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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765호-불안과 종교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3. 2. 7. 18:24

불안과 종교


news letter No.765 2023/2/7

 


          

          


     선종(禪宗)의 이야기에는 달마대사가 9년 면벽 수행을 할 때, 혜가(慧可)가 자신의 팔을 잘라 가르침을 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달마가 혜가에게 왜 왔느냐고 묻자 혜가는 마음이 불안해서 왔다고 한다. 그러자 달마는 혜가에게 마음을 꺼내서 가져와 보라고 말한다. 그러자 혜가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불안(不安). 우리 마음 가운데서 그 얼마나 중요한 마음이길래 깨달음의 이야기에 등장하는가. 그리고 사실 여부를 떠나서, 혜가의 마음이 얼마나 불안했길래 팔을 잘라서까지 해결하고 싶었던 불안이었던가. 혜가의 이야기에서처럼 불교도 마찬가지겠지만 불안은 종교가 해결하고자 하는 중요한 근본문제라고 할 수 있어 보인다. 기독교 또한 믿는다는 것은 결국 불안한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서 하느님을 믿는 것 아닌가?

     불안은 편안[安]하지 않음을 말한다. 편안하다는 것은 마음이 안정되고 걱정이 없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마음의 안정을 위한 제반 물질적인 기반들이 부족함이 없이 갖춰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령 생존을 위협할 만큼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하거나, 질병으로 인해 생명의 위협에 닥치거나, 중요한 인간관계에서 문제가 생길 때 마음은 극도로 불안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물질적인 기반들이 위협을 당하여 불안을 겪는다는 것은 현재로선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는 상황임을 말해 준다. 이때 많은 경우 인간은 종교적 구원을 기대하게 된다. 말하자면 일종의 한계상황에서 애처롭게 절대자에 의지하려고 하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불안 상황에 대한 구원의 방식은 대표적으로 기독교와 불교에서 다양한 방식을 제시해 왔지만, 이뿐만 아니라 무속이나 명리학에서도 나름의 방식으로 구원의 방식을 제시하여 왔다. 기독교는 절대자에 대한 믿음을 통한 불안의 구원이 있을 수 있겠지만 불교의 경우는 앞서 달마의 처방처럼 불안한 마음에 본래 실체가 없다는 공(空)의 체득을 통한 구원을 말한다. 그런데 무속의 경우는 불안의 상황이 신(神)의 섭리에 따른 필연성이라고 말하고 명리학의 경우도 불안의 상황이 운명에 따른 필연성이라고 말함으로써 우리가 스스로 처한 불안의 상황을 수용하도록 만든다. 이것은 우리가 처한 상황이 무언가 잘못된 상황이라는 인식을 통해서 생긴 불안이, 반대로 우리가 처한 상황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인식을 통한 불안의 해소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불안에 대해 여러 가지 종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해결책을 제시해 왔고, 이러한 해결책들이 바로 종교적 구원의 성격을 다양하게 규정짓고 있다.

    이와 달리 철학에서는 대표적으로 하이데거가 불안에 대해 심층적인 고찰을 진행한 바 있다. 하이데거에게서 불안은 제거해야 할 심리적 불안정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 실존을 생생하게 직시하게 만드는 주요한 계기가 되는 근본 기분이다. 잡담, 호기심, 애매함이라는 인간의 세속적이고 일상적인 존재 양상에 빠져 있는 상황은, 불안에 대한 자각을 통해 자신의 실존의 본래성을 직면하게 된다. 결국 하이데거에게서 불안을 통해 추구하는 사유의 목표는 인간 실존의 직면 혹은 직시이다. 그리고 하이데거에게 이러한 실존의 직시와 직면을 가능하게 하는 불안에 버금가는 사태는 죽음과 양심이다. 그러므로 불안은 어쩌면 인간의 마음에서 벌어지는 죽음과의 대면과 양심과의 대면이라는 사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태는 본래성이라는 실존의 근원을 직시하는 길로 안내한다.

    하지만 하이데거에서와 같은 철학의 방법은 불안을 해결할 직접적인 방법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앞서 논의된 종교에서의 방법들도 논리에 있어서는 불안을 해결할 방법이 될 수 있을지라도 실제로 불안이 해소되는 실천적 성과가 이루어질지는 미지수이다. 그래서 현대의학에서는 정신과적인 약물치료들이 가장 현실적인 불안에 대한 치료법으로 실시되고 있는 실정이다. 애초에 종교적 혹은 철학적 방법으로는 불안이 해결될 수 없기 때문에 정신과적인 약물치료가 시행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종교적 혹은 철학적 방법에 대한 대체물로서 정신과적 약물치료가 행해지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약한 정도의 불안은 종교와 철학적 처방이 가능하지만 강한 정도의 불안은 정신과적 약물치료가 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반대로 근본적인 불안의 치료는 종교와 철학의 영역에서 가능하나 물리적이고 현상적인 불안의 치료가 정신과적 약물의 치료로 해결 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

     이렇게 불안을 비롯한 인간의 많은 정신적 문제들을 의학이 해결해주는 시대에, 그리고 철학과, 무속 및 명리가 다방면에서 인간 불안에 대응하는 시대에 종교가 여전히 불안에 대한 강력한 구원의 역할을 해줄 수 있는지 미지수이다. 물론 기성종교든 신종교든 불안의 문제뿐만 아니라 여러 다른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종교적 역할을 수행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안처럼 인간의 어쩌면 가장 아픈 문제에 대해 종교는 구원의 메시지를 던져줄 수 있지 않아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혜가는 자신의 불안이 너무 아프기에 자신의 팔까지도 잘라 바치지 않았었는가?

 

 

 

 

 



 


이찬희_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문화연구소
논문으로 <대종교(大倧敎)에서 말하는 마음의 세 가지 성격:심통성정론(心統性情論)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논어(論語)』에서 드러나는 ‘즐거움’의 평균적인 성격 해석>, <대종교(大倧敎)의 불도유(佛道儒) 삼교회통관(三敎會通觀) 분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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