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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홍의 살며생각하며](5)시간언어와 공간언어

 

한국대학신문 [기획연재] 2014.03.30

 

 

*** 행복은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다고들 한다. 나날이 행복한 사람이 되려면 마음부터 열어야 한다고 말들 한다. 우리 시대 종교학 석학이 보내는 '소소해서 종종 잊곤 하지만 너무나도 소중한' 메세지 <정진홍의 살며 생각하며>에서 마음으로 살아가는 세상을 만나보자.

서울시청 청사 전면에는 늘 넓고 커다란 현수막이 걸립니다. 거기에는, 아마도 서울시가 시민을 ‘계몽’하기 위한 것이라고 짐작되는데, 철따라 바뀌는 귀한 경구가 씌어 있습니다. 요즘 제가 오가며 읽는 것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라는 글입니다. 정확하게 옮겼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 글을 읽을 때마다 많은 것을 스스로 되살피게 됩니다. 옳은 말이고 명심해야 할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별히 요즘 상황에서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주변 국가들이 역사 다시 쓰기를 거의 집착증이라고 할 만큼 병리적으로 의도하고 있는데 우리는 아직 그들만큼 절실하게 이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은 것 아닌가 하는 염려가 일기 때문입니다.

사소한 불만도 있습니다. 그러한 내용의 글은 역사를 유념하는 사람이라면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다 발언할 수 있는 그러한 것입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거기 현시된 문장과 똑같은 글귀를 단재 신채호 선생의 책에서 읽은 것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어쩌면 그 현수막 어느 모퉁이에는 이 말이 단재의 말씀이라는 글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지만 현수막에 가까이 다가가보지 않아서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의미를 강하게 부각하기 위해 부정적인 서술을 통해 긍정적인 반응을 유도하려 한 것이겠습니다만, 이왕이면 옛날 칙칙하던 시절도 지났는데 단재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조금 더 긍정적인 서술을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역사를 기억하는 민족에게는 밝은 미래가 있다”라는 투로 말입니다. 아무튼 귀한 경구입니다. 그러니 새삼 그 글을 읽으면서 우리 누구나 자신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조금 다른 생각도 해봅니다. 역사의식이라는 것, 그것을 강조하는 당위성을 모르지는 않습니다만 뭔지 그 말을 들으면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너무 외골수로 시간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어제가 없으면 오늘이 없다고 우리는 말합니다. 오늘에 담긴 어제를 내일을 위한 힘의 원천으로 삼아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너의 어제를 보면 오늘의 너를 알 수 있다고도 하고, 오늘 하는 짓을 보면 내일의 네 모습을 짐작하고도 남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쓰는 많은 언어가 시간을 내용으로 하는 덕목의 단어들로 꾸며집니다. 이를테면 우리의 이상(理想)과 성찰(省察), 곧 ‘희망을 가지라’는 것, ‘자신을 되돌아보라’는 것들이 그러합니다. 저는 그것을 감히 ‘시간언어’라고 규정하고 싶습니다. 언어를 소통언어이게 한다고 해도 좋을 전치사들도 그렇습니다. ‘~하기 전에’라든지 ‘~한 뒤에’라든지 어떤 일이 있은 ‘다음부터’라든지 어떤 일에 ‘이르기까지’라든지 하는 것들이 그러합니다. 이러한 언어문화가 조금도 그르지는 않습니다. 마침내 역사가 심판자의 자리조차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 역사는 그것이 어떻게 서술되든 모든 인식과 판단의 준거가 되고 어떤 가치나 의미도 역사의 판단에 맡길 때 우리는 비로소 양식 있는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마땅한 일입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우리의 의식을 시간이 아니라 공간에다 초점을 두어 모은다면 어떻게 달라질는지요. 사태는 꽤 바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앞에 있는’이라든지 ‘옆에서’라든지 ‘나로부터’라든지 ‘너와 더불어’라든지 ‘우리 사이에’라든지 ‘내 안에서’라든지 ‘밖에서 보는’이라든지 하는 전치사를 시간을 지시하는 전치사보다 더 자주 사용한다면, 그 ‘공간언어’가 만드는 ‘공간’은 과연 어떤 것일는지요. 꿈보다는 사랑이, 성찰보다는 자비가, 이상보다는 어짊이 더 가깝게 또는 더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지는 않을는지요. 되풀이한다면 그러한 덕목들, 곧 어짊이나 자비나 사랑은 실은 시간언어가 아니고 공간언어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이 둘의 나뉨이 뚜렷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어느 것을 택일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은, 당연히 역사의식이 투철하지 못한 탓이라고 말씀하시겠습니다만, 어쩌면 조금은 ‘기운 역사담론의 무게’가 요즘 제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들어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마구 말씀드린다면 저는 아무래도 시간언어의 현실성이 공간언어의 그것보다 어쩐지 상당히 공허하다고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출처 링크: http://news.unn.net/news/articleView.html?idxno=133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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