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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거부, 신사참배, 그리고 독립유공자 추서

 

news letter No.766 2023/2/14

 

 


                    
       
     몇 년 전 같으면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을 상당수의 청년이 지금은 교도소에서 시설관리나 급식담당과 같은 보조요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교정 시설에서 합숙하면서 대체복무를 하고 있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이야기다. 잘 알려진 대로 2018년 6월 헌법재판소가 대체복무를 규정하지 않은 병역법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림으로써 2020년부터 대체복무제가 시행됐다.

     그런데 관련 자료를 찾다가 한 기사가 눈에 띄었다.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되거나 희생된 28명의 인물을 대상으로 독립운동가 서훈을 추진한다는 기사였다. 한국 개신교에서 순교자로 간주되는 주기철 목사나 성자로 추앙되는 손양원 목사가 국가유공자로 지정되어 있다는 것은 그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 28명이나 되는 개신교인을 대상으로 국가유공자 서훈 추진을 한다는 것은 처음 알게 되었다. 기사를 살펴보니 이미 한 차례 시도한 적이 있었는데 국가보훈처가 받아들이지 않아 2016년부터 재추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병역거부자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은 두 사안이 뭔가 통하는 바가 있는 것 같아서이다. 국민의 의무를 거부한 자들이 국가권력에 의해 처벌당했다는 것이 양자의 공통점이다. 하나는 대한민국의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국방의 의무를 거부하여 병역법 위반으로 처벌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제국신민의 의무로 규정된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치안유지법 내지 불경죄로 처벌된 사람들의 이야기다. 전자는 주로 여호와의증인과 관련되어 있고 후자는 주로 개신교인과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두 사안이 던지는 메시지는 사뭇 달라 보인다.

    주지하다시피 대한민국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는 한국전쟁에서부터 시작하여 7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이 문제가 공론의 장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2000년대 들어와서부터이다. 20년 동안의 뜨거운 공방 끝에 대체복무제의 도입으로 일단락되었지만 이 사안은 우리 사회에 중요한 메시지를 던졌다. 그동안 수면 밑에 가라앉아 있었던 소수집단의 고통스럽고 비참한 삶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국가권력에 의해서는 ‘비국민’, 주류종교에 의해서는 ‘이단’으로 낙인찍혔던 그들의 지난한 삶에 적지 않은 사람이 충격을 받았다. 이후 안보 이데올로기와 정통-이단의 틀을 넘어서 소수집단의 인권 문제로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급부상하였다. 그 과정에서 양심의 자유가 주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전쟁과 평화, 폭력에 대한 성찰 작업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논쟁의 여파로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개신교, 불교, 천주교와 같은 주류종교 나아가 평화주의나 인도주의와 같은 세계관을 근거로 한 양심적 병역거부자도 출현했다. 물론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대체복무기간을 현역병 군복무의 2배로 설정한 예에서 잘 드러나듯이 아직도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부정적 시선은 잔존하고 있다.

    신사참배문제는 일제 말엽에 본격화되었으며 신사참배 거부자들이 겪었던 시련과 고난은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그것보다 더 혹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식민지하의 전시체제를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해방 이후 신사참배 문제는 한국교회를 분열시키는 첫 번째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각 집단에 의해 서로 다르게 전유되고 있다.

    병역거부와 신사참배 문제는 유사하면서도 다른 맥락을 지니고 있다. 병역거부자들은 살상 무기를 손에 드는 것이 교리에 위배되기 때문에 병역거부를 하였으며 신사참배 거부자들은 신사참배가 우상숭배 금지 계명에 위배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거부한 것이다. 물론 양자의 이러한 태도에는 유일신에 대한 충성이라는 강력한 신앙이 공통점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양자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도 발견된다. 병역거부의 경우 양심의 자유가 중요한 투쟁의 무기로 활용되었다. 여호와의증인은 군사정권 시대인 1960년대에 이미 법적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물론 패소하였지만 병역거부 문제를 헌법이 보장하는 양심의 자유 문제로 풀어가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냉전 이데올로기가 워낙 강고하여 지속적인 소송을 전개하지는 못했지만 2000년대 이후 변화된 사회적 분위기에 힘입어 마침내 병역거부를 양심의 자유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신사참배 거부의 경우에는 상황이 달랐다. 당시 매큔과 같은 선교사들은 총독부를 상대할 때 양심의 자유를 내세우기도 하였지만 한국인 신사참배 거부운동가들은 양심의 자유를 주된 무기로 내세우지 않았다. 재판 기록을 보면 이들의 신사참배 거부 동기는 대체로 계명 위반 내지 우상숭배 금지라고 하는 교리적 측면에 있었다. 제국헌법에 천명된 ‘신교의 자유’라고 하는 근대적 규범을 내세우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하나의 예가 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막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박관준 장로와 교사 출신 안이숙은 ‘종교단체법안’을 심의하던 일본제국의회 회의장에 들어가 단상을 향해 건의서를 투척했는데 거기에는 ‘신사참배 강요 중지’만이 아니라 “국교를 신도(神道)에서 기독교로 할 것”이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이들의 의식구조가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유일신에 대한 충성과 우상숭배 금지 교리에 대해서는 철저하였으나 근대적 의미의 종교자유 개념은 낯설었던 것이다. 나아가 당시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벌인 이들은 신사참배를 수용한 교회를 타락한 것으로 간주하고 별도의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비타협적 태도와 철저한 신앙 덕분에 혹심한 고통을 견디면서 끝까지 신사참배 거부를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는 일제의 식민통치를 저해하는 일정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여러 연구자에 의해 이미 지적되었듯이 이들의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민족의 독립을 1차적 목적으로 했다기보다는 결과적 차원에서 항일운동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신사참배 거부자들을 대상으로 한 독립유공자 추서 작업은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충분히 검토하면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이진구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주요 저서로 《한국 개신교의 타자인식》, 《한국 근현대사와 종교자유》, 《미국 남장로회 교육선교 연구》(공저), 《불교와 함께한 종교 연구》(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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