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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501호-시골생활 단상: 도서관과 문학관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7.12.19 20:46

시골생활 단상: 도서관과 문학관

             

   news  letter No.501 2017/12/19

 

 

 

 

 



    1.

  요즘 난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처럼 내 자신이 어디로 굴러 떨어진 건지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 관청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내 자신이 어색하기도 하고, 그런 나를 향해 어디서 굴러 먹다온 놈이냐고 윽박지르는 사람도 낯설기만 하다. 더욱이 이곳 사람들이 내게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주길 바라는 기색을 느낄 때는 정말 난감하기 그지없다. 자의든 타의든 시골자락에 숨죽여 살아가려는 사람에게 뭔가를 기대하고픈 심정도, 그런 기대에 조금이라도 응해야 한다는 일말의 책임감이 드는 마음도, 곰곰이 따지면 아직도 지식인에 대한 사회의 환상에서 나도 그들도 모두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데서 연유하는 것 같다. 가끔씩 마을 입구에 달린 현수막에 새겨진 지역민의 후손들의 학위 취득이나 승진을 알리는 문구에서 교육과 계층 상승을 연결해서 생각하는 시골 토착민들의 마음을 엿보게 된다. 비록 예전에 비해 교육과 계층 상승의 연결고리가 약화되었다고 해도, 내가 사는 이곳에서는 여전히 교육은 계층 상승의 강력한 수단이고 그런 교육을 받은 자는 가문의 영광이고 마을의 자랑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하다. 하물며 유명 인사에 대한 동경의 시선은 얼마나 간절할까.

 

  2.

  최근에 내가 사는 곳에는 한 소설가의 문학관이 세워졌다. 그의 문학관이 여기에만 있는 것이 아닌 걸 보니 꽤 이름이 알려진 작가임에 분명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삶과 창작 행위가 완료되지 않은 작가를 위한 문학관이, 더군다나 지자체의 부족한 재정 상황을 고려할 때 공공예산으로 세워진다는 것은 잘 납득되지 않는다. 그리고 유명 작가를 모셔야 지역의 문화가 발전한다고 보는 이곳 관료와 정치인의 말도 설득력이 없다. 과문한 탓이겠지만 한 작가를 위한 문학관 건립이 지역 문화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작가의 유명세에 의지해 지역의 문화를 활성화할 수 있다는 생각은 지역이 소유한 문화 자본 혹은 인적 자본에 대한 의도하지 않은 외면이나 괄시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나아가 그러한 차별은 아이와 청년 인구가 부족한 지방의 상황에서 지방 문화의 몰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어떻게든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보여주고 또 만들고 싶은 욕망은 이해되지만, 유명 작가와 같은 외부인의 손길에 의지하는 방식은 문제 해결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건, 전시 행정에 막대한 예산을 쏟기보다는 풍부한 도서와 정보를 쾌적한 환경에서 향유할 수 있는 도서관 건립과 운영에 투자하는 것이 지역 문화를 활성화하는 데 더욱 효과적이라는 인식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자신을 위한 문학관 건립을 당연하게 혹은 못이기는 척 받아들이는 작가들, 그리고 그러한 분위기를 부추기는 관료와 정치인들의 모습이 부끄럽다. 가시적인 성과와 수익, 그리고 자기 입지를 먼저 따지는 지방의 관료와 정치인, 그리고 소수 토호세력의 행태 앞에서 사회에서 제기되는 지방분권과 자치의 가치는 퇴색된다.


  3.
  이제껏 책과 더불어 살아온 내게는 책을 향유할 수 있는 모두의 공간은 매우 소중하다. 그곳은 전시된 누군가의 작품과 삶의 여정을 일람하는 곳이 아니라 모두가 저마다의 생각을 일구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신비로운’ 공간이자 다양한 세상을 알아가는 앎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책을 통해 우리는 세상이 여러 색깔로 이루어졌음을 경험하고, 그러한 세상들을 일구기 위한 자신의 동기와 소질을 발견하게 된다. 똑같은 세상이 아니라 다채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중요한 것일까. 어떤 이야기가 떠오른다. 한 인류학자가 파라구아이의 차마코코 인디언 문화를 연구하기 위해 한 마을을 방문했다. 그곳에는 장차 샤먼이 될 어린 소녀가 있었다. 소녀의 이름은 엘레나. 엘레나는 그 지역 방송사의 연출자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대신에 파란 눈의 서양 인류학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자신을 그렇게 바라보는 소녀의 눈길을 불편하게 여긴 인류학자는 소녀에게 이렇게 물었다. “왜 그렇게 날 쳐다보지?” 그러자 까만 눈의 엘레나는 인류학자의 파란 눈을 응시하면서 이렇게 물었다. “당신에게 세상은 어떤 색깔인가요?” “당연히 네 것과 같겠지.”라는 인류학자의 대답에 그 소녀는 다시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당신은 세상이 내게 어떤 색깔인지를 아나요?”(Michael Taussig, What color is the Sacred?,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9)


  4.
  학창시절 내가 달동네에 살던 때였다. 저녁 무렵이면 이집 저집에서 백열전구가 하나 둘 켜지면, 나는 집 아래로 펼쳐지는 빛의 공연을 만끽했다. 그러면서 늘 궁금해 했다. 저 빛의 공간에는 어떤 삶이 펼쳐지고 있을까, 필시 나와는 다른 세상이리라 상상하면서 한참을 밖에 서있고는 했다. 그게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 중 하나였다. 교회에 다니거나 절에 다니는 친구들은 분명히 다른 친구들과는 조금은 달라보였으니, 어린 나이에 종교는 차이 혹은 다름의 의미화가 생성되고 공유되는 문화 장치임을 조금은 느꼈던 모양이다. 서양 학자와 엘레나의 대화는, 그런 느낌 혹은 소박한 호기심이 어느덧 내게서 사라졌음을 일깨워주었다. 어느 순간에 지식의 세계에 함몰되면서, 좀 더 냉혹하게는 지식으로 생계를 유지하느라 세상에 대한 감수성이 내게서 희박해졌던 것이다. 물론, 그런 감수성은 “비인간적인 속도로 변해가는 역사가 인류의 경험에 초래한 이 의지할 데 없다는 느낌”에서 비롯되고 그러한 현기증 나는 사회에서 자신을 구하기 위해 타자의 삶에서 뭔가를 기대하는 어설픈 욕망일 수도 있다(Susan Sontag, 『해석에 반대한다』, 도서출판 이후, 2007). 그럼에도 나는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그런 감수성이 시골 생활을 통해서 조금은 되살아났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런 감수성이 풍부한 아이와 청년들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저마다의 세상을 맘껏 창조할 수 공간들이 이곳에 생겼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우리는 모두 경직되고 획일적인 사회가 얼마나 큰 피로감을 주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아이와 청년이 유연하고 탄력이 있는 사회를 일구어 주기를 기대하려면, 세상은 하나의 색깔로 칠해진 것이 아니라 여러 색깔을 지닌 자생적이고, 토착적인, 여러 조각의 문화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고, 또 그러한 자기 문화를 구성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울 수 있는 문화 공간과 사회적 지원이 먼저 제공되어야 한다.

 


박상언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논문으로 <배아줄기세포연구의 생명윤리담론 분석: 한국 기독교와 불교를 중심으로>,<간디와 프랑켄슈타인,그리고 채식주의의 노스탤지어:19세기 영국 채식주의의 성격과 의미에 관한 고찰>,<신자유주의와 종교의 불안한 동거: IMF이후 개신교 자본주의화 현상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

 

 

댓글
  • 프로필사진 박규태 박상언 선생, 글로나마 다시 만나서 반갑네요...무언가 글 속에서 노을의 깊이 같은 게 느껴지네요...
    글을 읽으면서 왠지 미안하고 또 고맙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2017.12.20 08:1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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