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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의 노린내
: ‘기이한 이야기’와 해석자의 자리
2015.10.13
“그때 나물을 따러 갔는디, 어디서 노린내가 심하게 나더라고.
그러더니 쉬익 쉬익 소리가 나고 누가 머리 끄덩이를 잡아 끄는디...”
1.
고흥으로 이사온지 40일 가까이 지났다. 같은 시대, 같은 나라 안에서 거처를 조금 옮겼을 뿐이지만, 처음 한 달은 언어 습관, 생활 관습, 자연 환경 등 모든 것이 낯선 가운데 그야말로 혼돈의 나날이었고, 최근에야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다. 우리집은 시골 마을의 가장자리, 주로 혼자 사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집들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어느 날 창밖으로 무슨 소리가 나서 나가보니, 열린 대문(이 마을에서는 낮에는 대문을 반드시 열어두어야 한다. 대문을 열어 놓아야 ‘복’이 들어온다고 한다. 이사 와서 마을 주민들로부터 제일 처음 들은 ‘충고’다.)으로 언제 들어오셨는지, 내년에 팔순이시라는 맨 윗집 할머니와 다른 마을의 아주머니 한 분이 우리집 마당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촌평을 나누고 계신다. 우리를 발견하신 할머니는 호박 세 덩이를 불쑥 내미시고, 곧이어 마을에서 일어난 각종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를 비롯하여 수많은 이야기들을 두어 시간에 걸쳐 쉬지 않고 생동감 있게 이야기해주고 가셨다. 땡볕에 서서 끝없이 이어지는 말씀을 듣느라 머리가 멍해진 상태에서도 유독 흥미로웠던 것은, 도깨비에 관한 할머니의 경험담 및 도깨비와 연관된 각종 사건사고에 관한 이야기였다.
화자인 할머니와 추임새를 넣는 아주머니의 말씀을 나름대로 정리해보면, 이 일대에는 노린내가 유독 심한 장소가 있다고 한다. 공동묘지 근처를 비롯한 한적한 몇몇 장소인데, 그곳은 낮이든 밤이든 조심해야 하는 장소이며, 혼자서 돌아다녀서는 안 된다. 도깨비는 노린내로 자신의 존재를 알릴 뿐 아니라, 머리 끄덩이를 잡아 끌고 물건을 밤새 두드리는 등, 물리적인 힘을 행사하기도 한다. 나아가 부주의한 사람은 도깨비에 홀려서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아마도 지난 수십 년 동안 마을에서 실제로 일어났을 사건사고의 소식들은 ‘도깨비’라는 초자연적 존재에 관한 믿음과 뒤얽혀서, 생생하면서도 기이한 이야기로 펼쳐지고 있었다.
2.
낯선 ‘기이한 이야기’와 마주쳤을 때,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학자들은 기이한 이야기(현상)를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또 다른, 더 넓은 의미의 맥락에서 그 이야기(현상)의 자리를 다양한 방식으로 살펴왔다. 나는 최근 몇 년간 이른바 학술 명저들의 번역 작업을 수행하게 된 것을 기회로 삼아 인류학과 종교학의 초창기 주요 저작들을 정독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초창기 인류학과 종교학의 상당 부분은 낯선 타자의 ‘기이한 이야기(혹은 현상)’를 어떻게 이해/설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과 겹쳐진다.
약 145년 전에 출판된 타일러(E.B. Tylor)의 『원시 문화(Primitive Culture)』(1871년 초판 발행)에는 내가 엊그제 할머니로부터 들은 도깨비 이야기와 위화감 없이 어울리는 동서고금의 갖가지 사례들이 방대하게 제시되어 있다. 그 책에서 타일러는 “하고많은 것 중에서 신화 연구에 필요한 것은 광범위한 지식과, 지식을 다루는 폭을 넓히는 일이다. 협소한 시야에 적합하게 이루어진 해석은 폭넓은 시야에 노출될 때 약점을 드러낸다.”면서, ‘기이한 이야기’를 접할 때 가능한 대로 모든 시대, 모든 장소로부터 비슷한 사례들을 수집하고, 거기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어떤 패턴을 발견하고자 했다. 잘 알려진 대로, 이러한 노력을 통해 인류 문명의 발달 단계에 대한 타일러의 이론이 펼쳐지게 된다. 타일러는 아마 도깨비의 노린내 이야기를 문명의 발달에서 하등한 단계에 속하는, “초기의 어린애 같은 상태의 인간 지성에 의해” 생겨난 믿음의 잔존물로 설명하지 않을까 싶다.
한편, 익히 알려진 대로,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에 레비브륄(Lvy-Bruhl)은 실제의 경험을 정령이나 주술, 초자연적 힘의 작용으로 설명하는 사람들의 ‘기이한 이야기’를 ‘전논리적 심성’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그와 같은 ‘기이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 모든 사건은 신비한 힘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믿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은 “보이지 않는 정령들과 만질 수 없는 힘들과 정말로 함께 산다.”(『원시인의 정신세계』) 그렇다면 레비브륄은, 도깨비의 노린내 이야기를 해준 할머니와 아주머니는 “자연 속의 모든 대상과 존재는 신비한 참여와 배제의 망 속에서 서로 연루되어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전논리적 심성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설명하지 않을까.
반면, 말리노프스키(B. Malinowski)는 어떤 기이한 이야기(현상)를 이해하기 위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가능한 한 넓은 범위에서 가능한 한 많은 사례들을 수집해서 그 안에서 유의미한 패턴을 찾아내기보다는, 그 이야기(현상)가 속한 문화의 통합적 체계 속에서 그것이 수행하는 기능을 살피고자 하였다.(『산호섬의 경작지와 주술』) 곧 기능적 총체로서의 문화를 염두에 두고 사실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상호연관성들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말리노프스키의 이른바 ‘기능주의’적 접근법과 위의 타일러나 레비브륄식 접근법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말리노프스키는 맥락에서 떨어진 요소들을 조합한 이론은 무의미하다고 여겼고, 어떤 요소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맥락 속에서 그 요소가 담당하는 기능을 보아야 하고, 또한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를 파악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말리노프스키식으로 접근하자면, ‘도깨비의 노린내’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이야기가 등장하고 퍼지는 소규모 사회(우리 마을)에서 그것이 수행하는 기능을 총체적으로 살펴야 할 것 같다.
3.
2015년 가을, 한국 남도의 시골마을에서 살아가면서, 나는 여러 세대 전에 타일러와 레비브륄의 관심을 끌었던 이야기들, 말리노프스키가 설명을 추구했던 현상들, 그들이 물었던 다양한 물음들, 그리고 그들의 저마다의 대답을 새삼스럽게 다시 읽는다. 타일러나 레비브륄이나 말리노프스키의 저작들은 저마다의 이유에서 제각기 매혹적이다. 그러나 나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멀리 떨어진 그들’의 이야기를 평가하고 분석하는 냉정한 관찰자가 될 수 없다. 나는 그러한 이야기(의 주체들)를 이해하려 애쓰는 해석자인 동시에 그러한 이야기(의 주체들)와 함께 얽혀 살아가야 할 이웃이기 때문이다.
내게는 모자란 여러 가지 생존의 기술 및 자연과 이웃과 함께 하는 삶의 축적된 ‘지혜’가 그러한 낯선 이야기와 관습의 외피를 입고 제시될 때, 나는 그러한 이야기와 관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누어 주고, 나누어 받고, 열린 대문으로 아무 때나 들어오고, 흙과 동식물과도 얽혀 살아가는 생활. 이것과 ‘도깨비의 노린내’ 이야기를 떼놓고 생각할 수 있을까? 잊어버리고 있던 것들, ‘합리성’과 ‘개인주의’에 갇혀 잊어버리고 있던 것들을 문득 문득 깨우치게 되는 순간들과 이러한 ‘기이한 이야기’는 분리될 수 있는 것일까? 무엇 하나 섣불리 대답할 수 없다. 지금으로서는 다만 사건사고의 사실들과 뒤얽혀 펼쳐진 기이한 이야기들이 내게 불러일으킨 ‘효과’-외진 곳에는 혼자 돌아다니지 않는다-를 응시하면서, 그 이야기가 수행하는 기능을 조심스럽게 짐작해 볼 뿐이다.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저서로 《생태학적 시선으로 만나는 종교》등이 있고, 논문으로 <생태의례와 감각의 정치>,<인간과 종교,그리고 생태 -더 큰‘이야기’속으로 걸어가기->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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