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바리공주》에 담긴 ‘효(孝)’를 생각하며
news letter No.833 2024/6/4
《바리공주》는 망자의 넋을 저승으로 인도하고, 남겨진 이들의 슬픔을 위로하는 무당의 노래다. 이 무가는 주인공 바리공주(이하 바리)가 어떤 연원으로 망자의 영혼을 이승에서 저승으로 이끄는 천도신(遷度神)이자 무조신(巫祖神)이 되었는지를 풀어낸다. 사령제(死靈祭) 혹은 위령제(慰靈祭)에서 바리의 일대기는 꽤 길게 구송되는데, 서울 진오기굿의 말미거리, 호남 씻김굿의 오구풀이가 대표적이다. 버림받은 딸이 온갖 시련을 이겨내고 약수를 구해와서 자신을 버린 부모를 살린다는 서사무가 《바리공주》는 효(孝)라는 주제를 효과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기여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바리는 바리공주(鉢里公主), 바리데기, 벼리데기, 비리데기, 바리덕이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바리는 ‘내다 버린’이라는 뜻이고, 바리공주는 ‘버려진 공주’이다. ‘데기’는 누군가를 낮잡아 이르는 접미사로서 부엌데기처럼 부정적 의미를 지닌다. 이 무가의 서울 경기본을 제외한 여타지방에서는 바리데기라고 전해진다. 《바리공주》는 제주도를 제외한 한반도 전 지역에서 전승되고 있고, 지금까지 연구자들이 이를 채록하여 공개한 것만도 100여 편에 이른다. 최초로 채록, 보고된 것은 1937년 아카마쓰 지조(赤松智城), 아키바 다카시(秋葉隆)가 공동으로 편찬한 《조선무속의 연구(朝鮮巫俗の硏究)》상권에 수록된 경기도 오산의 무녀 배경재의 구연본이다.1) 이 책의 첫머리에 ‘사희(捨姬)’라고 제목을 붙이고, 무조전설(巫祖傳說)이라고 분류하였다. 사희는 바리의 이칭(異稱)인 셈이다. 배경재본에서 바리의 부친인 대왕마마는 문복(問卜) 결과를 잘못 해석하여 내리 딸을 낳았고, 일곱 번째도 딸이 태어나자 화가 나서 내다 버리라고 명한다. 이에 중전마마는 꼭 버려야 한다면 이름이라도 짓도록 한다.
“골육을 엇지 수중에다 너흐시려 하시나잇가? 자식업는 신하에게 수양녀로 주시거나 정 벌이려 하옵시거든 아기 일흠이나 지성이다. 발이다 발이덕이 더지다 더지덕이 옥함에 금거북 잠을쇠를 어슥비슥 체여놋코 칠공주 세글자 금으로 색이고...”
밑줄 친 내용 중 ‘발이다’, ‘더지다’는 ‘버리다’, ‘내던지다’라는 뜻이다. 부모의 작명에 따라 바리의 존재는 규정된 셈일까. 주목할 것은 바리가 부모로부터 두 번에 걸쳐 버려진다는 점이다. 첫 번째, 바리의 부친은 또 딸이라서 막내딸을 내다 버린 것이다. 아마도 그는 당대의 규범에 따라 그 부모가 살았을 때 정성을 다하고 죽은 뒤에는 경애하는 마음으로 제사를 지내고, 아들을 낳아 제사가 끊기지 않도록 하는 것을 효의 기본으로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줄줄이 딸만 낳게 되자 그는 종묘사직을 누구에게 전하며, 조정백관은 어찌해야 할지 자조 섞인 한탄을 하였다. 무엇보다도 그에게 사손(嗣孫)이 없다는 것은 ‘불효’인 셈이었다.
두 번째, 바리의 부친은 자신의 치병을 위해 다시 딸을 내보낸다. 딸을 버린 탓에 죽을병에 걸려버린 대왕마마는 수소문 끝에 15년 만에 바리와 재회한다. 구약(救藥)의 길은 저승길과 다름없으므로 모두 주저하는데, 바리는 가다가 죽더라도 부모효양이면 뭐든 하겠다고 필마단기(匹馬單騎)로 떠난다. 특히 그녀는 “국가에 은혜와 신세는 안졌지만 어마마마 배안에 열달들어 있든 공으로 소녀가오리다”라고 하면서 어머니를 향한 보은을 강조하고 있다. 모성에 대한 효와 성불(成佛)이 하나임을 시사하는 것으로 《삼국유사》 효선편의 ‘진정사효선쌍미(眞定師孝善雙美)’, ‘손순매아 흥덕왕대(孫順埋兒 興德王代)’, ‘빈녀양모(貧女養母)’가 있다. 특히 중국 당대(唐代)의 위경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에서 십대은(十大恩)의 첫 번째 은혜가 바로 잉태하여 지켜주신 어머니 은혜(懷耽守護恩)인데, 그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바리의 효행은 ‘버린 자’와 ‘버려진 자’의 화해뿐 아니라 이승과 저승, 삶과 죽음, 일상과 비일상의 조화를 이루어 ‘버려짐’의 의미를 완성했다고 할 수 있다. 바리가 약수를 구해와서 부모효양을 다한 후, 부모의 호의를 마다하고 죽은 이를 천도하는 만신의 몸주가 되겠다고 한 것은 한국의 한(恨)의 정서와 관련하여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천이두는 해한론(解恨論)에서 “한의 ‘삭임’ 기능은 선과 악, 긍정과 부정,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를 함께 담아 발효시킨다. 그 결과 한은 공격성과 퇴영성을 누그러뜨리고 미학적이자 윤리적인 가치로 승화한다.”고 하였다. 이에 박규태는 “한을 삭이면 한이 맺히게 되는데, 거기에는 분노와 원한 또는 복수 같은 부정적 심리가 함께 응어리질 수 있다.”고 하면서 한을 승화시킨다는 의미의 승한(昇恨)이라는 말을 더 선호하였다.2) 해한론이나 승한론 모두 한의 능동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서, 바리가 고난을 통해 스스로 변혁하는 적극적 태도를 보이는 것을 설명하는 데 일조한다.
죽은 자의 넋을 저승으로 인도하고, 남겨진 자들을 위로하는 이 노래는 인간의 간절한 경험에서 나온 상상력의 결정체다. 그것은 저승과 이승, 죽은 자와 산 자, 버린 자와 버려진 자가 상극이 아님을 일깨워주는 중요한 이야기다. 근대 이후 우리는 이 무가를 근대 학술용어로 ‘신화’라고 한다. 한국사회에서 신화 개념이 어떠한 변주를 겪었는지에 대한 내재적 접근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 한국 대표적 무속신화 《바리공주》는 주목되는 텍스트다.
-------------------------------------
1) 서대석·박경신 역주, 《서사무가I》,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6, pp,212-253.
2) 박규태, 《한과 모노노아아레: 한일 미의식 산책》, 이학사, 2024, pp.121-131.
하정현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논문으로 <1920-30년대 한국사회의 '신화'개념의 형성과 전개> , <근대 단군 담론에서 신화 개념의 형성과 파생문제>,〈신화와 신이, 그리고 역사〉 등이 있다.
'뉴스 레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835호- 민화 속 호랑이, 반전의 미학: 공포에서 해학으로 (0) | 2024.06.18 |
---|---|
834호-불교적 힙함이란 무엇인가 (4) | 2024.06.11 |
832호-<기후위기와 종교> 참관기 (1) | 2024.05.30 |
831호- ‘문화재’, 이제 ‘국가유산’으로 불러주세요 (0) | 2024.05.21 |
830호-기후위기와 종교 (0) | 2024.05.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