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민화 속 호랑이, 반전의 미학: 공포에서 해학으로
news letter No.835 2024/6/18
볼 때마다 신기한 느낌이 드는 그림이 있다. 그 그림은 조선시대 ‘산신도(山神圖)’이다. 산신도는 민화이지만 성스러운 종교 예배화의 의미를 지닌다. 마을 산신당이나 신당(神堂), 사찰의 산신각 등에 모셔져 대중들의 구복과 기원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민화 가운데서도 특별한 범주로 분류할 수 있다.
알려져 있는 산신도 중 가장 일찍 제작된 것은 18세기 후반이며, 19세기 이후 성행했고, 현재 150여 점이 남아 있다. 산신도의 도상은 대체로 깊은 산과 골짜기를 배경으로 신선과 같은 산신이 호랑이에 기대앉아 있고, 가끔 시자(侍者)들이 보좌하여 공양물을 들고 등장한다. 드물게는 호랑이를 타고 있기도 하고, 호랑이를 대동하지 않은 제왕형이나 무장을 한 신장형, 여성형, 남녀 부부형, 문인관료형, 승려형 등 다양하다.
이때 대부분의 산신도에 등장하는 중요 캐릭터인 호랑이는 산신의 사자나 화신의 의미를 지닌다. 자연계에서는 동물의 왕으로 호령했을 호랑이가 산신도에서는 마치 고양이처럼 귀엽고 장난스런 표정으로 그려진다. 그것은 민화의 전형인 ‘까치호랑이 그림[虎鵲圖]’과 연속성을 지닌다. 하지만 놀랍게도 산신도의 호랑이는 20세기 이후 일본 호랑이 그림의 영향을 받아 이빨을 드러내고 포효하는 무서운 모습의 호랑이로 변모하기도 했다.
이 경우를 제외하면, 산신도의 호랑이들은 대부분 민화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에밀레박물관 소장 산신도의 호랑이는 더욱 특별하다. 아쉽게도 그림은 너무 낡았고, 제작 연도와 출처도 미상이다. 조선 후기작이며 에밀레박물관 소장품이라는 것만 알려져 있다. 이 그림에서 산신으로 추정되는 인물 옆에 엎드려 있는 하얀 호랑이의 자태, 그중에서도 호랑이 얼굴의 표현은 백미다. 마치 세상을 달관한 경지에 오른 노인의 인자함과 세상에 대한 근심을 품어주는 편안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보다 더 따뜻한 표정을 가진 인간화된 호랑이가 있을 수 있을까?
한국미술, 그 가운데서도 호랑이 그림을 사랑하고 깊은 고찰을 한 외국인 미술사학자로 존 카터 코벨(Jon Carter Covell, 1910~1996) 박사가 있다. 그녀는 미국 태생의 동양미술사학자로, 영문으로 한국미술사에 관한 수많은 글을 발표했다. 그녀는 원래 일본사를 공부한 후 동양미술사를 전공하였는데, 뒤늦게 일본문화의 근원으로서 한국문화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깨닫고 서울에 왔다. 1978~1986년간 아들 앨런 코벨(Alan Covell)과 함께 서울에 체류하면서 이 기간 중 한국문화의 현장에서 연구한 결과를 바탕으로 1400여 편의 논문과 『한국의 문화유산』 등 5권의 영문 저서를 냈다. 코벨은 특히 한국의 호랑이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고 다음과 같이 평했다.
"한국민화는 어떻게 호랑이같은 야수에게 정 반대의 가치를 부여해 그토록 쾌활하게, 심지어 그토록 '멍청하게' 만들어놓을 수 있는 것일까? 어떻게 해서 그를 산신 같은 초월적 존재의 동반자로 그려낼 수 있었단 말인가? 실제로 이들 민화와 문학은 호랑이가 가축이나 사람도 해치고 잡아가는 그런 두려움 속, 실제상황의 시대에서 창작된 것이다. 무시무시한 맹수에 대한 존경심을 뒤집어 우스운 호랑이로 표현한 능력이야말로 한국미술사의 한 정점을 이루는 것이다.”(〈한국미술사의 한 정점, 호랑이예술(하), [김유경의 '문화산책'(8)] 프레시안, 2011.2.2.)
코벨은 가장 사실적이고 고전적인 호랑이 그림으로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의 <맹호도>를 꼽았고(심사정 위작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산신도에 나오는 호랑이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는 김천 직지사 소장 산신도의 호랑이를 들었다. 직지사 산신도의 호랑이는 투명한 맹수의 눈을 하고 있으면서도 깊이가 느껴지며, 사람처럼 보이고 온순하다. 이마와 정수리 부분에는 임금 왕자와 동격으로 보이는 둥근 원 세 줄이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직지사 소장 산신도의 그림은 에밀레박물관 소장 산신도의 호랑이와 표정이 너무 흡사하다. 정수리 부분의 동그라미 세 개도 비슷하다. 코벨이 이처럼 달관한 듯 인자한 표정의 호랑이를 조선시대 산신도 중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한 것에서 우리는 동서양을 관통하는 공감의 힘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산신도에 표현된 호랑이가 한국 고유의 문화원형에 대한 하나의 힌트를 줄 수 있을까? 우리 민족문화의 고유성을 표출하는 “문화원형”을 찾아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의 문화원형의 근원을 여러 곳에서 찾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민속문화, 그중에서도 민화일 수 있겠다.
마을 뒤 아늑한 산에서 산신이 아래를 굽어보며 마을을 보호해 준다는 산신신앙은 이제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문화 내면에 공포를 해학으로 전환하는 ‘반전의 힘’이 있다는 점이다. 물론 달관한 신선의 매개를 통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와 같은 반전이야말로 오늘날 우리 문화의 힘이 아닐까? 산신과 함께 인자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그 옆을 지키던 호랑이의 모습은 우리 민족의 관념 속 이상세계를 반영하고 있을지 모른다.
송현주_
순천향대학교 교수
논문으로 <서구 근대불교학의 출현과‘부디즘(Buddhism)’의 창안>,<한용운의 불교·종교담론에 나타난 근대사상의 수용과 재구성>, <근대 한국불교의 종교정체성 인식: 1910-1930년대 불교잡지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뉴스 레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837호-ChatGPT와의 대화가 불러온 단편적 생각들 (0) | 2024.07.03 |
---|---|
836호-종교의 텃밭, 그 언저리 걷기 (0) | 2024.06.25 |
834호-불교적 힙함이란 무엇인가 (4) | 2024.06.11 |
833호-《바리공주》에 담긴 ‘효(孝)’를 생각하며 (1) | 2024.06.04 |
832호-<기후위기와 종교> 참관기 (1) | 2024.05.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