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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620호-다른 나라로부터 전염된 저주?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0. 3. 31. 16:25

다른 나라로부터 전염된 저주?



 news  letter No.620 2020/3/31   

 


‘주온’이라는 공포영화가 있다. 일본의 초자연적 호러영화는 ‘J호러’라고도 불리며, 전세계 팬들 사이에서는 하나의 장르로도 인식되는데, 그 중에서도 ‘링’과 함께 가장 대표적인 시리즈가 ‘주온’시리즈이다. 아내 ‘카야코’의 외도를 의심한 남편이 결국 자신의 아내뿐만 아니라 어린 아들 ‘토시오’, 그리고 함께 키우던 고양이까지 모조리 죽여버렸으나, 그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 집에 죽은 자들의 원한이 서리게 되어, 카야코와 토시오의 귀신이 살인범인 남편/아버지를 시작으로 그 집을 방문한 모든 사람들 및 그 사람들과 접촉한 사람들까지도 찾아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저주가 영화의 중심 소재이다. 토시오의 귀신이 입을 벌리며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내는 장면이나 카야코의 귀신이 비틀거리며 계단을 기어 내려오는 장면은 영화 ‘링’에서 귀신이 TV화면을 통해 바깥세상으로 기어 나오는 장면만큼이나 많이 회자되고 패러디까지 되어서 J호러팬들 뿐만 아니라 일반대중문화소비자들에게도 어디선가 많이 봤을 법할 정도로 유명한 장면이 되어버렸다. 나 역시 J호러의 팬으로서 ‘주온’의 촬영지에도 방문을 했었는데, 안타깝게도 저주가 시작된 그 집은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어서(사실 이 부분은 지금도 이해가 잘 안 된다), 아쉽게나마 ‘주온2’에 나온 근처의 육교에서 사진을 찍었던 추억이 있다.

‘링’과 마찬가지로 ‘주온’도 헐리웃에서 리메이크가 되었는데, ‘The Grudge’ (2004), ‘The Grudge 2’ (2006), ‘The Grudge 3’ (2009), 그리고 올해에 나온 ‘The Grudge’ (2020)까지 무려 네 편이나 된다. 흥미로운 것은 배경 전체를 일본에서 미국으로 옮긴 ‘링’의 리메이크작들과는 달리 ‘The Grudge’ 시리즈에서는 원작의 배경인 일본의 그 집이 헐리웃 버전에서도 저주의 출발점이 된다는 점이다. 즉, 1편에서는 미국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주인공이 카야코가 죽은 그 집을 방문하는 바람에 저주에 ‘전염’이 되고, 2편에서는 일본에서 유학중인 또 다른 미국학생이 역시 그 집을 방문한 후에 미국으로 돌아와 저주를 더욱 널리 ‘재전파’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3편 역시 문제의 저택에서 시작된 저주가 미국으로 건너온 후 계속해서 전파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으며, 시리즈의 리부트에 해당하는 2020년의 ‘The Grudge’도 미국에서의 배경만 바뀌었을 뿐 결국 일본에서 카야코와 토시오의 원한이 서려 있는 그 집에 거주했던 한 인물이 미국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그 가족뿐만 아니라 주변의 많은 사람에게도 죽음의 저주가 계속 확산되어 가는 이야기이다.

이쯤이면 어디서 많이 들은, 아니 지금 바로 우리들 사이에서 들리고 있는 이야기와 너무 흡사하다. 아시아의 한 나라에서 시작된 저주가 다른 나라로 건너가 많은 사람들을 죽음과 공포로 몰아 넣는 상황. 그런데 말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거겠지만, 네 편의 영화 중 그 어느 장면에서도 ‘문제의 근원은 일본, 일본인들 때문이다’는 대사나 암시가 전혀 없다. ‘원작이 탄생한 나라의 소비자들을 생각해서 그런 거다’라는 논의까지는 갈 필요도 없는 게, 만약 카야코와 토시오의 저주가 일본의 한 가정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일본이 원인제공자’라는 암시가 영화에 깔리게 된다면 대중매체의 윤리성 운운할 필요도 없이 내용의 개연성 자체가 심각하게 훼손될 것이고, 만약 그런 대사를 내뱉는 인물을 영화에 굳이 등장하게 한다면, 아마도 미국내의 ‘무식한’ 자국중심주의적이고 부족주의적인 사람들을 풍자하기 위한 역할로 설정된 캐릭터가 될 것이다. 영화 안에서 인물들간의 대화를 통해 명시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당연하게 전제되고 있는 것은, 아내의 외도를 의심한 남편의 광기와 잔인한 폭력성, 그리고 조금 더 넓게 본다면 그러한 발상과 행동을 가능케 하는 가부장적 문화 정도가 저주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 될 것이고, 그 저주를 계속해서 재전파하는 이들은 대부분 국적이나 인종과 상관없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전염’이 된 채로 이동하고 타인과 접촉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The Grudge 2’에서 저주 받은 집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주인공을 꼬드겨서 결국 들어가게 만드는 두 친구가 그러한 예다. 참고로, 그 두 친구 중 한 명은 일본인, 다른 한 명은 미국인으로 설정되어 있다.

해외에서 중국인 및 아시아인에 대한 증오표출 소식을 들을 때마다 너무나 안타깝다. 동시에 한국에서도 중국인에 대한 혐오발언이 분명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중국 안에서도 우한시민들을 향한 비하행위들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러고 보면 타집단을 향한 차별, 조롱, 비하도 이른 바 ‘서구제국주의’만의 전유물은 아닌 것 같다. 카야코와 토시오, 그리고 반려 고양이를 잔인하게 죽인 놈은 어느 나라에나 있고, 그런 놈들에게 철저히 짓밟힘으로 인한 원한이 서려있는 곳도 어느 문화권에나 있을 것이다. 그 저주의 확산을 막고 그런 일들이 벌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행히도 ‘주온’이라는 영화에서와는 달리 현실에서는 이러한 전염과 재전파를 잠재우는 것이 가능하다.



 


홍승민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고려대학교 국제대학원 강사
종교와 미디어, 문화의 교차점에 관한 다양한 주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가장 최근 논문으로는 1930년대 초반 미국 호러영화에서 소리의 활용에 관한 (Journal of Popular Film and Television 47(4))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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