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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롭고 충성스러운 노비
news letter No.846 2024/9/3
약 3년 전, 한 선배님으로부터 유교 국가였던 조선의 존비(尊卑)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도록 권유받은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유교 국가’라는 명명 자체가 기독교 국가 혹은 불교 국가 등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모호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어서 존비•귀천•신분•계급 등 몇몇 개념어의 주변을 맴돌다가 결국 ‘노비제’라는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에 관한 상당량의 기존 연구를 읽으면서 어떤 쟁점들이 있었는지 대략 파악할 수 있게 되었으나, 공감하기 어렵고, 따라서 근본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노비제의 양상에 관하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존비의 질서를 철저히 고수하면서 19세기 말까지 노비제를 지속시켰던 조선의 통치자들은 유교 경서에 대한 풍부한 소양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유교적 이념으로 무장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존비의 사회 구조를 정당화하는 논리가 유교 경전에 있는 것인가? 해석의 여지는 다양하니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예컨대 차별의 논리인 예의 질서는 공자조차 기록을 통하여 추론할 수밖에 없었던 ‘대동(大同)’의 세상에서는 불필요한 것이었는데, ‘소강(小康)’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사람으로서 알지 않으면 안 되며, 천하와 국가의 다스림에도 불가결한 바라고 하였다. 이어지는 내용에서는 예가 등급을 만들고 등급에 따라 예가 정해지는 순환논리가 전개되며, 차별적 질서가 유지되어야 평화롭고 안정된 사회가 유지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자연스럽게 『맹자』에서 뚜렷이 제시되는 ‘노심자(勞心者)-노력자(勞力者)’의 분업론과도 연결되고, “예는 서인에게까지 내려가지 않고, 형은 대부에게까지 올라가지 않는다(禮不下庶人. 刑不上大夫).”(『예기』 「곡례」)는 말로 대표되는 ‘법 적용에서의 차별’과도 연결된다.1)
그러나 이러한 유교 경서의 내용이 조선의 노비제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작용한 것은 아니었고, 정당화할 필요조차 없이 조상 대대로의 풍속(祖風)이라는 이유로 지속, 강화되었다. 성격은 다르지만 구분과 차별의 논리는 동서고금의 어느 인간 사회에서도 발견되며, 평등과 공정, 정의를 강조하는 21세기 한국 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조선시대 노비의 존재 역시 당시에는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일까?
동방의 주자라 불렸던 퇴계 선생(1501~1570)은 전답과 노비의 증식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특히 자기 노비들을 양인들과 혼인시킴으로써 노비 수를 늘리고자 애썼던 결과는 그의 외아들 이준(李寯)의 분재기(分財記)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2) 율곡 선생(1536~1584)의 남매들이 부친의 재산을 갈등 없이 나누고자 모여서 회의한 기록인 「이이남매 화회문기(李珥男妹 和會文記)」에도 전답과 더불어 제비뽑기하여 노비를 공평하게 나누는 방식이 논의되고 있다.
나는 너무 좋은 시절에 태어났기 때문인지, 같은 피부색을 가진 같은 나라의 백성들을 노비라고 하여 짐승 세는 단위[구(口)]로 세고, 매매, 양도, 상속하는 재산으로 삼았다는 사실이 비단 분노와 경악을 자아낼 뿐만 아니라 아무리 이해해 보려 해도 심정적으로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공부밖에 몰랐다던 청렴한 선비,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이 타인 소유의 첩 사이에서 얻은 네 명의 얼녀(孼女)―당시 종모법에 따라 네 딸 역시 노비 신분이었음―를 돈으로 혹은 부당한 인사 청탁을 받아들임으로써 모두 속량시켰다는 연구를 보면서3) 차라리 공감할 수 있었다.
노비 중에는 사노비만이 아니라 공노비도 있었고, 이들 중에는 솔거노비만이 아니라 외거노비도 있었으므로, 노비의 삶도 일관되게 비참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일부 노비는 재산을 소유, 상속할 수도 있었고 심지어 노비를 거느릴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노예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근거도 꾸준히 지적되었다. 예컨대 제임스 팔레(James Palais)가 900년에 걸친 고려와 조선 사회를 ‘노예제 사회’라고 주장했으나, 이에 대한 반론 역시 다양하게 제기되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노비는 노동력이자 재산이었고, 세습적이라는 점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종부법(從父法)이든 종모법(從母法)이든, 또는 일천즉천(一賤則賤)이든, 조선의 노비법이 변화하는 교체기에 논의되었던 기록에서 노비는 여전히 재산이었고 노동력일 뿐이었으며, 노비는 조세와 병역의 의무가 없었으므로 국가는 필요할 때 노비를 전쟁이나 조세에 동원하려는 목적에서 속량하였다가 다시 노비로 환원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결국 노비는 동족의 동류 인간으로는 여겨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말 한 필 정도의 가격이었다던 노비가 의외로 표창이 되고 심지어 정문이 세워지기도 하여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사례들이 발견된다. 그들은 충노(忠奴)•충비(忠婢), 혹은 의노(義奴)•의비(義婢) 등으로 기록되었는데, 노비는 주인에게 목숨 바쳐 충성과 의무를 다해야 하는 존재였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의노 김동(金同)과 포항 지역에 비석이 있는 충비들의 사례를 살펴보려 한다.
『중종실록』 3년의 기사에 따르면, 김동은 왕족인 강녕군 이기(李祺)4)의 노비였는데, 연산군 대에 흥청에 속해있던 세은가이(世隱加伊)가 왕의 총애를 지극히 받자, 그의 아비가 권세를 믿고 이기의 집을 빼앗고도 부족하여 또 그 소실을 빼앗으려고 이기가 능욕했다고 거짓말로 고소하였고, 이에 연산군이 크게 노해서 이기와 김동을 잡아 가두고 죽이려던 일이 있었다. 이때 김동은 “종이 한 짓이요, 주인은 실상 알지 못하는 일입니다.”라고 하였고, 여섯 차례나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조금도 변함없이 극형을 당하고 그 주인은 죽지 않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중종 3년(1508)에 문려(門閭)를 세우고 그 집안에 요역을 면제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이어 중종 6년(1511)에는 “천한 종으로서 생사의 위급한 환란에도 주인을 죽음에서 구한” 충의를 들어 김동의 정문(旌門)을 세우라고 명한 기사가 실려 있다.
포항 지역에는 여종으로서 비석이 남아있는 세 충비의 자취가 있다.5) 먼저, 구룡포읍 성동리에는 황보(皇甫)씨 집성촌이 있고, 같은 성동리에 있는 광남서원(廣南書院)에는 충비 단량(丹良)을 기리는 비석이 있다. 단량은 세종•문종 때 영의정이었던 황보인(皇甫仁)의 여종이었는데, 계유정난으로 황보인과 그의 두 아들 및 장성한 두 손자가 무참히 살해당하자, 물동이에 어린 손자 황보단(皇甫湍)을 숨겨 이고 연고도 없는 포항 대보면 구만리 짚신골로 피신하였다. 단량은 죽기 직전 황보단에게 조상의 내력을 알려주었고, 그의 증손인 황보억(皇甫億)이 성동리로 거처를 옮겨 세거지를 이루었다. 숙종 대에 비로소 누명이 풀려 황보인 삼부자의 관직이 회복되었고, 순조 31년(1831)에 광남서원이라고 사액을 받았는데 황보 문중에서 단량의 충비를 이 서원의 뜰앞에 세웠다고 한다.
또 다른 충비 순량의 비극은 선조 시기6)의 어느 봄날, 경상도 홍해군 칠포에 있는 곡강 어귀에서 시작되었으니, 경주에 사는 한 한량이 그곳에서 빨래하는 순량의 주인 이씨 낭자의 자태에 반하여 희롱하는 시를 건냈고, 낭자는 이를 보고는 그를 질책하고 비꼬는 의미를 담은 시로 화답했던 것이다. 그 한량이 홍해군 군수로 부임한 친구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자 군수는 이씨 낭자를 체포하라고 군노사령을 보냈는데, 사령이 차마 체포하지 못하고 도망하라고 하니, 낭자는 유서를 순량에게 건네고는 곡강의 용소에서 투신하였고, 순량은 어린 아들을 남겨두고 주인을 따라 투신하였다. 인조 시기에 신임 홍해군수 조성(趙峸)이 이 이야기를 듣고, 비록 종의 신세였으나 주인을 따라 순사한 순량의 충절이 후세에 남길 만하다고 여겨 투신한 절벽의 맞은편에 순량의 비를 세워주었으니, 그 제목은 ‘충성스러운 여종 순량이 절의로 주인을 따라 죽은 연못[忠婢順良殉節之淵]’이며, 지금도 음각한 마애 비석이 남아있다.
단량이나 순량과는 달리 충비 갑연의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에도 짤막한 관련 기사가 보이며,7) 현재 영일민속박물관에 전시된 그 비문(忠婢甲連之碑)은 정조•순조 시기에 문명을 떨쳤던 박기수(朴綺壽)가 지었다. 영일현의 송씨 과부가 여관을 운영하여 생계를 꾸려나갔는데 한 힘센 불량배가 연약한 여자라고 송씨를 업신여기고 모욕하며 여관업을 빼앗자 송씨는 분하여 그자를 꾸짖은 후 형산강에 뛰어들었다. 젊은 여종 갑연은 따라 들어가 주인을 살리고 자신은 결국 주검으로 발견되었으니, 이를 본 사람들이 모두 관가로 달려가 이 사연을 알렸다. 박기수의 애달픈 마음은 마지막 시구에 드러난다.
하늘이 너를 이룰 때 홀로 살게 하지 않았으니
어찌 너로 하여금 홀로 죽게 하리오.
죽었지만 마을에 정표하고 물가에 비를 세우니
빗돌을 만지거들랑 살아있는 충비인 듯 여길지라.
그러나 이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갑연의 일을 보고받은 경상감영의 말, 즉 “이는 이른바 ‘대의와 명분을 모르면서’ 능히 생명을 버리고 몸을 죽인 것이 아닌가!”에 묻어나는 묘한 감정이다. 대의와 명분이라는 말을 모를 수는 있으나 누구보다 분명히 당시 양반들이 중시했던 대의와 명분을 실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모른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던 노비는 주인을 위하여 충직하게 목숨을 버릴 때 비로소 인간으로 대접받게 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먹이를 주고 돌보아준 주인을 위하여 놀라운 충성심을 발휘하는 반려견과 비슷하게 여겼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묘비석이 세워지고 비문이 새겨지기도 하였으니 충견보다는 좀 나았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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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禮不下庶人. 刑不上大夫.”라는 문장의 의미는 역대로 상당히 다양하게 풀이되어 왔는데, 이에 대해서는 김지수의 「전통법문화에서 禮의 법규범성과 법 범주의 역사변천」(『법학연구』 24(4), 2021), 319-325쪽을 참조할 수 있다. 다만 일반적으로는 등급에 따라 예와 형벌의 적용이 달라진다는 의미로 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이와 같이 표현하였다.
2) 이수건, 김근태 등이 퇴계 가문이 소유하게 된 재산의 유래나 퇴계의 가산 경영에 대한 실증적인 논문을 발표하였고, 관련 기사와 동영상들도 다수 발견된다.
3) 전경목의 「숨은그림찾기: 유희춘의 얼녀 방매명문」에 이에 관한 추적이 이루어져 있다.
4) 세종의 9남 영해군(寧海君) 이당(李塘)의 장남 영춘군(永春君) 이인(李仁)의 차남이다.
5) 이하 세 충비의 이야기는 이상원의 『노비문학산고』(국학자료원, 2012)를 주로 인용하였고, 경북의 지역 신문(https://www.kb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966986)과 포항을 여행한 이들의 블로그에 소개된 글(https://blog.naver.com/silverstonej1212/223006716492)도 참고하였다.
6) 이상원의 『노비문학산고』에는 선조 16년(1583)이라고 했는데, 비문에는 기해년 4월 28일의 일이라고 되어 있어 1599년 기해년이 아닐까 생각된다.
7) “旌忠婢延日私婢甲連閭, 禮曹因繡啓請之也.” 순조 30년(1830) 11월 21일 3번째 기사.
이연승_
서울대학교
논문으로〈서구의 유교종교론〉, 〈이병헌의 유교론: 비미신적인 신묘한 종교〉, 저서로 《동아시아의 희생제의》(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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