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뉴스 레터

814호-소원 빌기의 아름다움을 위하여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4. 1. 23. 17:44

소원 빌기의 아름다움을 위하여

 

news letter No.814 2024/1/23

 

 

 

 

또 하나의 새해가 열렸다. 아니, 열렸다기보다는 밀려왔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올해의 시작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으로 다가서 온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사람들은 새해의 소망을 빌고 또 빌 것임이 틀림없다. 혹자는 소망을 욕망이라 부르고 혹자는 기도나 비손이라고 부른다. 대개는 그것을 소원의 동의어라고 여긴다. 소원 빌기야말로 종교의 핵심일 지도 모른다. ()은 사람들의 소원을 먹고 자꾸 비대해지기만 하는 거인이다.

 

조지 밀러 감독의 영화 3천 년의 기다림(The Djinn in the Nightingale’s Eye. 2023)소원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떠올리게 한다. 병 속에 갇힌 거인(정령 지니)은 자신을 병에서 꺼내준 자가 세 가지 소원을 말해야만 솔로몬의 저주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두 번째로 그 거인을 병에서 꺼내준 젊은 여성 제피르는 강렬한 지식욕에 사로잡혀 있다. 제피르의 첫 번째 소원은 아름다운 지식이었고 거인은 그 소원을 들어주었다. 제피르의 두 번째 소원은 신처럼 꿈꾸는 법과 신처럼 깨어있는 법이었고, 거인은 그 소원도 들어주었다. 제피르의 세 번째 소원은 망각이었다. 그런데 거인은 제피르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녀가 세 번째 소원을 말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리하여 거인은 다시 병 속에 갇히고 만다. 제피르는 소원이란 것이 아름다움, 지식, , 깨어있음, 망각 등과 이어져 있음을 일깨워준다.

 

거인을 다시 병 속에서 꺼내준 세 번째 인물은 이야기(storytelling)의 구원론적 의미에 사로잡혀 있는 서사학자 알리테아였다. 알리테아는 원래 소원의 실체란 없으며, 소원을 빌면 결국 일을 망쳐버린다고 믿는 학자였다. 그러던 알리테아가 지니의 사연을 들으면서 소원이 생겼다. 그것은 사랑하기의 소원이었다. 알리테아의 첫 번째 소원은 자신을 사랑해달라는 소원이었다. 신은 그 소원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사랑이란 아무런 대가 없이, 아무런 조건 없이 주거나 받는 하나의 선물이다. 그것은 애당초 소원을 들어주는 대상이 될 수 없는 항목이다. 그리하여 거인이 알리테아의 첫 번째 소원을 들어주었을 때, 곧 정령 지니가 알리테아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거인은 더 이상 소원을 들어줄 능력을 상실하고 만다. 그 결과 거인은 언어를 상실하고 먼지처럼 사라지려 한다. 이때 알리테아는 자신의 치명적인 실수를 알아채고 두 번째 소원으로 거인에게 언어를 되찾아 주었고, 이어 세 번째 소원으로 당신이 있을 곳으로 돌아가라고 빌었다. 이리하여 정령의 세계로 돌아간 거인은 때때로 알리테아 앞에 나타나 함께 시간을 보낸 다음 홀연히 사라지곤 했다. 알리테아는 더 이상 소원을 말할 필요가 없었다.

 

소원을 말할 필요성의 여부를 넘어서서 아예 소원을 빌 줄 모르는 자도 있다. 그런 자는 종종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럴 때는 사람들이 저마다 행복을 기원하는 것이 낯설게 느껴지곤 한다. 어리석게도 그는 내가 정말 소망하는 것은 행복이 아니야!”라는 말을 입 밖에 내기까지 한다. 종교의 자리에서 보면 그런 사람은 반()종교적이고 비인간적인 존재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미()의 자리에서 보면 다른 장면으로의 전개도 가능하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무언가 절실한 소원을 빌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있는 것은 다만 절실함뿐이다. 거기에 소망이 들어설 자리는 없고 그저 시리고 아픈 슬픔만이 모래알처럼 부서져 내린다. 일본인들은 이런 막막한 느낌을 모노노아와레(物哀)라고 부른다. 모노노아와레란 사물(모노)에 대한 비애와 연민을 뜻한다. 일종의 강렬한 자기연민인 모노노아와레는 일본인의 미적 감수성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과 모노노아와레는 각각 한국인과 일본인의 미의식을 대변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슬픔이야말로 가장 강렬한 미적 정취를 나르는 수레이기 때문이다. ‘이 한국인의 슬픔을 대변한다면, 모노노아와레는 일본인의 슬픔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내친김에 더 비약적인 상상을 감행해 보자. ‘은 소망 안에서 승한(昇恨)의 아름다움을 풀어내고, 모노노아와레는 소망의 체념 안에서 덧없음의 아름다움을 응축시킨다고 말이다.

 

실은 소망 없음, 이것이 소원을 빌 줄 모르는 자의 이다. 그의 경우는 소망 없음이 하나의 소망이 되는 곳에서 한의 승화가 시작된다. 되풀이 말하거니와 소망은 종교의 본질이고 은 미()의 토대이다. 소망과 의 공모 관계는 믿음과 아름다움의 함수 관계와 닮아 있다. 한마디로 아름다움과 믿음은 참으로 닮은꼴이다. 믿음이 그러하듯이 아름다움은 그것을 소망할 때만 아름다움의 얼굴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소망하지 않는 곳에 아름다움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아름다움은 본질적으로 소망으로서의 아름다움일 뿐이다.

 

박경리의 토지소망으로서의 한()’이 아름다움으로 승화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때의 승화는 조정래의 아리랑과 함께 읽을 때 그 완성된 형태를 보여줄 것이다. 조정래는 아리랑의 후기에서 육당 최남선이 지은 어떤 시조에 대한 분노가 집필의 중요한 동기이자 원천이었음을 시사한다. 1926년에 출간된 육당의 첫 개인 시조집 백팔번뇌에 수록한 다음 시조가 그것이다.

 

다 부서지는 때에 혼자 성키 바랄소냐.

금이야 갔을망정 벼루는 벼루로다.

무른 듯 단단한 속은 알 이 알까 하노라.(최남선, 〈깨진 벼루의 명(銘)〉)

 

훗날 최남선이 걸었던 친일의 길을 스스로 정확하게 예견한 이 시조에서 금 간 벼루아름다운 지식의 슬픈 운명을 말해준다. 물론 벼루의 소망은 결코 그 균열과 파괴에 있지 않다. 스스로를 닳게 함으로써 문향(文香)으로 다시 태어나기, 그것이 벼루의 소망이다. 육당은 그런 벼루의 소망을 저버린 문인이었다. 그리하여 육당의 소원은 욕망으로 끝나고 만 것이다. 정말 알 수 없는 것은 어떤 소원도 그것이 욕망인 한 아름다울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보다 더 알기 어려운 것은 알리테아가 실수로 꿈꾼 사랑하기의 소원이다.

 

아름다움을 소망하는 자라면 사람은 자기 안에 본질적인 소망 하나를 품고 있습니다/그것은 아름다움입니다.”(정용철, 아름다움을 향한 소망)라고 노래할 것이다. 하지만 소원 빌기의 아름다움을 찾는 이에게 욕망과 꿈 사이의 거리는 생각보다 훨씬 멀리 떨어져 있다. 만일 그에게도 올해의 소원 빌기가 허락된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지식이라는 허상의 꿈에서 깨어나는 일이 아닐까 싶다.

 

 

 

 

 

 

박규태_
한양대학교
저서로 《현대일본의 순례문화》,《일본재발견》,《일본정신분석》,《일본 신사의 역사와 신앙》,《포스트-옴시대 일본사회의 향방과 '스피리추얼리티'》,《일본정신의 풍경》 등이 있고, 역서로 《일본문화사》,《국화와 칼》,《황금가지》,《세계종교사상사 3》 등이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