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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일협회(歸一協會)의 ‘일(一)’에 대한 단상


news letter No.717 2022/2/15



귀일협회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논어와 주판』이라는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栄一, 1840-1931)의 책에서였던 것 같다.1)


“저는 귀일협회라는 조직을 꾸린 적이 있는데요, 소위 귀일이라 하는 것은 세상의 다양한 종교적 관념 혹은 신앙 등이 마침내는 같은 데로 귀결할 때가 오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뜻합니다. 신이든 부처님이든 예수님이든 인간이 따라야 할 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동양철학과 서양철학 간에는 자연히 사소한 차이가 있어 길은 다르지만 마침내 이르는 목적지는 같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논어와 주판』, p.164)


이 책이 인구에 회자되는 이유는 십중팔구 부의 근원은 바로 인의도덕(仁義道德)이며, 올바른 도리로 얻은 부가 아니라면 그 부는 아름답지도 않고 영원할 수도 없으니, 서로 무관하게 보이는 『논어』와 주판을 일치시키는 것이 급선무라는(p.23) 그의 메시지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시부사와는 “서로가 노력을 하여 만사가 인의도덕으로 귀일하도록 노력해야만 합니다. 만약 이러한 기풍이 온전히 확대되면 뇌물을 주고받는 것처럼 거림직한 일들은 시나브로 사라질 게 분명합니다”(p.166)라고 하면서 ‘인의도덕’을 모두가 돌아가야 할 ‘하나(一)’라고 말하고 있다. 시부사와가 “귀일협회라는 조직을 꾸린 적이 있다”고 한 말은 과장이라고 할 수만은 없는 과장이다. 왜냐하면 귀일협회의 기원을 마련하고 결성으로 이끌었던 사람은 시부사와가 아니라 나루세 진조우(成瀨仁藏: 1858-1919)였고, 그렇다고 해도 시부사와의 공감과 재정적 지지가 아니었다면 귀일협회의 활동은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1912년에 6월에 창립된 귀일협회에는 일본 종교학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아네자키 마사하루(柿崎正治: 1873-1949)와 사실상 동경제국대학에서 처음으로 ‘비교종교 및 동양철학’이라는 강좌를 열었으며, 그 강좌를 아네자키에게 물려주었던 이노우에 데쓰지로(井上哲次郞: 1856-1944)가 초기부터 관여하고 있었다. 따라서 귀일협회 자체도 흥미롭지만, 이는 일본의 초기 종교학의 양상을 부분적으로나마 파악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귀일협회는 기독교도로서 신학을 공부했던 일본여자대학의 창립자, 나루세 진조우가 중심이 되어 아네자키 마사하루(柿崎正治)ㆍ우키다 카즈타미(浮田和民)ㆍ이노우에 데쓰지로(井上哲次郞) 등의 학자 및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栄一)ㆍ모리무라 이치자에몬(森村市左衛門) 등의 실업가에 의해 결성되었고, 당초에 많은 유명ㆍ유력 인사들과 종교가들을 포함하여 약 백 명 정도의 회원이 참여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그 회원 중에는 1893년의 시카고 만국박람회 기간에 열렸던 세계종교회의의 영향을 받아 도쿄에서 1896년에 열렸던 종교가간담회 이래 지속적으로 이어져왔던 여러 종교의 협조와 조화를 도모하는 흐름에 참여했던 자들이 많았다. 협회의 명칭인 ‘귀일’은 왕양명(王陽明)의 ‘만덕귀일(萬德歸一)’에서 온 것으로서, ‘계급ㆍ국민ㆍ인종ㆍ종교의 귀일’이 귀일협회의 표어였다. 귀일협회는 우선적으로 일본 국내의 정신적 통일을 꾀하고 나아가 외국의 동지를 합동하고자 기획하였으며, 연구회ㆍ출판ㆍ공개강연회 등의 사업을 해나갔다.

나루세 진조우를 비롯한 초기 창립 회원들의 인적 구성이나 ‘국내의 정신적 통일’이라는 우선적인 목표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초기에는 ‘종교의 귀일’이라는 주제가 중심적이었다. 그러나 ‘종교의 귀일’에 있어서 ‘일’의 내용이나 ‘귀일’의 방법은 회원에 따라 달랐다. 나루세가 삼교[기독교ㆍ불교ㆍ신도]에 두루 통하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고자 했다면, 시부사와나 모리무라는 여러 종교의 혼합과 같은 것이 아니라 유교의 정신을 가지고 여러 종교를 통일한 종교를 만들고자 하는 의향이 있었다. 특히 일반회원이 연간 6엔을 냈던 것에 비하여 연간 천 엔을 냈던 시부사와는 『논어』에 기반을 두고 유교로 안심(安心)을 구하여 이 세상에 처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런가 하면 이노우에 데쓰지로가 주장하는 윤리적 종교론은 사실상 그리스도교뿐 아니라 모든 개별 종교에 부정적이었으니, 그가 돌아가기를 기대하는 ‘일(一)’의 내용은 여러 종교의 협력이라기보다는 각 종교의 의례나 교의 등을 넘어서는 ‘윤리에서의 일치’였을 것이다. 독일과 미국 등의 해외 경험을 거치면서 ‘일본적인 것’, 특히 니치렌(日蓮) 신앙을 견지했던 아네자키의 경우, 각각의 특색을 가진 종교는 그대로 남은 채 각 종교가 서로 이해하고 협조하는 것을 지지한다는 입장이었으니, ‘각 종교의 상호 이해와 협력’이야말로 ‘일(一)’의 내용이었을 것이다. 또한 실제로 기독교계와 불교계의 여러 인물은 ‘일본’ 안에 공존하는 종교들이 서로 배척할 것이 아니라 협조하고 조화롭게 공존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나름의 ‘귀일’을 마음에 품고 참여하고 있었으니, 이러한 다양한 종교적 입장을 가진 이들의 모임이라는 것 자체가 귀일협회의 성격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귀일협회는 종교의 귀일 외에도 국민의 귀일과 노동 문제에서 발생한 계급의 귀일을 내걸고 있는데, 이는 귀일협회가 발족된 같은 해의 2월에 당시 내무차관이었던 토코나미 타케지로(床次竹二郞: 1867-1935)에 의하여 소집된 삼교회동(三敎會同)과의 연속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삼교회동의 인적 측면이나 취지가 귀일협회로 계승된 면이 있기 때문이다. 토코나미는 기본적으로 국민의 사상을 선도하기 위해서는 종교심을 고취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하에 종교와 국가의 결합을 시도하고, 구체적으로는 각 종교가의 밀접한 관계를 조성하여 ‘황도(皇道)’에 부익하도록 하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일부 종교가들은 의구심을 표하기도 하였지만, 삼교회동 후에 종교가들만 모인 협의회에서 ‘종교 본래의 권위를 존중하면서, 국민도덕의 진흥과 사회 풍교의 개선을 위하여 정치ㆍ종교ㆍ교육의 삼자 각각 그 분계를 지키는 동시에 상호 협력한다’는 조항 및 그리하여 ‘황도(皇道)를 부익하고 시세의 진운(進運)을 돕는다’는 조항이 결의되었다. 이런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노우에 데쓰지로의 ‘윤리의 일치’나 아네자키의 ‘종교들의 상호 이해와 협력’이라는 ‘일(一)’의 내용이 결국에는 소위 ‘대일본제국’이 표방했던 ‘황도’라는 더 커다란 목표로 ‘귀일’되었다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다양한 종교전통과 종교적 현상을 ‘과학적으로’ 연구하고자 했던 일본의 초기 종교학자들은 종교나 종파의 차이를 넘어서서 보편의 ‘윤리’를 추구하였고[이노우에 데쓰지로], 다양한 종교 전통 사이의 ‘상호 이해와 조화, 협력’을 이끌고자[아네자키 마사하루] 하였다. 이들은 종교계・학계・교육계의 지식인들이 참여했던 각종 학술적 논쟁이나 문화적 모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이는 참여자들의 인적 구성이나 인원수의 면에서 그 이전의 모든 활동의 최종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귀일협회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부사와는 각자의 자리에서 공자의 가르침, 즉 인의도덕을 실천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안심입명(安心立命)이라고 굳게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죽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귀일협회를 지원하였다고 한다. 종교인이나 종교학자, 또는 정・재계의 대표자들을 막론하고 당시 대다수 일본인의 최종적 귀일점에는 ‘황도’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하나가 된다는 것’이나 ‘우리는 하나’라는 주장은 언제나 목표지향적인 발언이 아닐까? 곧 다가올 대선을 앞두고 여ㆍ야 모두 ‘하나라는 것’을 내세우거나 혹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호소한다. 그 ‘하나’의 속에 얼마나 많은 이합집산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무엇을 위한 하나이며, 얼마 동안, 어떤 정도로 하나여야 할까? 아니면 하나일 수 있을까? 마치 요즘 베이징 동계 올림픽 경기를 관람할 때와 같이 한 나라의 국민들이 일시적으로 하나 됨을 경험할 수는 있겠지만, 어떤 영역에서든 ‘하나 됨’이 표어로 등장한다면 알게 모르게 어두운 그림자가 잠복해 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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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은 한국에서 여러 차례 부분 번역이 이루어졌는데, 그 사정에 대해서는 신정근의 <『논어』에 대한 경영학적 해석>(『동양철학연구』 제61집, 2010)의 주해 1번에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다만 그 중에서 이 책이 “1927년 忠誠堂에서 처음 간행되었다”는 말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論語と算盤』이라는 통속서는 1916년에, 『논어』의 주석서인 『論語講義』는 1925년에 발간되었다. 이 글에서는 전자판(노만수 역, 북큐브네트웍스, 2012)을 인용하고 페이지 수를 표시했다.

 

 







 


이연승_
서울대학교 교수
논문으로〈서구의 유교종교론〉, 〈이병헌의 유교론: 비미신적인 신묘한 종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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