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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323호-오늘도 말세유감(심형준)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4. 7. 17. 16:35

 

                         오늘도 말세유감


                          

                                                      

 

 

2014.7.15

 

 

 

    인간이 문명을 이룩하고 ‘야만’과 거리를 두었던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그 문명인들의 위장된 야만성을 재발견하는 것이 되곤 한다. 21세기 정보화 시대를 외치는 와중에도 여전히 세계는 ‘종말’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이 세대의 죄악이 소돔과 고모라의 그것에 견주지 못할 까닭이 있을까 싶다.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모호한 모토를 제시하고 집권한 현 정부에서 지난 정권의 온갖 부조리는 빙산의 일각만 노출한 채로 수면 아래에 잠든 듯이 도사리고 있다. 그 부조리의 뒷감당은 애먼 사람이 져야 했다. 4대강으로 수자원공사가 진 빚을 해결하기 위해서 국민세금을 원금을 갚는 데에만 100년에 걸쳐서 매년 800억을 투여해야 한다고 한다. 또 지난 4월에 벌어진 세월호 참사는 한 업체의 단순한 안전관리 소홀의 문제가 아니라 위험을 통제해야 할 국가적 시스템이 자본의 이득을 위해서 왜곡되어 벌어진 ‘총체적 부조리의 사건’으로 밝혀지고 있다. 아직 이 일들의 해결은 요원한 상태로 남아 있다.

 

    이러한 현실은, 이 나라의 건국 세력의 ‘불굴의 의지’, 근대화 세력의 ‘불굴의 도전정신’으로 일궈낸 이 나라를, 자랑스러운 세계 속의 한국으로 만들기 위해 ‘국격’을 논하며, 선진국 대열에 선 이 나라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치는, 그래서 심지어 건국과 근대화 과정의 ‘문제’들을 들춰내어 ‘선조’와 ‘우리 역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확산시키는 ‘자학사관’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뉴라이트 세력이 일궈낸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우리의 ‘문명’이 이다지도 비합리적이고 야만적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구촌의 다른 이웃들은 ‘다윗과 골리앗’의 21세기적 버전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엔 다윗의 후손이 골리앗과 같은 이미지이고, 골리앗의 후손은 신이 돕지 않는 다윗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이 ‘다윗의 골리앗’은 이교도들의 미약한 저항에 대한 반격으로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다윗의 골리앗’은 어린이, 여자, 노인과 같은 양민을 가리지 않고 피의 복수를 실천하고 있다. 한쪽은 테러리즘으로 저항하고, 다른 한쪽은 우월한 군사력으로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게다가 인종청소를 당했던 자신들의 ‘박해받은 자’로서의 기억도 잊은 채 학살을 자행한다. 그들은 마치 박해받은 자로서 박해할 수 있는 면허를 소지한 것처럼 행동한다.

 

    양차 세계대전을 수행한 서방세력, 특히 영국의 이기적이고도 후안무치한 외교정책의 말도 안 되는 결실이 지금 팔레스타인 분쟁의 모습이다. 중동 지역에서 영국의 전략적 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오스만 제국 견제책으로 아랍계의 후세인 부족의 협조를 얻어내기 위해 영국은 그들에게 중동 지역에서 통일된 아랍민족 독립국가 건설을 약속하였다(후세인-맥마흔 서한, 1915). 다른 한편으로 유대계 자금을 전쟁자금으로 쓰기 위해서 유대인들에게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독립국가 건설을 약속하였다(밸푸어 선언, 1917). 그러나 영국은 전후 프랑스, 러시아와 비밀협상을 통해서 오스만 제국 영토를 분할 점령하였다. 영국은 2차 세계대전이 마무리되며 이 지역에서 철수하기까지 아랍계와 유대계의 원만한 분리 독립안을 마련하지 못하였고, 영국 철수 이후로 건국 선언을 한 이스라엘은 미국과 영국의 지원에 힘입은 무력을 바탕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쫓아내며 이 지역에서 자국 영토를 넓혀왔다. 그 역사는 오늘 이 시간에도 반복되고 있다.

 

   세계 어디에서도 역사와 신화를 들어 특정한 민족이, 그 동안 사라져 버린 국가를 다시 부활시킨 예는 이스라엘을 제외하고는 없다. 이것은 영국, 미국이라는 서방의 유력한 국가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고, 그들이 힘의 우위를 점한 현실에서 어처구니없이 부조리하게 이루어진 일이다. 그리고 물은 엎질러졌고, 힘에 근거한 부조리는 그대로 ‘현실’이란 이름으로 통용되게 되었다.

   

   문명의 야만성은 바로 그렇게 문명이 갖춘 힘에 그것이 표방하는 ‘고상한 논리’, 인간 중심적(인권, 평화, 비폭력, 도덕 등) 논리가 작동하지 않도록 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惡貨는 良貨를 驅逐’하여 비정상이 정상을 구성해 낸다. 그리고 그 정상의 비정상성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바보’가 된다. 그리고 그 ‘바보’에게 붙는 이름표는 비현실의 세계를 꿈꾸는 ‘이상주의자’로 바뀌게 된다.

 

     이러면 몇 가지 선택지가 열린다. 체념하여 현실주의자로 돌아가거나, 이 경우 염세적 감각이 강화되어 ‘뭐 세상 어떻게 되던지, 나만...’이라는 발상을 하게 되는 것이고, 불굴의 의지를 가졌다면 새로운 세계를 꿈꾸게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혁명을 꿈꾸던지, 이상 속에서 ‘개벽’을 꿈꾸던지 선택을 하게 된다. 아니면 좌절된 영혼으로서 그러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음모론교에 가입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전향하여 ‘힘의 부조리’의 주체로 탈바꿈하거나 혹은 일베 같은 것이 되어 대리만족이라도 누리거나.

 

     반복되는 말세의 감각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압도적인 부조리와 그것에 저항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자각에 도달하게 되면 최소한의 소망이 남는다. 부조리의 희생양에 대한 명복을 비는 것과 이제 더 이상 그러한 희생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는 기도이다. 그리고 기억하고 싶다는 아니 기억해야 한다는 다짐의 소망이 남는다.

 

     미치지 않고 말세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두 손이 하나로 모여 하늘로 향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하늘이 광대하고도 무한한 우주의 암흑일지라도 말이다.
바야흐로, 그리고 늘 그래왔듯이
말세다!

 

 

 


 심형준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zeekfrid@gmail.com
서울대 박사과정. <종교 개념의 적용과 해석에 대한 연구>라는 석사학위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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