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을 멋있게 변명하기
news letter No.547 2018/11/6
1년 반 가까이 공부를 못하고 있다. 핑계를 댈 일은 늘 생긴다. 차분히 책상에 앉아서 진득하게 자료를 읽으면서 생각을 가다듬고 무슨 글을 어떻게 쓸까 구상하던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이 아득하다. 급기야 집에서도 핀잔을 들었다. 옛날에는 쉬는 날에도 컴퓨터 앞에 붙어 앉아 자료를 검색하고 하더니 요즘은 맨날 유튜브 동영상만 멍청하게 쳐다보면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다. 직장에 가서는 사무실에서 하루 종일 일만 한다. 퇴근 후에 연구실로 올라와서 뭐 좀 해볼 량이면 이미 지쳐서 만사가 귀찮은 지경이다. 이러려고 여길 다니나 싶기도 하다. 학위 논문을 마쳐야 하는 학생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생활이 이렇다 보니 뉴스레터 원고 청탁을 받아도 늘 신변잡기만 늘어놓는다. 어디 어디를 가서 무엇 무엇을 보고 왔다는 이야기, 자기는 공부 안 하면서 거창한 연구 프로젝트를 조직했다는 자랑만 늘어놓는 이야기가 고작이다. 그러니 책이며, 영화며, 인터뷰며, 종횡무진 공부 이야기를 하는 글들이 부럽기만 하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직장에 와서 사무실로 출근하는 생활을 올해로 끝내기로 했다. 직장을 때려치운다고 오해 마시길. 사무실 출근하는 일을 그만하겠다는 것이다. 내년에 내가 어떻게 살지 나도 자못 궁금하다.
뉴스레터 원고 쓸 거리가 없어서 독서 카드를 뒤적거렸다. 재작년 봄에 책을 읽다가 적어둔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면에서는 요즘 나의 게으름을 변명하는 데 딱 들어맞기도 하면서, 또 다른 면으로는 앞으로 무슨 공부를 하고 글을 쓸 때 내 무능함에 좌절하지 않도록 최면을 걸어줄 것 같기도 하다. 이 구절을 옮겨 적을 때에는 크게 탄복하였다. 대가도 저런 말을 하는구나. 아니, 대가니까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막스 베버의 책에서 가져온 구절을 소개하고 싶다. 내 식으로 글을 바꾸었다. 원래 문장이 어떤지 궁금하신 독자는 2008년 범우사에서 나온 《직업으로서의 학문, 정치》의 26쪽부터 29쪽을 읽으시라. 독일어 원서는 내 능력 밖이니 알아서 해결하시면 되겠다. 베루프(Beruf)가 벌어먹는 직업인지, 누군가가 그런 일을 하라고 부르는 소명인지, 둘 다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벌어먹는’을 ‘빌어먹는’으로 잘못 읽지 마시길 바란다. 사실 훌륭한 대구를 이루기는 한다. 소명을 받아 생업을 포기한 사람은 결국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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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일, 심지어 어리석게 보이는 일에 몰입하는 정열이 있습니다. 19세기에 만들어진 필사본을 눈이 빠져라 읽으면서 백여 년 동안 아무도 못 본 것을 내가 지금 다루고 있다고 자부하지요. 모든 것을 다 잊고 필사본의 단어 하나 판독하는 일에 하루를 다 보내는 그런 열정이 없다면 학문에 종사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고 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봅시다. 아무리 정열이 넘치고 또 그 열정이 아무리 깊고 순수한 것일지라도, 그런다고 얻어질 턱이 없는 결과를 억지로 얻으려 한다면 그 정열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래서 정열이란 것도 영감을 낳은 동력일 뿐입니다. 학자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영감입니다. 영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착상입니다.
착상은 억지로 얻으려 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착상이라는 것은 사람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있을 때에 나타납니다. 물론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종종 비전문가의 착상이 전문가의 그것에 비해 좋은 경우도 많습니다. 실제로 학문 영역에서 가장 좋은 문제제기나 그 문제에 대한 가장 훌륭한 해석은 비전문가의 착상을 통해 이루어지죠.
착상이 작업의 역할을 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작업이 착상을 대신하거나 강화시킬 수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정열만으로 착상을 낳을 수도 없습니다. 작업과 정열이 착상을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착상은 그것이 원할 때에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마음대로는 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좋은 착상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가을 햇볕을 즐기면서 낙엽이 쌓인 길을 하릴없이 걷고 있을 때, 굴드의 구팔팔이나 발하의 오륙오, 그도 아니면 쉐링의 천일을 듣고 있을 때에 불현 듯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튼 그것은 사람이 책상 앞에 앉아 필사본 자료를 열심히 읽고 있을 때가 아니라 오히려 사람이 그것을 전혀 기대하고 있지 않을 때 별안간 나타나는 것입니다. 물론 평소에 자료 읽기를 게을리 하였다면, 그리고 뭔가 열중하고 있는 공부의 주제를 갖고 있지 않다면 착상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어쨌든 좋은 주제를 착상하는 데 필요한 영감이 주어지느냐의 여부는 운에 달려 있다고 보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학문에 종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이런 점에서도 요행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감수해야 합니다. 빼어난 학자이면서도 좋은 착상을 가질 수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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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다. 빼어난 학자는 아니지만 좋은 착상을 가진 연구자이면 좋겠다. 그러나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니 할 말은 없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게으름을 피울 수도 없고. 이래저래 임방울의 추억처럼 앞산도 첩첩하고 뒷산도 첩첩하다. 어쨌거나 내년 여름에는 좀 더 나은 글로 찾아뵐 수 있으려나?
조현범_
한국학중앙연구원
논문으로 <윤지충의 폐제분주(廢祭焚主) 논거에 대한 일 고찰>, <마누엘 디아스와 《聖經直解》>,<19세기 조선 천주교의 죄 관념 연구>,<근대 이행기 한국종교사 연구 시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