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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822호-화창한 봄날, 나를 묻는다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4. 3. 19. 14:32

화창한 봄날, 나를 묻는다

 

news letter No.822 2024/3/19

 

 

 

여기저기서 꽃망울이 터지는 화창한 봄날이다. 2월 말, 막내 아이의 생활관에 짐을 풀어주고 돌아설 때, 혼자 남은 아이의 얼굴에 비쳤던 긴장감은 두 주가 지나자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막내 아이는 올해 대학에 진학했다. 중고교 시절 내내 학원은 물론이고 방송강의조차 고집스럽게 거부하며 학교만 다녔던 것을 감안할 때, 과분하게도 지방 국립대에 당당히합격했다. 내가 사는 이곳은 지방소멸의 대표 지역에 속하지만, 여기서도 사교육 시장은 엄연히 존재한다. 물론 그 규모나 수준은 대도시의 경우와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학부모와 아이들은 반은 체념한 상태로, 반은 그래도 해보자는 심정으로 몇 안 되는 학원 문을 들락거린다. 유난히 남의 간섭을 싫어하는 아이의 심성 탓에 학원비를 걱정하지 않아서 다행이었지만, 가끔 언론매체의 입시 관련 기사들을 접할 때마다 나의 위태로운 사회적 위치를 확인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럴 때면 즐겁고 건강하게 사는 게 최고지 뭐”, 라는 생각으로 불안과 아이에 대한 미안함을 잠재워 보려 했지만, 내 능력 밖에 있는 것들이 점점 늘어나는 현실 앞에서 위태로움의 감정을 쉽게 떨구기는 어려웠다. 대학, 연구기관, 회사, 공공기관,.......어느 곳에도 자리를 찾지 못한 처지인지라, 내 존재의 흔적을 새길(im-press) 사회적 면적은 매우 좁고도 얇다(심지어 내 아이들은 아직도 자기 아빠가 뭐 하는 사람인지 헷갈려 한다!). 물론, 내게는 그런 정글과 같은 세상에서 타잔과 같은 민첩함과 영민함을 발휘할 재능이 없기에, 신세를 탓할 그 대상도 없다. 그저, 삶의 위태로움을 받아들이고 감내할 뿐이다.

 

그런데 마당에서 햇볕을 쬐며 낮잠을 즐기고 있는 개들을 가만히 보자니, 문뜩 최적화된 삶, 생존 역량과 같은 용어들이 낯설게 다가온다. 저렇게 태평스럽게 바닥에 드러누워 봄날의 기운을 느끼며 잠을 청하는 저들은 이곳 환경에 최적화된 존재들일까? 또한 최적화된 존재들은 모두 불안이나 위태로움을 느끼지는 않는 것일까? 최적화된 존재든 아니든 간에 모두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삶의 위태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면, 그 위태로움의 진원지는 어디일까?

 

요즘 글이나 말에서 자주 접하게 되는 관계적 존재론이라는 말과 함께 종종 소환되는 종교는 불교인 듯하다. 연기론과 무아론에 근거해서, 모든 존재가 서로서로 얽혀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의존적 존재이고,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자기 비움의 삶을 실천해야 한다는 불교의 가르침은 위태로운 세상에 호소력 있게 다가온다. 비록 현실이 그러한 가르침에 거스르는 반동의 물결을 일으켜 우리를 다른 곳으로 떠밀어 간다고 해도, ‘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타자들이 필요하다는 점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문제는 자립적이고 생존 역량이 강한 주체로서 자신을 내세우면서, “그게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인가라고 여기는 경우이다. 우리는 흔히 곤란과 비참에 빠진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면서도, 나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일이라며 그 아픔에서 쉽게 뒤로 물러선다. 불교의 가르침에 기대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서는 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사실이지만, 우리는 자꾸 그 사실을 잊고 사는 것이다. 삶의 위태로움은 그러한 망각 언저리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의지할 대상이 필요할 때 그 곁에 아무도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취약한 존재들, 또한 그러한 취약한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삶에 최적화된 존재들도 모두 위태롭기는 마찬가지다. 관계적 존재론이나 불교의 연기론에 따르면, 타인의 고통이 존재하는 한 나의 고통도 소멸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와는 상관없다는 행위는 세상에 고통을 가져오게 되고, 그렇게 계속되는 삶은 불교의 가르침대로 고통스러운 바다와 같을 수밖에 없다.

 

홀로인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 타인에게 기대고 있고, 우리 중 어떤 사람은 그 자체가 타인에게 달려 있습니다. 바로 이 후자 때문에 저는 이 강연의 대가로 받게 될 후한 사례금을 국경 없는 의사회와 나누려 합니다.” 타인의 손에 의탁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취약성과 의존성에 대한 언급에 이어서 토니 모리슨은 다음과 같이 문학과 예술의 역할을 강조한다. “예술이 대중과 나누는 대화, 예술의 다양한 장르 간의 대화는 깊이 있는 보살피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완전한 인간으로 산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는 데 매우 결정적입니다. 저는 믿습니다(토니 모리슨, 보이지 않는 잉크, 368-369).” 그녀의 수상소감에서 내가 눈여겨본 말은 깊이 있는 보살피는 마음이다. 보살핌(돌봄)은 인간의 취약성과 관계성에 대한 인식에 근거한 행동이다. 많은 종교가 인간의 취약함과 불완전함을 말한다. 그렇지만 행복은 그러한 취약함과 불완전함을 상쇄하는 삶에 최적화된 역량의 성취에 달렸다는 행복기술론의 시각에 대해 종교는 결을 달리한다(그리고 달리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자기 집의 커다란 통유리창 너머로 한강을 내려다볼 수 있는 여유로운 삶을 동경한다. 여기서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애써 성취한 노력의 결과와 그 풍요로운 삶의 향유를 폄훼할 생각은 없다. 또한 부자가 소유한 것에 비례해 빈자에게 물질을 분배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단지, 모든 존재가 저마다의 취약함과 불완전함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마음에 담아 두면, 자신의 취약함으로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존재를 열등하고 무능력한 타자로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고, 근엄한 시혜의 태도를 버리게 된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모리슨의 말처럼 타인의 도움에 자신의 삶을 의탁하게 만드는 현실을, 그리고 그런 위태로운 존재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모두의 위태로운 상황이 펼쳐지는 현 사태를 고려할 때, 취약한 모든 존재들을 보살피는 마음(돌봄의 정동)’이 모두에게 필요함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렇다고 보살핌의 윤리적 책임을 전적으로 개인의 선한 마음에만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위태로운 세상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나 역량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통에 감응하는 종교의 윤리적 정치성에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든 존재들을 향해 고통의 이유와 구원의 조건을 설파하려면, 종교 스스로가 지금 여기서 위태롭게 살아가는 존재들을 보살피는 마음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 이런 행위가 정치성을 띨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삶의 위태로움이 정치경제의 사회구조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돌봄의 정치성이나 돌봄의 공공성이 종교의 복지 활동으로 대체될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럴 수도 없다. 복지의 시혜와 수혜에 따른 위계서열의 권력관계가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사회복지기관에 수용된 약자들이 종종 겪는 폭력과 차별의 고통은 그 힘의 격차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크게 두 가지 의미에서 돌봄-윤리의 정치성이 종교에 요청된다. 첫째로, (사실 모든 생명체는 그 유한성에 의해 취약한 존재지만) 정치적, 사회적, 생태적으로 취약한 존재들과의 연대를 공모하고 그러한 연대가 종교적 가치에 따른 당위성을 갖고 있음을 자신의 구성원에게 설명할 윤리적 책임(accountability)이 종교에 있다는 뜻에서 그러하다. 둘째로, 무엇보다 돌봄의 공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차별과 배제의 독단적인 언어를 종교 그 자신의 내부에서부터 파괴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과연 우리는 따로따로 떨어져서는 살 수 없다. 객체는 있어도 독자는 없다. 만물은 싫든지 좋든지 어울려 살아야 한다. 은하계의 별 하나도 제멋대로 이탈했다가는 끝장이 나버린다. 마구 뒤엉켜 살아도 엄연히 우리는 하나의 고리에 이어진 한목숨이다. 나무나 풀이나 바위도 물도 모두 남이 아니라 하나이다. 나무를 모시는 것은 인간 자신을 모시고 하느님을 모시는 원칙이다. 그래서 신(하느님)도 인간도 우주도 하나로 파악했을 때 내 이웃이 내 몸이 될 수 있는 것이다(권정생, 우리들의 하느님, 193-194).” 여기서 권정생의 모심이라는 말은 모리슨의 보살피는 마음과 다르지 않은데, 공히 존재의 관계성과 취약성에 대한 자신의 구체적인 경험에서 나온 성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취약하고 소멸해가는 존재들의 자리에 서지 않은 채 (사회적) 고통과 구원에 관해 쏟아내는 말들은 공허하다. 도나 해러웨이는 반려종선언에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추상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일대일 관계, 연결된 타자성을 통해 타자()가 누구이며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도나 해러웨이, 해러웨이 선언문, 173). 추상화된 관계와 개념화된 타자(고통)를 전면에 앞세울 때 타자의 목소리에서 오히려 타자(의 고통)는 소거되기 십상이다. 이와 관련해서 인류학자이자 의사인 이기병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학이 환자의 질환 서사를 제외한 채 깔끔하게 통제되고 압축된 정보로 재단된 몸만을 다룬다면 그것은 인간의 삶 전체에서 상당한 부분을 스스로 소외시키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의학의 무능을 스스로 입증하는 셈이라고 생각한다(이기병, 연결된 고통, 43-44).” ‘연결된 타자성이나 질환 서사에 대한 강조는 관찰자가 아니라 참여자, 방관자가 아니라 행위자로서 상호관계의 흐름에 내 얽힐 때, 비로소 상호 이해의 통로가 확보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추상화된 존재, 그 누구도 아닌 대상(허공)을 향해 쏟아내는 화려한 말잔치가 펼쳐지는 요즘에 절실한 것이 바로 듣기의 윤리가 아닐까 싶다.

 

만물이 생기를 띠는 화창한 봄날에도 문뜩문뜩 위태로움이 느껴지는 요즘이다. 그럼에도 삶에 드리운 위태로움은 매일 아침 제시간에 방문 앞에서 조용히 나를 깨우는 커다란 백구의 작은 소리와 움직임의 반경만큼 잠시 멀어지니, 그 틈에 피어나는 봄날의 기운에 잠시 나를 묻는다.

 

 

 

 

 

 

박상언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논문으로 <배아줄기세포연구의 생명윤리담론 분석: 한국 기독교와 불교를 중심으로>,<간디와 프랑켄슈타인,그리고 채식주의의 노스탤지어:19세기 영국 채식주의의 성격과 의미에 관한 고찰>,<신자유주의와 종교의 불안한 동거: IMF이후 개신교 자본주의화 현상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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