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잊혀진 꿈의 동굴” 혹은 기원에 대한 상상력

 

 


  news  letter No.487 2017/9/12

 

 

 

 

 

 


      베르너 헤어조그(Werner Herzog) 감독의 다큐멘터리 <잊혀진 꿈의 동굴(Cave of Forgotten Dreams), 2010>은 1994년 프랑스 남부에서 발견된 쇼베(Chauvet) 동굴 속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이 곳에는 말, 매머드, 코뿔소, 들소, 동굴 사자 등을 그린 수백점의 벽화들이 있으며, 이들이 그려진 시기는 기원전 약 3만 2천년(혹은 약 3만 7천년)전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보존의 이유로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는 이곳에 헤어조그는 프랑스 정부의 특별 허가를 받아 고고학자, 미술사학자, 고생물학자, 지질학자등으로 이루어진 탐사대와 함께 들어가 동굴 내부를 촬영했다. 동굴 주변, 동굴 입구로부터 시작해서 동굴 발굴 이야기, 제한된 시간 안에 제한된 조건 하에서만 촬영해야 하는 촬영팀의 기술적인 문제들, 초기 발굴팀의 증언으로 이어지는 초반부는 이 다큐멘터리가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역사적 장소를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라는 느낌이 들게 한다.


     그러나 쇼베 동굴에서 가장 유명한 이미지 중 하나인 말 -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말의 이미지를 시작으로, 동굴 속 여러 이미지들을 보여주기 시작하면서, 이 다큐멘터리는 조금씩 단지 현실 공간의 충실한 재현이라는 것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한다. 어두운 동굴 속 벽화들을 가까이 보여주며 천천히 춤추듯이 이동해가는 카메라와 에른스트 라이제거(Ernst Reijseger) 의 신비한 음악이 더해지면서 이곳은 헤어조그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공간이 된다. 어둠 속 불꽃 아래 벽에 비친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을 보면 이곳은 인류 최초의 영화관 같기도 하고, 벽면 가득한 이미지들 아래 제단 같은 바위 위에 올려진 동물의 두개골을 보면 아득한 옛날의 종교의례가 행해졌던 장소 같기도 하다. 이곳을 바라보는 우리는 감독의 말처럼 "잊혀진 꿈"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영원의 시간을 건너온" 무엇인가를 마주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의 의미가 사라진" 듯한 이 "매혹적인 상상의 세계" 끝에서 감독은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우리는 단지 "상상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악어와 같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아마도 오직 분명한 것은, 이 동굴/벽화에 매혹된 헤어조그가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종교와 예술의 기원을 나름대로 새로 창조해내었다는 것뿐일 것이다.


     쇼베 동굴 벽화보다 약 1만 7천년 이후의 것으로 추정되는 라스코 동굴 벽화가 1940년 발굴되었을 때, 프랑스의 사상가 조르쥬 바타유(Georges Bataille) 역시 이 선사시대 동굴 벽화에 매혹되었다. 1955년에 출판된 책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Lascaux ou la naissance de l'art)>에서 바타유는 라스코 동굴에 그려진 동물 이미지들을 보며, 놀이와 예술, 종교의 탄생을 이야기했다. 그는 인간이 도구를 사용하며 노동이라는 생존에 유용한 활동을 하게 된 바로 그 순간부터, 동시에 오히려 그 유용성에 위반되는 가치를 지니는 행위들, 즉 노동하고 계산하며 물질의 효용가치를 높이는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오히려 부정하는 행위들-유용성에 반대되는 행위들로서의 놀이, 예술, 제의에 몰두했으며 이를 통해 주체로서의 인간 상태를 확보하고자 했다고 생각했다. 라스코의 동물 이미지들에서 바타유는, 노동을 통해 동물과 자신을 구분하기 시작한 인간이 자신이 떠나온 동물성, 이제 인간에게는 금기의 대상이 된 동물성에 매혹당하며 이를 신성과 동일시하는 모습을 보았다. 바타유는 이 동물 이미지들이 지니는 주술적 의미를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있어서 주술이란 어떠한 직접적 이익을 가져오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이익이 되는 결과를 탐색하는 과정 속에서 오히려 무력감을 깨닫고 자신의 힘이 닿지 않는 전능함의 영역을 감지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창을 맞고 쓰러져 내장을 쏟아가며 죽어가는 들소의 그림에서 엄청난 생명력과 힘을 발견하며, 그 앞에 새의 머리를 한 인간이 죽은 것처럼 누워있는 모습에서 이 신성한 힘을 마주한 무력한 인간의 혹은 주술사의 황홀경을 본다.


      바타유는 이것이 예술의 탄생, 혹은 종교의 탄생이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바타유의 세계관 속에서의 예술의 탄생, 종교의 탄생이다. 그러한 점에서 선사시대 동굴 벽화를 다룬 헤어조그와 바타유의 작업은 유사한 점이 있다. 헤어조그의 <잊혀진 꿈의 동굴>도, 바타유의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도 엄밀한 사실적 의미에서의 인류의 '기원'은 아니다. 그보다는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기원이라는 틀 안에 담아낸 산물이다 (사실적 의미의 기원과, 이처럼 세계관을 은유적으로 기원이라는 틀 안에 투영시킨 이야기를 혼합하기 시작하면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그러나 사실적 기원이 아니라고 해서 이들이 만들어낸 이 기원에 대한 상상력의 산물이 결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다시 바타유를 빌어오자면, 유용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이러한 상상력의 작업들은 우리에게 사실과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에서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된 것들, 어떠한 틀에 의해서 배제되고 억압되고 지워진 것들을 똑바로 다시 쳐다보고,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학기다. 나는 또다시 한 학기 동안 학생들과 사실이나 유용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것들의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주는 얄팍한 환상과 위안, 미혹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잊혀진 꿈 속의 영원 같은 시간”속에서 불현 듯 마주하게 되는 또렷한 현실과 그 현실의 잔인함을 이겨내게 하는 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길 바란다.

 


최화선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hschoe72@gmail.com
최근 논문으로 <이미지와 응시:고대 그리스도교의 시각적 신심(visual piety)>, <후기 고대 그리스도교 남장여자 수도자들과 젠더 지형>, <기억과 감각: 후기 고대 그리스도교의 순례와 전례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