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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732호-고스트와 귀신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2. 6. 7. 15:00

고스트와 귀신

 


news letter No.732 2022/6/7

 



하비 콕스(Harvey Cox)의 2016년 저작 『신이 된 시장(The Market as God)』(유강은 옮김, 문예출판사, 2018, 218)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구절이 있다. 이 이야기는 영적인 존재들을 다루는 범주의 역사적 변화, 그리고 교차문화적 비교라는 문제를 떠올리게 한다.

                  많은 이들이 영어로 ‘Holy Spirit’이 한때 ‘Holy Ghost’라고 지칭된 일을 기억할 것이다. 시구에서는

                ‘heavenly host’와 운율을 맞춰야 하는 널리 쓰이는 송영(애창곡인 찬송가 <만복의 근원Old Hundredth>)처럼

                 지금도 간혹 이런 표현을 쓴다. ‘ghost’라는 단어는 고대 영어 ‘gast’에서 유래 한 것인데,

                 gast는 독일어 ‘geist’와 가깝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성서 번역가들은 이 단어를 거의 없 애버렸다.

                일상 어법에서 이 단어는 핼러윈 도깨비나 죽은 사람의 유령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막스 베버의 “자본주의 ‘정신’(der 'Geist' des Kapitalismus)” 개념이 “성령(Heilige Geist)”을 염두에 두고 쓰인 것이라 주장하는 대목이다. 실제로 교파를 막론하고 오늘날 통용되는 영어 문헌 가운데 삼위일체 가운데 하나를 “Holy Ghost”라고 쓰는 것은 킹제임스버전 성경 정도를 제외하면 찾기 어렵다. 20세기 이후의 영역 성경들은 거의 모두가 “Holy Spirit”이라는 용어를 택하고 있으며, 사도신경을 비롯한 교리 언어, 나아가 일상 표현에서도 “Holy Ghost”는 낯선 말이 되었다.

한국어에서는 이와 비슷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반대의 현상이 일어났다. 20세기 전반까지 “성령(聖靈)”과 함께 통용되던 “성신(聖神)”이라는 용어가 소멸한 것이다. 일부 찬송가에만 용례가 남아 있다는 것도 영어권과 비슷하다. ("불길 같은 성신여") 주로 가톨릭에서 쓰이던 이 개념은 90년대 초반의 용어 개편 과정에서 신학과 전례 용어에서 사라졌다.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전례위원회는 1990년 개정된 「미사통상문」에서 “‘성신’을 ‘성령’으로 바꾼 것은 영어에서도 옛날에는 ‘Holy Ghost’라고 했으나 지금은 ‘Holy Spirit’로 바뀌었으며 이는 구세사안에 드러난 성령의 위격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성부도 성자도 신(神)인데 따로 성신이라고 하면 따로 신이 있다는 오해의 소지도 있다”는 것이었다.(“「미사통상문개정」 최종안 확정, 혼란·어색·착오 등 우려”, 《가톨릭신문》 1990. 7. 15.)

개신교 성경 번역에서도 초기에는 중국어역의 영향으로 “성신”이 더 널리 채택되었으나, 이후 일본어역을 따라 “성령”으로 차츰 대체되었다는 연구가 있다.(민영진·전무용, 「한국어 번역 성경에 나타난 중국어 성경과 일본어 성경의 영향」, 『성경원문연구』 19, 2006, 193.) 한국정교회 또한 “‘성신’의 신(神)이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이유로 2009년 이후 성령이라는 용어를 채택하고 있다. 오늘날 공식적인 교리 용어에서 성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교단은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 등 극소수에 불과하다.

일반적으로 언어 변동에 있어 보수적인 경향이 있는 종교 용어에서 비교적 근래에 이와 같은 변화가 동시에 일어났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고대 영어 gast는 선한 영과 악한 영, 죽은 자의 영혼과 천사, 악마와 같은 영적 존재 등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말이었다. 여기에서 비롯한 ‘고스트(ghost)’라는 단어가 망자의 영, 특히 이승을 떠돌아다니며 이변을 일으키는 존재를 특정하는 개념으로 사용된 예는 14세기 문헌에서부터 등장해서 근대 이후 일반화되었다.(“ghost”, Online Etymology Dictionary,
https://www.etymonline.com/) 한편 한자문화권에서 대단히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었던 ‘신(神)’이라는 글자는 ‘god’, 특히 유일신인 ‘God’에 대한 가치중립적인 번역어로 채택되면서 의미가 한정되었다. ‘Holy Ghost’의 경우에는 ‘고스트’라는 단어가 더 이상 성스럽지 않게 되어서 탈락하였다면, ‘성신’은 ‘신’이라는 단어가 지나치게 성스러워지는 바람에 교체되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한편 동아시아에서도 ‘고스트’와 비슷한 ‘격하’ 과정을 겪은 영적 존재의 범주가 있다. 우연찮게도 ghost의 번역어로 흔히 쓰이는 '귀신'이 그렇다. 많은 고전적 용법(대표적으로 『중용』)에서 '귀신(鬼神)'은 제사의 대상이 되는, “성대한 덕”을 가진 존재였고, 이는 송대 신유학에서 인격적 측면을 배제한 음양(陰陽)의 작용으로 재해석되었다. 그런데 일상 언어에서 귀신이라는 단어가 무당이 다루는 잡다한 영적 존재들이나 변괴(變怪)를 일으키는 악한 영들, 특히 죽은 자의 넋을 가리키는 용법으로 주로 사용되면서, 오늘날에 와서는 이 고전적 용법 쪽이 거의 완전히 잊혔다.

이것은 전근대 시기에 이미 시작된 장기적 과정이었다. 김시습(金時習)은 『금오신화(金鰲新話)』에 실린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에서 귀신에 대한 엘리트적 사변과 대중적 인식 사이의 모순을 조화시키기 위한 기이한 논리를 제시한다. 주인공인 호기심 많은 선비 박생(朴生)은 저승의 왕인 염마(燄摩)를 만난다. (쉽게 예측할 수 있듯이 이 이름은 閻魔의 패러디다.) 이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전등신화(剪燈新話)류 소설에 흔한 지옥방문담들의 변형이지만, 유자(儒者)인 주인공에게 불교적 지옥과 사후세계관을 전하는 중국, 일본의 유사한 서사들과는 매우 다르다. 죽은 자들의 세계는 철저히 ‘유교화’되어 있어서 악인들은 지옥의 고문 대신 왕의 교화를 받는다. 박생이 귀신에 대해 묻자 염마왕은 공자와 주자를 인용하며 답한다. 여기에 만족하지 못한 박생은 사람들을 해치는 “여기(厲氣)”나 “요매(妖魅)”도 귀신이라고 할 수 있지 않냐고 묻는다. 현대적 감각으로 옮기자면, 신유학적 합리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심령현상들에 대한 설명을 요구한 것이다.

염마는 이렇게 답한다. 귀(鬼)는 굽히는 것[屈]이고, 신(神)은 펼치는 것[伸]이다. 그런데 세상에서 말하는 요(妖), 마(魔), 괴(怪) 등은 유교에서 말하는 “조화의 자취[造化之迹]”로서의 ‘온전한’ 귀신과는 달리, “굽히되 펼 줄 몰라서” 사람이나 사물에 뒤섞여 형체를 갖추게 된 존재들이다. 어딘가에 답답하게 맺혀 있으니 이들은 사람과 세상에 원한을 품고 기괴한 현상을 일으킨다. 일례로 억울하게 죽거나, 전사하거나, 객사하거나, 요절한 이들은 올바른 방식으로 죽지 못했기 때문에 혼과 백의 형태로 흩어지지 못하고 모호한 상태로 뭉친 채 슬피 울기만 한다. 이런 불완전하고 비정상적인 영들이야말로 무당이 다루는 귀신이라는 것이다. 즉 이들은 ‘귀(鬼)’이기는 하지만, ‘신(神)’은 아닌 셈이다.

이렇듯 “spirit-ghost-god” 그리고 “靈-鬼-神”은 각각 때로는 호환되고, 때로는 일정한 위계로 구분되는 범주 체계였다. 성령/성신의 번역 문제는 이 두 가지 유동적인 시스템을 대응시킬 때 나타났다. 그리고 궁극적 실재의 ‘영적’ 측면을 가리키기 위해 양쪽 모두가 현 시점에서 보다 포괄적인 범주라고 여겨지는 쪽(spirit, 靈)을 선택하였다. (독자들이 눈치챈 바와 같이, 지금 이 글에서 사용하고 있는 학문적 메타언어에서도 비슷한 선택이 이루어졌다.) 이처럼 종교적 개념의 관계망과 변동 양상, 그리고 이질적인 질서들 사이의 접촉을 추적하는 일은 인간이 상상한 것들에 대한 인식과 분류 방법을 역사화한다는 점에서 지적으로 흥미로운 종교학적 작업이 된다.

 

 

 







 


한승훈_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연구교수
최근 발표한 연구로 〈역사적 최제우와 청림교의 비밀결사들〉, 〈신령과 신위〉, 〈동이족과 기마민족〉 (《동북아 내셔널리즘의 형성과 변화》)이 있다. 현재 조선 시대 중범죄 심문 기록인 《추안급국안》 및 동북아시아의 도교 문화에 대한 공저서들의 집필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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