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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745호-서울이야기 두 번째, 독서당로(讀書堂路)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2. 9. 20. 19:56

서울이야기 두 번째, 독서당로(讀書堂路)

 


news letter No.745 2022/9/20

 


      1년에 한두 번은 꼭 보는 오랜 친구가 있다. 서울 옥수동에 사는 그이를 만나러 갈 때면 동네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독서당로’라는 길을 지나게 된다. 정확히는 용산구 한남동 한남역교차로에서 성동구 응봉동 응봉삼거리에 이르는 4.5km의 길이다. 길 이름에 무려 ‘독서’라는 말이 붙어 있다니! 뭔가 엄청난 내력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면, 그 느낌이 맞다. 지명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중종 5년(1510) 1월 홍문관(弘文館)에서 아뢰었다. “사가독서(賜暇讀書)하는 인원이 정업원(淨業院)에 우거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용산의 옛 터[龍山古基]는 기울고 무너져서 고쳐 지을 수 없습니다. 두모포(豆毛浦)의 월송암(月松庵) 근처에 넓고 평평하여 집을 지을 만한 곳이 있습니다. 나무와 돌을 운반하기도 편리하고 가까우니, 날을 정하여 집을 지어 독서하게 하는 것이 어떠합니까?”(『중종실록』 10권, 5년 1월 19일.)

     두모포는 성동구 옥수동에 있던 나루터이다. 중랑천과 한강이 이곳에서 만난다고 하여 두 물이 합쳐진다는 의미의 두물개/두뭇개가 되었고, 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두모포다. 옥수동은 옥정수(玉井水)라는 우물이 있던 데에서 비롯한 이름이라고 하는데(서울특별시 공식블로그,
https://blog.naver.com/haechiseoul/222668558470), 조선시대에는 두물개/두뭇개/두모포가 공식 명칭이었다(『세종실록』 148권, 「지리지」 ‘경도 한성부’). 월송암에 대해서는 성종 21년(1490) 이곳의 승려가 타살되었다는 『실록』의 기록이 있어(『성종실록』 241권, 21년 6월 17일), 동명이처의 장소가 아니라면 그것이 단순한 초막이 아니라 어엿한 불교 도량이었음을 알게 한다. 중종 5년의 그날 홍문관의 건의를 임금은 그 자리에서 승인하였다. 그래서 지어진 건물이 독서당(讀書堂)이었을 터. 그리고 그 이름이 오늘에까지 도로명으로 남아 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기사는 도로의 이름에 얽힌 유래 외에도 몇 가지 정보를 더 알려준다. 첫째, 두모포 월송암 근처에 새 독서당을 짓기 이전에도 일정한 인원들이 정해진 곳에 모여 이른바 사가독서라는 것을 했다는 것. 사가독서라는 말의 뜻을 풀자면 휴가를 주어[賜暇] 독서(讀書)하게 한다는 것이다. 둘째, 중종 5년 두모포에 독서당 건립을 결정할 당시 기존의 사가독서 장소가 정업원이었다는 것. 셋째, 그 정업원 이전에는 용산에 같은 용도의 공간이 있었고, 중종 5년에는 이 자리가 무너진 상태였다는 것.

     위 기사에서는 이름이 명시되어 있지 않기에 조심스럽게 그저 ‘사가독서 장소’니 ‘같은 용도의 공간’이니 하고 표현했지만, 사실은 용산의 옛 터에도 이미 독서당이라는 이름은 붙어 있었다. 성종 24년(1493) 5월의 기사에 “용산강(龍山江)의 독서당이 낙성되었으므로 그 편액(扁額)과 기(記)를 내일 안에 걸겠노라.”(『성종실록』 277권, 24년 5월 11일)는 임금의 전교가 엄연하다. 용산강은 용산에 인접한 한강 일대를 이르던 말이었다. 다만 용산 시절 이전에는 독서당이라는 명칭을 부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이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 인용한 윤현(尹鉉)의 「문회당기(文會堂記)」에 “계묘년(성종 14년, 1438)에 용산에 있는 폐사(廢寺)를 글 읽는 곳으로 하였으나 명칭은 없었다.”(『연려실기술』 별집 제7권, 「관직전고(官職典故)」, ‘독서당(讀書堂)’)고 되어 있어 그 같은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흥미로운 것은 성종과 중종 때 독서당으로 활용된 세 장소가 모두 절터 또는 그 근처였다는 사실이다. 중종 5년에 신축된 두모포의 독서당은 기사에서도 언급된 바와 같이 월송암이라는 도량 근처의 넓고 평평한 지대에 지어졌다. 정업원은 고려에서부터 그 전통이 이어진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비구니 도량이다. 조선 초의 정업원은 창덕궁 뒤쪽의 산등성이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세종실록』 92권, 23년 5월 19일, “…이제 창덕궁과 수강궁은 모두 종묘의 주맥(主脈)에 매우 가까워서 비록 좌우에 끊어짐이 없다 하나, 정맥(正脈)이 있는 곳은 적이 파헤쳐지고 손상된 곳이 있으니, 정업원 동쪽 언덕으로부터 종묘 주산에 이르기까지 정척(正脊)의 좌우 20~30보 되는 곳에 소나무를 재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 『성종실록』 198권, 17년 12월 11일, “정업원이 궁궐 담장[宮墻] 곁에 있어서 범패(梵唄) 소리가 궁중[禁中]에까지 들립니다.”), 연산군 10년(1504) 왕명으로 폐지되었으므로 중종 5년 당시에는 그 건물만을 독서당으로 활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업원 이전의 용산 독서당도 폐사된 사찰의 건물을 사용한 것이었다.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傭齋叢話)』에 따르면 “예전에 비구 사찰[僧舍] 하나가 남호(南湖)의 귀후서(歸厚署 : 조선 시대 장례에 관한 사무를 보던 관아) 뒤편 언덕에 있었는데, 세상에서 16나한의 영험이 있다 하여 향불[香火]이 끊이지 않았다. (그 절의) 승려 상운(尙雲)이 … 속인(俗人)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불상은 흥천사(興天寺)로 옮겼다. 그리고 그 집을 홍문관에 주어 순번을 나누어 독서하게 하고 그 이름을 독서당이라 하였다.”고 한다.(성현, 『용재총화』 제9권.) 남호는 용산강의 다른 이름이다.

     그렇다면 왜 조선 전기의 독서당들은 모두 다 절터에 마련되었던 것일까. 독서당이라는 이름은 성종 대에 와서야 불리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가독서는 일찍이 세종 때부터 시행되었던 제도였다. 세종 8년(1426) 임금은 집현전의 학자들에게 “(그대들은) 나이가 젊고 장래가 있으므로 글을 읽게 하여 효과를 보고자 했으나 각각 직무로 인해 독서에 전심할 겨를이 없으니, 지금부터는 본전(本殿)에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전심으로 글을 읽어 성과를 나타낼 것”을 지시하였다.(『세종실록』 34권, 8년 12월 11일.) 인용에서 알 수 있듯이 이때는 각자의 집에서 독서하도록 하였으나, 세종 24년(1442)에 신숙주(申叔舟) 등 6명에게 휴가를 주어 진관사(津寬寺)에서 글을 읽게 하였고, 이후 문종 1년(1451)에는 홍응(洪應) 등 6명을 장의사(藏義寺)에 보내 글을 읽게 하였다.(이긍익, 『연려실기술』 별집 제7권, 「관직전고」, ‘독서당’. 이긍익은 이 내용과 관련하여 조위(曺偉, 1454~1503)의 「독서당기(讀書堂記)」와 성현의 『용재총화』를 인용하고 있다. 이하 『연려실기술』의 내용은 그 출처로 표기함.)

     이를 보면 사가독서 제도는 그것이 처음 시작되었던 세종 때부터 이미 사찰에 독서의 장소를 마련하는 것이 관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관행이 얼마나 당연시되었던지 성종 대 이후에는 절에 가서 하는 독서라는 뜻에서 상사독서(上寺讀書)라는 표현이 관용적으로 쓰이기까지 할 정도였다.(『성종실록』 32권, 4년 7월 20일 ; 『중종실록』 7권, 3년 10월 14일 ; 『명종실록』 3권, 1년 1월 13일.)

     서거정은 독서지로 사찰을 지목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사가독서하는 문신들이 빈 집에 모여서 공부한다고 하지만, 성 안의 여염(閭閻)에 있으므로 친구[交友]로서 찾아가는 자가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또 장차 자주 집에 갈 것인데, 이와 같다면 마음이 전일(專一)해지지 못할 것입니다. 신(臣 : 서거정 자신)도 세종 조에 역시 신숙주 등과 함께 산사에서 사가독서 하도록 명을 받았었습니다.”(『성종실록』 68권, 7년 6월 28일.) 서거정의 이 말은 임금으로부터 휴가까지 받아가며 독서에 전념해야 될 자가 자기 집에서 글을 읽거나 주택가에 마련된 독서당에 머무를 경우, 사람들의 드나듦으로 인해 공부에 집중하기 어려움을 우려했기에 사찰에서 독서하도록 하는 조처가 취해졌던 것임을 알려 준다. 쉽게 말해 절이나 절터에 독서당을 차린 것은 바로 그곳이 한적한 장소였기 때문이었던 것이다.(『성종실록』 142권, 13년 6월 4일.)

     세종 때의 사가독서 제도는 세조 2년(1456) 집현전이 폐지되면서 함께 폐지되었지만, 성종 7년(1476) 정5품 이조 정랑, 정5품 성균관 직강, 정6품 사헌부 감찰, 종8품 봉상시 부봉사, 정9품 승문원 정자 등 하급 관료들을 장의사로 보내어 공부시키며 상사독서의 관행 그대로 부활하였다. 사찰에서 독서하는 이들에게는 사옹원(司饔院 : 임금의 식사와 대궐 안의 식사 공급에 관한 일을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으로부터 쌀이 공급되었으며, 때때로 음식과 술이 하사되기도 하였다.(『성종실록』 68권, 7년 6월 28일 ; 조위, 「독서당기」 ; 성현, 『용재총화』.) 이때까지는 상사독서의 장소로 이용된 사찰이 종교적 기능을 유지하는 신행의 현장이었다.

     세종 대 이래 중요한 독서지였던 진관사의 경우 연산군 10년(1504)까지 왕실의 추선재(追善齋)가 진행되었고(『연산군일기』 53권, 10년 윤4월 10일), 장의사 또한 연산군 10년까지 승려가 거주하였던 것으로 확인되기 때문에(『연산군일기』 54권, 10년 7월 29일), 적어도 성종 7년 장의사에서 사가독서를 부활할 때까지는 독서지로 지명된 사찰에서 종교의 역할이 수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중종 3년(1508) 10월에 있었던 경연 자리에서 사간원 정언 박수문은 젊은 시절 상사독서 하던 중 선왕선후의 기신재를 보았다고 회고하였고(『중종실록』 7권, 3년 10월 14일), 심지어 동왕 34년(1539)에도 “환관들이 부모의 기일이나 명절에 산사(山寺)에 올라가 불공을 드리고 승려들에게 음식을 대접한다고 하니, 상사독서하는 유생들이 이를 보고 위에서 시킨 것으로 오해할까 걱정된다.”(『중종실록』 91권, 34년 6월 9일)는 임금의 염려가 있어, 이 무렵까지도 종교 전당으로서의 생명력이 살아있는 사찰에서 상사독서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찰과 독서당의 이러한 결합은 승려와 유교 문인들 사이의 긴밀한 교류를 가능하게 한 조건이 되었다. 상사독서의 관행이 활성화되었던 조선 전기 다수의 문집에 유교 문인과 친분을 나눈 승려들의 기록이 등장하는 것은 그러한 상황을 방증한다. 다만 독서당으로 지정된 사찰이 국가로부터 공인된 곳이었음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실록』에서 독서당으로 언급된 진관사와 장의사는 이미 세종 6년 불교 종단의 선교 양종 폐합과 전국 36개소로의 사찰 정리가 이루어진 시점에서 각각 선종과 교종에 배속되었던 사찰로서, 진관사는 속전(屬田) 150결과 소속 승려 70명에 수륙위전(水陸位田) 100결을 지정받았고, 장의사 또한 속전 250결에 소속 승려 120명을 지정받았던 터였다.(『세종실록』 24권, 6년 4월 5일.) 이 때 지정된 36개소의 사찰은 그 이외의 사찰을 모두 폐사하고 남긴 것이 아니라, 국가의 공인사찰로서 인정하고 속전을 지급하여 일종의 국가기관으로 관리했음을 의미하는 것인 만큼, 이들에게는 일정 정도의 공적 업무가 부과되었던 것이며 독서당 기능은 그렇게 부과된 업무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독서당으로서의 역할이 추가됨에 따라 발생하게 된 부대비용은 국가가 지급해야 하는 것이었고, 사찰에서 독서하는 이들에게는 사옹원으로부터 쌀이 공급되었다는 「독서당기」의 기록은 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찰에서는 그렇게 공급받은 쌀을 재원 삼아 해당 사찰에서 독서에 전념하는 문인 관리들의 의식(衣食)을 뒷바라지하였을 것이다. 그것이 독서당 사찰 승려들에게 부과된 또 하나의 공적 업무였던 것이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공인 사찰은 국가의 공적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 통상적인 업무였다.

     하지만 성종 24년(1493) 용산 독서당이 폐사지 건물에 독립된 기구로서 설치되고 중종 대에도 정업원 독서당이 폐사지 활용의 전례를 따르면서, 차츰 살아 있는 불교 사찰과 독서당의 결합은 약화되었던 것 같다. 이는 중종 대에 이르러 도첩(度牒), 승과(僧科), 기신재(忌晨齋) 등 국가적으로 관리되던 불교제도가 대거 폐지되고, 불교계에 대한 유생들의 공격이 빈번해진 시대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선조 대 이후 독서당은 호당(湖堂)으로 불리는 일이 잦아지게 되었다. 성종 때 지어진 용산 독서당과 중종 때 지어진 두모포 독서당이 각각 남호독서당(南湖讀書堂)과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으로 구별되어 불리면서 얻게 된 이름이었다. 남호(南湖)가 용산강의 다른 이름인 것은 앞서 언급했거니와, 동호(東湖) 또한 두모포가 한강과 중랑천이 만나 수역이 넓어지면서 잔잔한 모습이 마치 호수와 같다 하여 붙여진 별칭이었다. 이후 사가독서와 독서당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전란을 거치며 제도의 중단과 재건을 반복하다가 영조와 정조 대에 이르러 폐지의 수순을 거치게 되었다.



 (이 글은 《법보신문》 2022.8.24. 지면에 실린 필자의 ‘상사독서(上寺讀書)와 사찰의 독서당’이라는 기고문을 토대로 내용 보충한 것임을 밝힌다.
또 2022년 9월 20일에 발행된 뉴스레터에는 "독서당(讀書堂)과 상사독서(上寺讀書)"라는 제목을 붙였다.)

 

 

 

 

 

 

 

 

 

 

 

 


민순의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박사학위 논문으로 〈조선전기 도첩제도 연구〉가 있고, 논문으로 〈조선 세종 대 승역급첩의 시작과 그 의미〉, 〈한국 불교의례에서 ‘먹임'과 ‘먹음'의 의미-불공(佛供)・승재(僧齋)・시식(施食)의 3종 공양을 중심으로〉, 〈불교의 자비행에 내포된 행복 메커니즘-진화심리학과 공리주의적 윤리학의 관점을 중심으로〉, 〈불교에서 점복이 다루어지는 방식에 대한 일고찰-《점찰경》에 나타나는 방편의 위계 문제를 중심으로〉, 〈한국 법화계 불교종단의 역사와 성격〉, 〈여말선초의 승군 개념〉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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