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뉴스 레터

785호-삶의 부정합성을 교정하기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3. 7. 4. 21:35

삶의 부정합성을 교정하기

 

news letter No.785 2023/7/4

 

 

 

 

지난 625, 필자는 불교중앙박물관에서 열렸던 기획전시 만월의 빛, 정토의 빛을 관람하였다. 이 전시는 올해 315일부터 625일까지 3개월여 동안 이루어졌던 전시회였다. 전시에는 국보로 지정된 청양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과 보물로 지정된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이 복장유물과 더불어 전시되었다. 이 전시회가 의미 있었던 것은 그동안 복장유물과 불상이 각각 따로 전시된 적은 있었지만, 이처럼 둘이 함께 전시된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복장(腹藏)이란 무엇인가? 불상의 조성과 결합한 복장의례는 고려 중기 이래 조선에 이르기까지 성행했다. 여기서 복장은 불상을 조성하면서 불상 내부에 봉안하는 여러 물목들, 그리고 물목들을 불상 내에 납입하며 행해지는 의례 과정을 통칭하여 나타내는 말로, 불복장(佛腹藏)이라고도 한다.

 

전시회에 대한 소식을 늦게 알게 된 필자는 전시 마지막 날에야 이 행사를 관람할 수 있었다. 전시회장에 도착하여 보니, 마지막 날이라서 그런지 전시장 내부는 비교적 한산했다. 전시는 1·2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1부는 만월의 빛이란 주제로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이하, 약사여래불)과 복장유물을 전시하였고, 2부는 정토의 빛이란 주제로 개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이 역시 복장유물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실 동선을 따라 전시물들을 차례로 지나치는 과정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전시실 중앙에 펼쳐져 있는 10m가 넘는 발원문이었다. 이는 직지심체요절을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백운화상(白雲和尙)이 폭 48cm, 길이 10m 58cm의 비단에 직접 쓴 발원문이다. 이 발원문의 특징은 주로 백운의 발원이 서술되어 있지만, ·아래 여백과 좌측 백운 수결 옆에 그리고 뒷면에, 1,078명의 발원자의 이름이 쓰여 있고, 짤막한 개별 발원문이 적혀있다는 점이다.

        발원문은 부처에게 소원을 비는 글을 의미하는 것으로 조성하는 불상에 납입하는 복장유물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약사여래불의 발원문이 특이한 것은 그 크기도 크기이지만, 발원한 사람들의 명수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발원문의 위·아래 여백과 좌측 그리고 뒤편 여백에 적혀있는 이름을 토대로 발원자의 수를 헤아려 보았을 때, 1,078명의 발원자가 이 발원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같은 해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서산 문수사 아미타불발원문의 참여자 323명의 3배가 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약사여래불에게 무엇을 빌었을까?

 

두 살 난 어을진(於乙珎)의 장수를 빕니다.”

 

앞의 짤막한 발원문에서 알 수 있듯이 발원의 내용은 주로 장수(長壽)와 장명(長命)에 관련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약사여래는 주로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인간을 구제해주고 삶의 평안으로 인도해주는 현세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약사여래에 귀의하여 자신의 평안하고 무탈한 삶을 욕망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약사여래불을 조성할 때, 자신의 이름을 틈틈이 적고, 소망을 새겨나갔던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신의 소망과 욕망을 특정 대상에 얹혀놓는다. 왜냐하면 욕망은 곧 삶의 불안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물질세계로부터 소외된 존재이다. 인간에게 물질은 타자로서 인간으로부터 분리된 존재이자, 독립된 존재이다. 하지만 인간 역시도 물질적 존재이기 때문에 물질의 조력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 인간의 불안은 여기로부터 온다. 물질로부터 분리된 인간은 그 부재(不在)로 인해 끊임없는 불안에 시달려야 한다. 인간은 그러한 부재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삶을 조정하고 적응해나가야 한다. 결국 인간에게 발생하는 존재론적 불안은 물질적 부재로부터 오는 것이며, 이런 부재는 인간의 물질에 대한 부정합성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조너선 스미스(Jonathan Z. Smith)는 자신의 책, Map is not Territory에서 아리탈로지(aretalogy)에 대해 소개한다. 스미스는 아리탈로지가 신적 인물의 기적담을 모아놓은 이야기이자, 신봉자들이 신적인 인물을 모방할 수 있는 의례적 모델(혹은 매뉴얼)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특정한 기적적 인물을 믿는 신봉자는 그 인물이 인도하는 진리의 길에 이르기 위해 그의 행적을 그대로 모방하면서, 아리탈로지속의 행적을 의례적으로 반복한다. 스미스가 예로 드는 엘리파스 레비(Éliphas Lévi)도 자신의 모델인 티아나의 아폴로니오스(Apollonius of Tyana)의 이야기를 의례적으로 모방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의례가 정점에 찼을 때, 레비는 환영을 보게 된다. 눈을 감고 떴을 때, 눈앞에는 머리부터 발까지 회색 수의를 입은 여위고 비애에 찬, 수염 없는 남자가 서 있었다. 그를 레비는 아폴로니오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앞에 나타난 아폴로니오스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일치하지 않았다. 레비는 조심스럽게 아폴로니오스의 생애를 다시 읽었고, 그가 삶의 말미에 감옥에서 굶주리고,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스미스는 레비가 의례를 실행하는 가운데 만난 아폴로니오스의 환영이 기대했던 상황과 일치하고 있지 않음에 주목한다. 레비는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아폴로니오스의 삶을 재고찰한다. 스미스는 부정합성(discrepancy) 경험이 일반적으로 아리탈로지를 신봉자들이 단지 수동적으로 모방하는 모델로 보는 관점을 교정하는 계기로 작용한다.”고 설명한다.

      레비의 사례를 통해 스미스는 의례 상황에서 발생하는 부정합성이 의례적 과정과 절차를 재검토하게 하고 재숙고하게 만든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러한 숙고와 재검토는 의례적 과정을 교정하게 만든다. 상황의 부정합성에 따라, 의례를 교정하는 전략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다른가? 인간과 물질의 불일치로부터 오는 인간의 존재론적 부재감은 결코 완전하게 메울 수 없는 틈이다. 인간은 이러한 간극을 좁히고 자유로울 수 있는 구원을 바란다. 인간은 종교를 통해 그러한 전략을 숙고한다.

 

인간은 알고 있다. 내가 그토록 염원하는 신이 나의 고통과 불안을 모두 가져가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인간은 삶과 바람의 부정합성을 숙고하며, 종교적 대상을 만들어낸다. 인간은 그 대상이 자신의 모든 소원을 들어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그런 기대마저도 또 다른 불일치를 만들뿐이다.). 대신 인간은 자신의 불안을 소망이란 형태로 종교적 대상(약사여래불)에 얹혀놓는다. 이제 불안·기대·소망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저 절대적 타자에게 있다. 나는 그저 내 것이 아닌 나의 소망과 불안에 기도하며, 현실을 열심히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인간은 삶의 부정합성으로부터 오는 절망과 불안을 조정하고 교정한다.

 

 

 

 

 

 

도태수_
한국학중앙연구원
논문으로 <근대적 문자성과 개신교 담론의 형성>, <근대 소리 매체(라디오, 유성기)가 생산한 종교적 풍경>, <물질종교, 신유물론으로 접근하기> 등이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