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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385호-종교와 예술 사이 어딘가에서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6. 8. 24. 16:33

 

 

종교와 예술 사이 어딘가에서




2015.9.22

 

 

1. 우디 앨런 감독의 1986년 작 <한나와 그 자매들> 속에서 감독 본인이 직접 연기한 캐릭터 미키는, 건강검진 후 암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사로잡힌다. 다행히 암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죽음이 어느때나 불쑥 자신을 찾아올 수 있다는 현실을 잠깐이나마 강렬하게 체험한 미키는, 직장도 그만두고 죽음의 공포와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의 대답을 찾아 헤맨다. 그는 도서관에 가서 철학책도 찾아보고 가톨릭으로의 개종도 심각하게 고려해보고 (우디 앨런 자신처럼 그가 연기하는 캐릭터도 유대인으로 설정되어있다), 하레 크리슈나 교도가 되어볼까도 생각해본다 (이 모든 과정은 상당히 코믹하게 그려진다). 급기야 그는 무력하게 죽음이 찾아올 때를 맞는 것보다는 차라리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서 자살을 시도하나, 이마저도 코믹한 해프닝으로 끝나버린다. 어설픈 자살 시도가 실패한 후 거리로 나온 미키가 정신없이 걷다가 들어 간 곳은 오래된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이었다. 극장에서는 마침 그가 어린 시절에 좋아하던 옛 코미디 영화를 상영중이었다 (참고로 이 영화는 막스 형제의 1933년 작 <오리 수프>였다). 웃고 노래하는 스크린 속의 배우들을 보며, 미키는 풀 수 없는 문제에 괴로워하기 보다는, 스크린 속 배우들처럼 그리고 그들을 보며 행복해했던 어린 시절의 자신처럼, 삶의 순간 속에서 느끼는 작은 기쁨들에 웃고 즐거워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물론 감독의 이러한 생각이 무슨 대단한 깨달음이나 혹은 삶의 고민과 죽음의 문제 전반에 대한 거창한 해답처럼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삶은 알 수 없고 인간관계는 항상 문제의 연속일 것이며, 밝은 햇살 뒤에는 쓸쓸한 그늘이 있고 어느 순간 선뜩한 바람이 불 것이지만, 그래도 스크린 속의 인물들은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언제까지나 그렇게 웃고 있을 것이며, 누군가는 또 그것을 보고 웃으며 삶의 무거움을 잠시나마 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계속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될 것이다, 뭐 이 정도의 메시지인 것이다.

 

 

 

이 장면을 보고 영화가 혹은 예술이, 종교도 해결해주지 못한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준다고 주장하면 아마도 지나친 비약일 것이다. 그러나 여러 종교를 찾아가서도 끝끝내 죽음의 공포를 떨쳐버리지 못했던 인물이 마지막에 영화를 보며 ‘그래도 삶은 살만한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장면에는, 종교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 사이에서 미묘하게 겹치는 지점을 생각해보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 미키에게 스크린 위 이미지들은 가짜가 아니라 진짜였다.

 

 

 

2. 대만의 영화감독 차이밍량은 몇 년 전부터 <행자> 연작이라 불리는 단편들과 중편 영화 <서유>에서, 삭발을 하고 붉은 승복을 입은 배우 이강생이 복잡한 도시를 아주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을 필름에 담고 있다. 이강생은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에만 20여분이 걸릴 정도로 극도로 천천히 걸으며, 그 느린 걸음을 카메라는 한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그대로 담아낸다. 현대 영화의 속도감에 익숙해진 관객에게 이 느림은 참을 수 없는 고문일 수도 있겠다. 차이밍량의 이전 영화들에 출현한 배우 이강생을 알고 있지 않다면, 천천히 걷는 그의 모습을 보고 그를 진짜 승려로 착각할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여기서 굳이 승려와 배우를 구분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한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이것은 연출된 종교의식이며 따라서 이는 진짜 종교적인 행위와는 엄연히 다른 것이라 말하겠지만, 사실 대부분의 종교의식은 어떠한 의미에서 연출된 것이며, 자기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연기하는 배우들처럼 종교의식에 참여하는 이들도 그 순간 일상의 존재가 아닌 비일상의 존재가 된다. 행자를 연기한 이강생도 그 순간만큼은 수행자이며, 이를 지켜보는 관객들에게도 그 순간은 수행의 시간이 된다고 할 수도 있다.


 

 

9월초 광주 아시아예술극장 개관기념 공연작으로 상연된 차이밍량의 연극 <당나라 승려>에서 이강생은 당나라 승려 현장이 되었다. 그가 누워있는 하얀 종이 위에 검은 목탄으로 거미가 그려지고 달과 나무와 꽃 등이 그려졌다. 50여분이 지나서야 일어난 승려는 그림과 검은색으로 가득찬 종이를 깔고 앉아 염불을 외고 머리를 깎고 과일을 먹는 등 소소한 행위를 했다. 다시 펴진 흰 종이위로 온갖 선들이 그려지고 그 위를 승려가 예의 그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걸어 다니다, 어느 순간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스크린이 없는 이곳에서 움직이는 그가 여전히 스크린 속 존재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가 앉아 있는 흰 종이가 스크린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마치 그 위로 온갖 일들이 기록되고 지워지고 그 위에 또 다시 무엇인가가 씌여지면서 어떤 것은 잊혀졌다가 어느 순간 다시 나타나기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 긴 시간동안 승려는 무슨 대단한 모험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잠을 자거나 몸을 가다듬고 무엇인가를 먹고 그리고 걷는 일상의 일들을 행한다. 공연은 2시간 남짓 진행되었지만, 그 속에 농축되어 있는 시간은 가늠할 수 없이 긴 시간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이곳저곳으로 걸어 다니던 배우와 관객들은 모두 시간을 가로지르는 의례에 참석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의례학자 리차드 쉐크너는 의례는 연극과 달리 “make-believe(~인 척 하는 것, 가장)”가 아니라 “make belief (믿음을 만드는 것)”라 구분했지만, 내게는 그 두 구분이 그렇게 명확해 보이지 않는다. (물론 누군가는 -대개 종교는- 이러한 구분을 강하게 주장한다는 점은 사실이다). 어쩌면 인간은 “make-believe”를 통해서만 현실을 직시할 수 있고, 또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한 의미에서 의례와 연극은, 종교와 예술은 둘 다 “make-believe”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최화선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최근 논문으로 <이미지와 응시:고대 그리스도교의 시각적 신심(visual piety)>, <후기 고대 그리스도교 남장여자 수도자들과 젠더 지형>, <기억과 감각: 후기 고대 그리스도교의 순례와 전례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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