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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347호-2014년을 되돌아보니(장석만)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5. 2. 3. 22:53

                            2014년을 되돌아보니                      

                

                       
                              

 2014.12.30

 

 

 

        2014년을 되돌아보니 저절로 두 장면이 떠오른다. 이스라엘 남부 도시 스데로트의 저녁 언덕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한 곳을 보고 있다. 그곳이 어디인가? 바로 이스라엘 군이 맹폭격하고 있는 가자 지구이다. 그들은 접이의자에 앉아 편한 관람 자세를 취하고 있고 더러는 물담배를 빨거나 팝콘을 먹으며 팔레스타인 지역에 가해지는 공습의 광경을 마치 폭죽놀이 보듯 하고 있다. 그래서 지난 7월 그 장면의 사진과 함께 보도된 기사의 제목도 “스데로트의 영화관”이다. 구경꾼들이 주장하기를 이 장면은 평화가 구현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9월, 세월호 유가족이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하고 있는 광화문 광장. 40여일 넘게 단식 중인 유가족의 면전에 초코바를 뿌리고, 닭고기와 피자를 먹어대며 즐거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바로 단식투쟁에 맞서는 이른바 폭식투쟁의 참가자들. 그들이 주장하기를 단식하고 있다는 건 거짓 속임수이거나 죽음에 대한 애호다. 그들은 단식은 죽음인데 반해, 자신들의 소위 폭식은 삶의 향연이며, 생명존중의 상징이라는 것을 자랑한다.

 

 

        아마 시간이 흘러도 두 장면은 쉽게 잊히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이러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는 식으로 처신하는 그들의 태도에 말문이 막힌다. 게다가 그들이 갖다 붙이는 평화니 생명이니 하는 아름다운 단어가 더욱 내 숨통을 조인다.

 

 

        2014년은 “이제 그만해라”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세월호 참사를 중심으로 움직인 한 해였다. 어째서 누군가에게는 지겨울 정도로 우리에게 세월호 사건이 끊임없이 설왕설래되고, 결국 대한민국의 2014년을 뒤덮어버렸는가? 그건 세월호로 생긴 상처가 시간이 지나도 아물기는커녕 자꾸 덧났기 때문이다. 아픈 상처를 치료하는 대신 소금을 끼얹고, 틈날 때마다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리려는 시도가 더 큰 분노를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세월호 사건의 배후에 구원파의 문제가 있다거나 오대양 사건을 운운하는 것이 얼마나 사실 규명과 동떨어진 것인가는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토끼몰이를 당하는 자의 입장에서는 선택의 폭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기에, 도망할 수밖에 없었고, 국면 전환자들은 쉽게 도망자를 추격하는 장면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바꿔놓았다. 하지만 감추려고 할수록 그 의도와는 달리 분명히 드러난 것은 현 국가권력의 본 면목, 그 후안무치(厚顔無恥)하고 무능한 모습이다. “시장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고 모든 잘못은 니 개인 탓”이라고 주장하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할 의사도 없다는 것을 보여준 바로 그것이다.

 

 

        더욱 으스스한 것은 세월호 참사 발생 34일 만에 국정최고 책임자가 텔레비전에 나와 눈물의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한 후에 보인 행동이다. 그가 서두르며 바쁘게 날아간 곳은 아랍에미리트(UAE), 바로 한국형 원자력발전 설치 행사에 참석하기 위한 것이다. 이럴진대 국내의 원자력발전이 “무조건 전진”의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건 불문가지다. 하긴 선진국들이 망설이고 있을 때가 우리에게는 “원전수출”의 호기회임을 일러준 분의 가르침이 아직도 귓전에 생생하지 않은가? 하지만 시장만능주의 체제에서 “루저”가 되지 않으려면 돈이 있어야 하고, 돈을 벌기 위해 원전을 위태롭게 하는 자가 나타난다고 해서 이상할 게 없으므로 그로 인해 원전의 안전은 항시 위협받는 상태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 문제다. 그렇다고 해서 국가권력이 원전의 그런 위험을 방지하거나 안전하게 관리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는 것이 세월호 사건으로 이미 명백하게 드러났지 않은가? 그 위험은 당장 우리 세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수 만년 수십 만 년 후의 우리 후손의 삶까지 근본적으로 위협하기에 더욱 더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연말을 맞는 우리의 미풍은 지나간 한 해를 돌이켜보며 섭섭한 일은 잊고 다가올 해에 희망을 품는 것이다. 그래서 망년(忘年)회가 질탕스럽게 벌어지고, 미래학자가 예측하는 뜬구름 같은 낙관적 기대가 새해를 장식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덕담은 이런 망각과 희망이 얼버무리는 일종의 바람잡이이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될 게 있는 법이다. 우리의 삶이 현재 어떤 처지인지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까마득한 우리 후손의 삶을 송두리째 저당 잡히면서 살고 있는지 잊을 수는 없다.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말은 실상 우리의 불행을 반증한다. 그렇다고 희망을 포기하면 행복해질 거라는 건 아니다. 스데로트의 언덕과 광화문 광장에서 일어난 “악의 평범성”에 절망하면서 힘들게 짜낸 희망만이 내년을 살아갈 힘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장석만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stonemann@daum.net
논문으로 <‘종교’를 묻는 까닭과 그 질문의 역사: 그들의 물음은 우리에게 어떤 문제를 던지는가?>, <인권담론의 성격과 종교적 연관성>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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