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뉴스 레터

719호-시간을 경험한다는 것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2. 3. 1. 13:11

시간을 경험한다는 것


news letter No.719 2022/3/1

 

 



언젠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11장을 읽어가던 중 웃음이 났던 기억이 있다. 하느님이 세계를 창조하기 전에 무엇을 하셨는지를 묻는 사람들을 향하여 지옥을 준비하고 계셨을 거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아우구스티누스식의 유머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느낌은 나만의 경험일 뿐 읽는 사람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갈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의 문제에 대하여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인물로 평가된다. 앞의 예도 시간에 관해 언급하는 가운데 나온 발언이다. 그에게 시간은 신의 창조물에 불과한 것이라서 시간이 존재하지 않던 창조 ‘이전의’ 일을 묻는 태도는 온당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시간을 거론한 배경은 시간 자체를 해명하는 데 있었다기보다는 자신이 시간의 반대 개념이라고 생각한 영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시간에 관한 발언은 기독교 신앙이나 신학의 영역을 떠나 후대 시간 연구 분야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끼쳤다. 독일 철학자 훗설이 전개한 시간 의식의 현상학도 아우구스티누스의 연구를 확장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훗설이 시간 연구에 끼친 공헌이 있다면 아마도 시간 경험의 근거를 의식에서 찾은 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인간은 문화에 따라 다르겠지만 다양한 시간 경험을 하면서 살아간다. 매일매일 날짜를 헤아리며 그리운 사람을 손꼽아 기다린다든지, 계절의 변화에 경이로움을 느낀다든지, 저무는 한 해를 아쉬워하며 설렘을 가지고 새해를 맞이하기도 한다. 한 많고 설움 많은 과거를 묻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사람도 있다. 시간 경험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일상적인 삶을 통해서 지나간 일을 과거로 여기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미래로 부르며,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현재로 인식하는 것이 곧 시간 경험이다. 흔히 말하는 역사의식은 이런 시간 경험이 공동체의 차원으로 확장된 것이다. 역사를 배우는 일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가늠해보는 시간 경험이다. 이러한 시간 경험의 스케일을 우주의 차원으로 확장할 수도 있다. 우주론적 시간의 경험으로 인도하는 대표적 매개가 종교이다. 종교를 통해 비루하기 그지없는 일상이 우주론적 시간의 차원에서 새롭게 경험되기도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훗설에 의해 드러난 시간의 현상학은 이렇게 다양한 시간 경험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우리 의식의 흐름이 그런 시간 경험이 가능하도록 작동한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그런 의식의 작용이 없다면 시간 경험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인간의 의식은 늘 지나간 것을 ‘기억’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을 ‘기대’하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을 ‘직관’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런 의식의 작용이 있기에 다양한 시간의 경험을 할 수 있다. 시간 경험의 다양성을 찾아서 발굴하고 소개하는 작업이 인문학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시간 경험일수록 더욱 흥미로울 것이다.

시간의 현상학이 밝혀낸 의식의 시간성과 별개로 시간 경험이 다양한 이유는 그러한 시간 경험의 한계를 설정하는 장치들이 문화적으로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달력은 시간 경험의 한계와 범위를 설정하는 대표적인 장치라고 할 수 있는데, 서로 다른 달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시간을 경험하는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다. 달력은 시간에 이름을 붙이는 장치이다. 명찰을 목에 건 시간의 집합이 달력이다. 간지를 이용하여 연월일시를 명명하는 방법이나 기념일을 제정하는 방법을 사례로 들 수 있다. 시간의 성격이 복합적일 때는 별명이 붙기도 한다. 그래서 하나의 시간에 여러 개의 이름이 중첩되는 일도 있다.

시간에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얻는 효과는 무엇일까. 아마도 불투명한 시간의 정체를 인식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달력은 시간의 백과사전이다. 우리는 무언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백과사전을 찾는다. 사전이 한 사회가 지닌 삶의 경험치와 지적 능력을 보여주는 척도이듯, 달력은 시간에 관한 지식 저장고이자 시간 경험의 표준이다. 마찬가지로 점복도 시간을 경험하는 한 가지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의 비밀을 알기 위해 고안된 점복은 달력과 공존의 관계를 형성할 가능성이 크다. 달력과 점복은 시간의 바다에서 익사하지 않고 안전하게 항해하기 위하여 인간이 개발한 발명품이라고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임현수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최근의 논문으로 〈西周 시기 신 · 인간 · 동물 범주에 관한 연구: 청동기 金文 및 문헌 자료를 중심으로〉, 〈중국 고대 노인의 정체성과 권위에 관한 연구〉 등이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