로서 인간은 죽음을 통해 물질적 순환에 기여하며, 자연 속에 지속된다. 죽음을 직시하고 퇴비화 장례를 고민했던 삼림 관리인과 그의 유언을 지키려 연대한 가족, 친구,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모습은 내게 이러한 본질적 성찰의 중요한 사례로 다가왔다.
우리는 최근 한국의 정치적 어려움 속에서 삶의 본질을 깊이 고민하지 않은 이들이 가진 권력이 어떤 혼란을 초래하는지를 목격했다. 법조계의 구조적 문제를 잘 아는 사람은 ‘삶을 제대로 살아본 적도 없는, 삶의 현장과 괴리된 검사의 모습’이라는 한 마디를 던졌다. 사실 이는 단지 법조계의 문제를 넘어 개인과 사회가 삶/죽음의 본질을 심도 있게 성찰하지 않을 때 발생하는 무책임함과 소외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삶과 죽음은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라 서로를 완성하는 여정이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 삶을 성찰하고, 삶을 통해 죽음을 준비할 수 있다. 우리가 삶/죽음을 진지하게 직시하지 않는다면, 인간 존재는 자연 속에서도, 사회 속에서도 자기 자신과 함께 하는 모든 것들과 함께 나아가기 위한 노력보다는, 자신의 욕망 추구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들을 쉽게 처치해버리려는 반목, 대결의 방식에 머물 수밖에 없다. 오늘날의 혼란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삶은 곧 죽음이며 죽음은 곧 삶이라는 궁극적 문제는 우리에게 다시금 우리의 본질을 돌아보게 하며 자연과 함께하는 인간적 책임성을 회복할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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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짚으로 잘 덮힌 시신은 인공 코쿤(cocoon)에 안장되어 40일간의 퇴비화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장례방식의 시도가 더 일찍 시작된 미국의 경우 테라메이션(terramation)이라는 용어도 쓰이지만, 인간 퇴비화(human composting)라는 개념이 좀 더 널리 쓰이는 것 같다. 이에 관한 한글 보도 자료는 이미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
2) 40일간의 퇴비화 과정동안 단단한 뼈 이외 조직이 부패하며 배출되는 수분이 아래로 고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코쿤에 골고루 진동을 가해 수분을 분산시키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김태연_
숭실대학교 베어드교양학부
논문으로는 <핵개발담론의 종교성에 대한 페미니즘적 성찰>, <코로나 시대, 서구 위기담론에서 드러난 근대국가와 종교문제: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적 관점에서>, <서구의 자기반성으로서의 종교: 타우베스의 정치신학적 《리바이어던》 해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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