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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텃밭, 그 언저리 걷기
news letter No.836 2024/6/25
• 경험을 중시하다
어느 주일 저녁 무렵 어머니를 모시고 성당에 갔다. 네댓 사람이 모여 있었다. 성당의 텃밭 풀을 뽑기 위해서였다. “어머니, 저도 좀 도와드릴까요?” 했더니 “풀을 뽑을 수 있니?” 하기에 “풀 뽑는 것도 자격증이 필요합니까?”라고 하면서 구두를 신은 채 장갑을 끼고 ‘조용히’ 풀을 뽑았다. 성당 자매님들은 풀을 솎으면서 말들이 많았다. 그러나 싫지 않은 것이 그 모든 내용들이 가톨릭 성당을 이해해 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정보들이 되어 준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나는 예비신자다. 다음 주일이면 세례를 받게 된다. 가톨릭 신자가 되는 길은 매주 일요일마다 ‘교리수업’과 ‘나눔시간’ 그리고 ‘미사참여’로 이어지는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지난 주일 신부님 면담이 있던 날 신부님께서는 내가 어떤 계기로 신자가 되기로 마음먹게 되었는지 물어보셨다. 나는 신부님께 누구의 강요도 아니고 스스로 오게 되었다고 말씀드렸다.
• 이쪽과 저쪽
인류학자들은 대체로 경험을 중시한다. 인류학자들은 어떤 낯선 집단 속으로 들어갈 때는 그동안 무관심했던 집단이든, 선입견이 있던 집단이든 의식적으로 열린 체험의 결에서 받아들이게 된다. 이 과정은 매우 중요한 데, 보통 한 달, 석 달 혹은 여섯 달 정도가 지나면 거의 그 참여관찰 집단의 행동과 행위에 ‘동화(同化)’되기 때문에 그런 의식적 감각도 무뎌지게 마련이다. 우리가 처음 맞닥뜨리는 어떤 경험들에 그렇게 주목하는 이유도 그래서 일 것이다. 그렇게 대순진리회, 동학대종원 천진교, 불교, 성당 등을 거치면서 소위 입교(入敎)의 종교체험은 나에게 많은 ‘학문적 즐거움’을 준다. 그러면서 그동안 내가 가졌던 여러 이미지들을 뒤집어 놓는 일도 체험하게 된다.
이 경험들이 이쪽과 저쪽의 생각의 차이, 교리의 차이를 알게 하고, 인간을 이해하려는 활동에 참여하게 하고, 나를 개진시키기도 한다. 그러면서 이쪽과 저쪽의 언어로 ‘썰’들을 풀어도 본다. 실은 이쪽과 저쪽의 언어가 종교마다 조금씩 다르게 쓰인다고는 하지만 전혀 저쪽이 모르는 이쪽의 언어가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어쩌면 막스 뮐러(Friedrich Max Müller, 1823~1900)가 “하나만 알면 아무것도 모르는 셈이다”1)라고 말했을 때 그의 비교종교학의 초보 단계를 나는 즐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막상 이쪽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이쪽 내부의 맥락을 중시하지 않을 수도 없게 된다.
• 안에서 안을 본다
예비신자의 체험은 평생 한 번뿐이어서 꼼꼼히 기록해 둔다. 물론 이 기록에는 내가 어쩔 수 없이 비교의 관점을 취할 때가 많다. 그들의 언어로 말할 수 없을 때는 그렇게밖에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위 안에서 안을 보기 위해서 안의 맥락을 보는 것 못지않게 안의 언어를 익히는 과정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것이 긴 세월이 걸릴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도 보이는 세계의 질서에서 출발하고 그렇게 보이게 되는 세계가 어쩌면 전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성당은 예배의 형식이 매우 잘 갖추어져 있다. ‘예배’라는 말 자체가 나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미사가 시작되면 ‘입당’에서 ‘파견’까지 매번 변주형식의 도돌이표 같이 진행되었다. 그래서 나는 한 달 두 달이 지나가자 미사가 살짝 지루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나는 영성체 후 성가대가 부르는 ‘성체묵상곡’이 흘러나오는 동안은 종교적으로 고양됨을 느낀다. 성가대가 불러주는 그 음악에는 그동안 다른 종교적 세계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내적 상승이 있다. 그것은 다른 지루함을 커버하고도 남음이 있고, 그 울림은 그다음 한 주 동안 내 내면에서 울려 퍼진다.
독일에서 피아노를 전공하셨지만 동네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고 계시는 나의 피아노 선생님께 이 얘기를 했더니, 자신도 성당에서 지휘를 하고 계신다면서 가톨릭과 성악과 오르간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하신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이 땅에서 20세기 기독교의 번영에 음악의 울림이 크게 작용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말하자면 한국인들의 내면을 파고든 성악과 피아노 소리에 한국인들이 반응한 종교의 역사가 있었을 터이다. 그런 식으로 나는 특정 종교보다 한국인들의 믿음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지금은 가톨릭 주일 미사에서 ‘감실(龕室)’과 감실 안에 있는 성체, 성찬, 예물 봉헌, 제대 위의 성물들, 절, 성체조배 등 유교적 언어와 불가분의 관계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고, 그 유교적 언어가 한국의 가톨릭에 준 굴절을 생각한다. 그래서 믿는다는 것이 특정한 단어를 암송하는 전통에서 오늘날 실재에 대한 특정한 개념을 내적으로 결단하는 문제로 귀결된 그 마음의 문화사를 얼핏 경험하며 ‘종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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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üller, Introduction to the Science of Religion(1873), p.16.
심일종_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
논문으로 <영등신을 위한 음식>, <조선 초기 법화사상과 불교의례>가 있고, 두 번째 박사논문으로 <조선시대 유‧불의례의 상관성 연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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