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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17호-몇 가지 장례식 풍경(장석만)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1. 4. 14. 13:40

몇 가지 장례식 풍경


2008.8.26

사람이 좋다고 평판이 자자한 내 친구가 있다. 그의 원칙 가운데 하나는 장례식에는 꼭 참가하는 것이다. 요새 장례식은 거의 3일장이라서 일정이 안 맞으면 가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는 장례식이라면 만사를 제쳐두고 간다. 옷도 가능한 한 검은 색으로 맞춰 입고 온다. 물론 부조금도 적지 않게 낸다. 그리고 왔다가 후다닥 사라지는 조문객에 비해 그는 상가에 좀 더 오래 머문다. 그가 인간성 좋다고 높이 평가받는 데에는 이렇듯 장례식 참가에 기울이는 그의 정성이 적지 않은 몫을 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그와 같지는 않다. 이메일이나 전화로 부고 소식을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눈살부터 찌푸린다. 느긋하던 일정이 느닷없이 각박해지기 때문이고, 예상치 못했던 금전 지출이 눈앞에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안 가게 되었을 경우에 생길 수 있는 불리한 점이 무엇인지 계산해야 되기 때문이다.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참가를 하되, 경제적 시간적 손실을 줄일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안을 마련한다. 이전에 자신이 받았던 부조금 명부를 찾아 비슷하게 액수를 정하고, 서둘러서 문상을 할 시간표를 작성한다. 조문은 말일 뿐, 실은 외상값 갚는 심정으로 가는 것이다.

요즘 집에서 장례식을 하는 모습은 쉽게 볼 수 없다. 농촌의 경우가 아니라면 거의 모두 장례식장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장례식장은 보통 대형병원 근처에 있다. 우리는 병원에 붙어있는 장례식장을 이상하지 않게 여기게 되었지만, 외국인들은 낯설게 보고 종종 질문을 한다. 우리 법에서도 도심 안의 장례식장은 허용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불법도 오래 묵인되면 관행이 되는 법. 이제는 따로 법을 만들고, 고치는 소동을 하며 병원 장례식장을 정당화 시키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법을 지키느라고 도시 주변에 장례식장을 지은 업자들이 소송에서 이겨도 별로 소용이 없다. 바야흐로 병원 장례식장은 “한국적”인 풍경이 되고 있다.

고층 아파트에서 이삿짐 크레인에 매달려서 내려오는 관의 모습을 보았다는 은사의 말씀을 들은 이후, 나는 그 장면을 찍으려고 노력했지만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이제는 숨을 거두기 전에 미리 병원에 모시고 가는 일이 흔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아파트의 구조는 폐쇄적이라서 조문객을 받기가 어렵다. 전에는 아파트 입구의 터에서 천막치고 조문객 접대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모습도 보기 힘들게 되었다. 아파트 공화국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급변하는 주거환경이 우리의 장례식 풍경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장례식을 통과의례라고 부를 때, 그 통과라는 말에는 의례를 통해 매듭을 짓고 푼다는 뜻이 들어있다. 하지만 요즘 장례식은 그런 의미의 통과의례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장례식은 망자가 이승에서 살았던 삶을 전체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하는 장치이건만, 요새의 장례식은 망자 가족이나 조문객 모두에게 어서 빨리 털어버려야 할 짐처럼 치러지고 있다. 망자가 남긴 부나 권력을 과시하는 광경은 흔히 볼 수 있어도, 망자의 인간적인 체취를 느낄 수 있게 만드는 장례식은 찾기 어렵다.

평판 좋은 내 친구가 장례식장에 가서 하는 일은 검은 옷 차려 입고, 돈 잘 내고 남보다 조금 더 있다가 오는 것이다. 그 친구에게 더 이상 무엇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그에게 너는 왜 장례식장에 검은 옷을 입고 오며, 술에 취해 떠들고 있느냐고 물을 수는 없다. 남들은 그리 반가와 하지 않는 장례식장 출근을 그가 기꺼이 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미덕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의 장례식 풍경이 이대로 괜찮은지에 관해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다. 이전의 장례식에서는 조문(弔文) 및 만장을 통해, 그리고 상가에서 조문객의 대화를 통해 망자의 삶을 되새겨보는 일이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초고속으로 외상값 갚는 절차가 진행될 뿐, 매듭을 묶고 푸는 의례적 장치가 전혀 가동되지 못하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해 한종연의 관심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장석만(한국종교문화연구소, skmjang@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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