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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840호-시간, 운동 그리고 점복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4. 7. 23. 19:26

시간, 운동 그리고 점복

 

news letter No.840 2024/7/23  

 

 

 

. 연장과 운동

 

철학적으로(그리고 아마 물리학적으로도) 물질은 연장(延長, extension)과 운동이다. 연장은 길이를 나타내고, 길이는 공간을 차지한다. 그래서 연장은 기하학적 공간에 스스로를 고정한 공간성을 의미한다.

 

운동은 움직임이다. 운동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나아가는 진행을 의미하고 이러한 진행은 시간을 의미한다. 여기에 시간에 따라 변하고 움직이는 것은 생명이다. 그래서 물질은 공간이자 시간이며, 그러한 시간은 생명이고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세상에는 물질이 아닌 것이 없다. 우리는 사람조차도 물질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물질은 고정된 공간과 약동하는 생명을 가진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물질이 운동이며, 시간이고 변화이자 생명이라는 점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물질을 물질=연장+운동, 운동=시간=생명=변화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을 물질 이야기로 시작한 것은 인간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것들을 구체화하는지 이야기하고 싶어서이고, 그런 구체성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변화함을 보기 위해서이다.

 

인간은 자신의 머릿속에 떠도는 생각들을 구체적인 사물에 고정시켜 지속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그건 공기처럼 사라져가는 시간도, 그리고 시간에 따라 사그라드는 생명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무언가를 공간에 고정하지 않고서는 불안해서 견딜 수 없는 존재일 수도 있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몸뚱이 말고는 세상에 어느 것 하나 소유하지 못한 부재(不在)감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보이지 않는 것들을 사물에 고정하는 것일까?

 

 

. La persistencia de la memoria

 

 

이 그림은 달리(Salvador Dali, 1904~1989)1931년에 그린 기억의 지속(La persistencia de la memoria)이다. 이 글에서 달리의 그림에 주목하는 것은 축 늘어진 시계들과 대조적으로 개미가 올려진 시계 때문이다.

 

물론 그림에 대한 이 글의 해석이 맞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차피 그림이란 보는 자의 몫이고 해석의 자유가 있으니, 임의대로 그림을 보도록 하자.

 

우리는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생각을 구체화하는 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것은 자신의 생각을 사물에 고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간을 사물에 고정하기 위한 방법을 고안하였고, 시계라는 도구를 만들었다. 하지만 시계는 시간이 아니다. 시계는 시간이라는 보이지 않는 관념을 사물에 고정해서 시간을 느끼기 위한 대상이다. 인간은 떠도는 생각과 우연성을 공간에 고정해 확실성으로 포획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시계와 시간은 꼭 같은 것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시계는 시간의 이미지일 뿐이다.

 

이 그림에서 달리는 시계란 인간이 생각해 낸 시간의 이미지일 뿐,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님을 알았던 것 같다. 그래서 달리는 시계들을 축 늘어지고 흘러내리는 것으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 즉 이미지뿐인 시계는 고정되지 않고 흘러내려 변할 수 있음을 고려했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늘어지지 않은 시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단에 그려진 개미들이 올려진 시계이다. 이를 <그림 2>로 확대해서 보자.

 

 

시간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과거-현재-미래로 끊임없이 줄달음치는 운동이다. 그리고 그 운동은 변화이기도 하다. 또한 그러한 운동은 생명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래서 움직이지 않는 것은 생명이라고 할 수 없다. 들뢰즈에 따르면 생명은 개미 떼처럼 우글거리는 움직임이다.

 

그렇다면 달리가 왜 시계 위에 개미를 그려놓았는지 알 수도 있을 것 같다. 그건 바로 시간은 운동이고, 그 운동의 본질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명은 그림처럼 우글거리는 개미 떼가 된다.

 

 

. 시간과 예언1)

 

 

이 이미지들은 모두 양의 간의 모형이다. 이 간의 모형은 해부학적으로도 매우 정확한데, 좌엽, 우엽, 방형엽(네모엽), 미상엽(꼬리엽), 간정맥, 간문맥 쓸개 등이 모두 모방되어 있다. 이는 정확히 양의 몸속에 고정되어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연장으로써 간의 모습을 모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들이 제아무리 정확하다고 한들, 한낱 점토판·청동 모형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간의 이미지는 모형을 넘어 생명을 고정하고 예견하는 사물로 전환된다.

 

<그림 3>은 대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바빌로니아의 양의 간 점토판이고, <그림 4>는 고대 에트루리아인2)들이 만든 청동으로 된 양의 간 모형이다. 일명 피아첸차의 간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두 모형은 동물의 내장으로 점을 치는 점복술이거나 점성술이다. 점복과 점성술 모두 미래를 예언하는 기술이다. 그렇다면 왜 바빌로니아인과 에트루리아인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간의 모형에 담았을까? 이는 시간을 특정한 사물에 담아 고정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바빌로니아 간에는 구획이 나눠지고 그 위에 무언가 쓰여 있다. 그건 점토판에 새겨진 예언의 문구이다. 이 문구들은 5가지의 징조를 예언한다. 그리고 점토판에 쓰인 5가지 징조는 모두 불길한 내용이다.

 

 

<그림 5>피아첸차 간의 탁본이다. 여기에도 구획이 나눠지고 뭔가 쓰여 있다. 이 글씨들은 달, 넵튠, 유노, 헤라클레스, 베누스 등과 같은 별자리의 이름들이다. 이 간은 천상의 지도를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점성술의 예언을 의미하고 있다.

 

여기서 두 가지의 사물은 시간을 이야기하고 있다.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시간의 궤적을 따라가는 것이다. 한편으로 고대인들은 간이 생명을 만드는 근원이라고도 생각했던 것 같다. 즉 간은 피를 만들고, 피는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빌로니아의 간피아첸차의 간은 시간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생명을 이야기한다.

 

이들은 생명을 나타내는 간의 이미지에 시간의 예언을 입혀, 자신들의 미래를 끊임없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으로 구현하고자 했다. 한마디로 이를 통해 변화하는 자신들의 운명을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이다.

 

 

. Epilouge

 

생명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생명은 관념 속에 떠다니다가 증발되어 사라지고 마는 것 같다. 그래서 에트루리아인과 바빌로니아인들은 흩어지는 생명을 고정하기 위해 간의 이미지에 생명을 새겨놓았다.

 

하지만 피아첸차의 간바빌로니아인의 간은 이미지일 뿐이다. 그것은 그저 시간과 생명을 담기 위한 그릇일 뿐이다. 그렇다고 이 글이 본질은 생명에 있고, 연장이 형식이라는 이원론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글은 연장으로서 사물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늘 변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연장으로서 사물에 생명이라는 운동을 새겨넣고, 이를 미래의 사건으로 인식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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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장의 내용은 최화선, “씌어지지 않은 것을 읽기”, 종교문화비평36, 2019을 참조하였다.

2) 에트루리아인은 로마인보다 앞서 이탈리아반도에 최초로 독자적인 문화를 남겼으며, 기원전 8세기경부터 기원전 2세기까지 북쪽은 토스카나 지방부터 남쪽은 로마에 이르는 지중해 연안 지역을 중심으로 한 중부 이탈리아의 거의 전역을 지배한 민족이다.

 

 

 

 

 

 

 

 

 

 

도태수_
한국학중앙연구원
논문으로 <근대적 문자성과 개신교 담론의 형성>, <근대 소리 매체(라디오, 유성기)가 생산한 종교적 풍경>, <물질종교, 신유물론으로 접근하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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