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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546호-길 위의 여성들 : 걷기의 자유를 위하여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8.10.30 17:37

 

길 위의 여성들 : 걷기의 자유를 위하여

 

              news  letter No.546 2018/10/30                


 

 


  

 

 

  

       '맨스플레인(mansplain)'이라는 말을 우리에게 각인시킨 리베카 솔닛의 책 중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와 더불어 한국 서점에서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는 또 다른 책은 《걷기의 인문학》이란 책이다. 걷기와 관련된 인류의 문화사를 다양한 차원에서 흥미롭게 저술한 이 책에는, 솔닛 자신이 걷기를 사랑하며 걸을 때만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다는 점이 생생히 드러나 있다. 솔닛이 들려주는 걷기의 역사 속 모든 이야기들이 흥미롭지만, (여성 순례에 관심이 있는) 나에게는 그중에서도 순례에 대한 고찰과 (솔닛 스스로가 신앙과 관계없이 치마요(Chimayo) 성지 순례길을 걷기도 했다), 여성들의 걷기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특히 그녀는 여성과 관련해서, 자신이 서술한 걷기의 역사 속 주요인물들이 대부분 남자들이었음을 새삼 다시 확인하면서, 자유롭게 세상을 걸어다니고 싶어했던 여성들이 부딪혀야했던 수많은 위험과 장벽들을 이야기한다. 솔닛의 글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4세기 5세기에 성지 순례길에 나섰던 여성들이 감수해야 했던 위험과 어려움들이 떠올랐다.

       그리스도교 성지 순례의 초창기라 할 수 있는 4세기 5세기에 성지 순례를 떠난 여성들이 상당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에 놀라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그리스도교 순례기의 저자도 에게리아(Egeria)라는 이름으로 추정되는 여성이며, 직접 팔레스티나를 순례하며 주님무덤성당(성묘교회)을 비롯한 성지 건설의 토대를 닦은 이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Helena)다. 그밖에도 파울라(Paula)를 비롯한 많은 로마의 귀족 그리스도교 여성들이 4세기 후반 팔레스티나로 성지 순례를 떠났다. 물론 팔레스티나 성지 순례를 갈 정도의 여성들은 대부분 (신앙심과 더불어) 어느 정도의 부와 지위를 갖춘 사회의 상류 계층 여성들이었다. 그러나 심지어 이러한 계층 여성들의 신심에서 우러난 순례도 일부 남성들에게는 마땅치 않게 받아들여졌다. 사막의 교부를 찾아 온 여성에게 "어디에도 출타해서 안되는" 여성이 감히 이러한 여행을 했다고 호통쳤던 이도 있었고, 여행 중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남자들과의 접촉이 그리스도교인으로서의 품위를 해치는 것이라며 여자들의 순례에 대해 반대했던 이도 있었다. 그러나 여성들의 순례에 대한 이러한 교부들의 못마땅한 시선보다도 더 문제는 아마도 실제 여행하는 여성들이 길 위에서 부딪힐 수 있는 위험이었을 것이다.


       5세기 오늘날 터키의 실리프케(Silifke)에 해당하는 고대도시 셀레우키아(Seleucia)에는 성녀 테클라(Thecla) 순교기념경당과 교회 등으로 이루어진 테클라 성지가 있었다. 이 테클라 성지는 특히 주변의 많은 여성들이 찾아 오는 성지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곳에서 일어난 여러 기적을 묘사한 책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성지 근처에서 술을 먹고 돌아다니던 두 남성이 성지 근처를 거닐던 한 여성을 끌고가 그녀에게 강제로 술을 먹이고 강간하려 하자, 성녀 테클라가 그들 앞에 나타나 무서운 목소리로 호통쳐 여성을 놓아주게 하고, 도망가는 남성들을 끝까지 쫓아가 결국 그들을 죽음으로 벌하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가 실제 일어난 일인지 허구적 창작물인지에 대한 논의와는 별개로, 분명 이 이야기는 당시 성지 근처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즉 여성이 혼자 성지 순례를 간다는 것, 아니 성지 근처에서 잠시라도 혼자 걷는다는 일 자체에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비슷한 제목의 두 영화 <인투 더 와일드Into the Wild, 2007>와 <와일드Wild, 2014>는 모두 실존인물의 걷기와 관련된 영화다. 전자는 크리스토퍼 매캔들리스(Christopher McCandless)라는 청년이 여러가지 이유로 세상을 등지고 길을 떠나 미국 전역을 걷다가 알래스카의 한 숲 속에서 사망한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고, 후자는 셰릴 스트레이드(Cheryl Strayed)라는 여성이 삶의 진창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약 4,300km에 달하는 태평양 연안의 트레일(Pacific Crest Trail)을 걸었던 실화에 바탕한 영화다. 이렇게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 두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차이점 중 하나는 홀로 길을 걷는 두 사람이 각기 길 위에서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의 태도다. <인투 더 와일드>의 크리스토퍼는 길 위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과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삶을 다시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는다. 그러나 <와일드>의 셰릴은 낯선 이를 만날 때마다 경계한다. 그녀는 '혼자 걷는 것이 아니고 남편이 있다'라고 거짓말을 해서라도,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남자가 혹시 자신에 대해 딴 생각을 품고 접근하지나 않을지 경계를 하며, 자신을 방어해야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실제로 셰릴은 자신에게 수상한 시선을 던지며 접근하는 남자들을 피해 도망쳐야 하는 순간에 처한다. 다행히도 셰릴은 그날 밤을 무사히 넘기지만, 그 순간 셰릴이 느꼈던 공포심은 여성관객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매우 실제적인 공포다. 여행은 남자 여자 모두에게 위험을 동반하는 일이겠지만, 이 두 영화 속에 나타나는 두 주인공의 태도의 차이에는 우리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


 

  솔닛은 19살의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가 일기에 썼던 구절을 인용한다. "풍경의 일부가 되고 싶은데, 익명의 존재가 되고 싶은데, 경청하고 싶은데, 기록하고 싶은데, 다 망했다. 내가 어린 여자라서. … 모든 사람과 최대한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노천에서 자도 되면 얼마나 좋을까. 서부로 여행을 가도 되면 얼마나 좋을까. 밤에 마음껏 걸어 다녀도 되면 얼마나 좋을까."ᅠ 실비아 플라스의 탄식은 19살의 내가 했던 생각이자, 아직까지도 내가 혼자 여행길에 나서는 걸 주저하게 만드는 이유를, 또 세상의 많은 여성들이 자유롭게 혼자 세상에 나가 걷고 사색하는 시간을 가질 수 없게 만드는 이유를 말해준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그리스도교 여성 순례자들처럼, 19세기 여성 탐험가들처럼, 그리고 셰릴 스트레이드와 솔닛처럼 용감하게 걸었던 여성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처럼 걸을 용기를 내지 못했다고 해서 너무 스스로를 자책하지 말자. 여자 혼자 길을 걷는 일을, 여행을 떠나고 순례를 떠나는 일을 두렵게 생각하는 것은 타고난 겁많고 소극적인 성격 때문만이 아니라,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게끔 되어있는 세상 속에서 만들어진 것일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솔닛의 표현대로 "수많은 창작과 사유를 가능케 한 혼자 걷기“의 자유와 안전을 여성이 온전히 누릴 수 있게 될 날까지. 

 

 

 


최화선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최근 논문으로 <이미지와 응시:고대 그리스도교의 시각적 신심(visual piety)>, <후기 고대 그리스도교 남장여자 수도자들과 젠더 지형>, <기억과 감각: 후기 고대 그리스도교의 순례와 전례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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