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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인지적 부조화와 종교

 

news letter No.812 2024/1/9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1968년 체코 프라하에서 한 권의 책을 입수한다. 그 책은 1842년 발레 수도원장이 펴낸 마비용 수도사의 편집본을 바탕으로 불역한 멜크 수도원 출신(베네딕트회 수도사) 아드송의 수기(이하, 아드송의 수기)였다.

 

에코는 이 책을 발견하고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오죽했으면, 이 책을 단숨에 대학노트 몇 권에 이탈리아어로 번역할 정도였을까. 하지만 이 책은 얼마 지나지 않아 에코의 손을 떠나 사라지게 된다. 여행을 같이했던 동료가 헤어지면서 자신의 짐을 싸는 도중에 우연히 이 책을 가지고 갔던 것이다.

 

책을 잃어버리고 에코는 적이 상심했던 것 같다. 더욱이 안타까운 것은 정녕 아드송의 수기를 찾을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에코는 특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분명히 자신이 수중에 넣어, 보고 번역까지 했던 원본에 대한 존재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오히려 에코는 자신이 보았던 그 책이 자신의 꿈결 속에서나 존재했던 것은 아닐까 의심한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너무도 애타게 그리워하면, 그 무언가에 대해 부정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런 부정은 실상 존재했던 것에 대한 의심으로 연결되고, 존재했던 것의 존재하지 않음이란 환상으로까지 연결된다. 존재함이 갑자기 존재하지 않음으로 전환하는 그런 인지적 부조화는 결국 인간의 집착을 타고 사람의 마음에 뿌리내리기 시작한다.

 

에코의 장편 소설 장미의 이름은 그와 같은 인지적 부조화의 아날로지적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 책, 장미의 이름의 집착은 아드송의 수기에 대한 애타는 그리움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2권과 연결되어 있다. 이 소설의 궁극적 질문은 이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두 권인데, 왜 정작 1권만이 전해지는 것일까? 정녕 2권이 존재하기는 했을까? 에코는 그런 의문을 따라 새로운 상상력을 펼쳐내기 시작한다. 혹시 시학2권이 분실된 이유가 희극론이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시학2권이 현존하지 않는 것은 중세의 엄격주의 수도원 전통과 관련 있지 않을까? 시학2권이 사라진 것은 웃음때문은 아닐까?

 

많은 사람이 알고 있듯이 소설 장미의 이름은 이탈리아 북부, 어느 수도원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다룬 미스터리 추리물이다. 소설에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파견된 윌리엄 수도사와 그를 수행하는 아드송 그리고 사건을 미궁에 빠뜨리는 장님 노() 수도사 호르헤가 등장한다. 윌리엄 수도사는 영국의 프란체스코파 수도사인 로저 베이컨(Roger Bacon)의 현신이다. 그는 인간의 모든 사건에는 이유가 있음을 굳게 믿는 계몽적 합리주의자이다. 그래서 그는 사건을 자연과학적 합리성에 근거해서 해결하고자 한다. 옆에서 그를 수행하는 아드송은 베네딕트파 수도사로 이 이야기 전체를 이끌어가는 화자이다. 호르헤 수도사는 이 수도원의 장서관 수도사로서 엄격한신의 진리를 추구하는 베네딕트회 수도사이다.

 

이 소설의 핵심적인 주제는 웃음에 있고, 이에 따라 소설의 핵심적인 갈등도 웃음으로부터 파생된다. 장서관에서 윌리엄이 첫 대면 하는 호르헤는 다음과 같은 말과 함께 등장한다.

 

Verba vana aut risui apta non loqui(헛된 웃음을 유발하는 말은 하지 말라)

 

이 말은 베네딕트 수도회 회칙 4장에 나오는 말이다. 이 말과 함께 호르헤는 윌리엄과 웃음에 대한 논쟁을 시작한다. 호르헤가 생각하기에 웃음은 신의 완전성을 저해하는 악마적 행위이다. 즉 세상에 진리는 신의 권위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인간은 엄격하고 근엄하게 신의 권위를 준수하고 실천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웃음은 그런 근엄한 위계를 전복하고, 권위에 도전하는 차이의 미학이다.

 

권위는 자신의 위계적 힘을 지키고자 차이 나는 것들을 모두 자신의 발아래 복종시키고 동일화되기를 강요한다. 하지만 웃음은 원래의 것과 다른 것을 추구하며, 일반적인 사실과 사건에서 벗어나 예외적인 상황에서 툭 튀어나오는 차이에 대한 반응이다. 그래서 권위는 균형 잡힌 완전함을 요구하지만, 웃음은 차이를 관조하고 여유롭게 즐기기를 권고한다. 그래서 웃음은 신의 말씀을 거문고 뜯는 나귀, 방패로 밭을 가는 올빼미, 스스로 멍에를 쓰고 일하는 황소, 거꾸로 흐르는 강, 불붙는 바다, 은자로 변한 늑대와 같은 기괴함으로 묘사한다.

 

이에 반해 엄격함은 권위를 준수하라는 명령이자, 권위에 복종하라는 포승줄이다. 그래서 권위는 엄격한 완전성을 요구하고 정밀한 균형을 추구한다.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처럼 말이다.

 

아름다움을 창조하는데 세 가지 요소가 한데 어우러져야 한다. 첫째는 불완전한 것을 추한 것으로 여기게 하는 완전성 혹은 무류성(無謬性), 두 번째는 균형 잡힌 비율 또는 조화, 마지막으로 투명함과 빛이다.

 

웃음은 그런 위계적 동일성으로부터 벗어나 기존의 것과는 다른 차이를 즐기려는 새로운 상상력이다. 차이는 창조의 시작이자, 틈이다. 웃음은 그런 차이의 틈을 여유롭게 대면할 때 발생한다. 차이의 삐죽함에 당황하는 것이 아니라 느긋하게 대면하는 순간, 차이는 당혹이 아니라 상황을 반전시키는 창조가 된다. 차이의 틈을 느긋하고 여유롭게 바라보며 웃음 짓는 순간 새로운 세계가 등장한다.

 

조너선 스미스(Jonathan Z. Smith)는 이러한 세계를 유희적 세계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가 종교적 세계와 같다고 말한다. 즉 상황의 부조화에 맞닥뜨린 인간은 그 부조화에 절망하기보다는 상황을 향유하기 위해 상상하기 시작한다. 차이의 당혹스러움을 멀리하고 느긋함에서 발생하는 차이의 상상력, 이것이 종교적 사유의 시작이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인간의 사유에서 발생하는 널찍한 틈에서 인간은 종교적 세계로 나아간다.

 

 

 

 

 

 

도태수_
한국학중앙연구원
논문으로 <근대적 문자성과 개신교 담론의 형성>, <근대 소리 매체(라디오, 유성기)가 생산한 종교적 풍경>, <물질종교, 신유물론으로 접근하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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