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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844호-관 속의 드라큘라와 버려진 성경책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4. 8. 20. 18:15

 

관 속의 드라큘라와 버려진 성경책

 

news letter No.844 2024/8/20

 

 

오랜 기억이 되살아난 건 사진 한 장 때문이었다. 2년여 만에 만난 아들과 사진첩을 함께 보다가 나의 어린 시절 교회 주일학교 사진을 발견했다. 국민학교 4학년, 주일학교 분반 야유회 단체 사진이었다. 얼굴만 기억나는 다섯 명의 친구들과 함께 김순종 선생님이 계셨다. 다른 모든 기억은 희미하지만, 김순종 선생님은 한 권의 성경책과 함께 또렷이 기억난다. 사연은 이렇다.

 

1982년 여름, 나는 어머니와 함께 동네 극장에서 영화 한 편을 보았다. 내가 먼저 보자고 했는지 어머니께서 보자고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머니의 일이 끝난 후 어두워진 저녁 무렵 영화관을 찾았다. 드라큘라를 소재로 한 한국 영화였다. 잊히지 않는 장면을 떠올려 검색해 보니 어렵지 않게 영화 정보를 찾을 수 있었다. 이형표 감독의 <관속의 드라큐라>였다. 한국영상자료원의 정보에 따르면, 1982625일 스카라 극장에서 개봉했고, 강용석, 박지훈, 박양례 등이 출연했다. 연령제한은 국민학생 관람 불가였는데, 읍내에 딱 하나 있던 시골 극장이었고, 매표소 이모도 아는 사이여서 별 제재 없이 드나들었던 기억이 난다.

 

 

 

영화를 리뷰한 개인 블로그 몇 개를 찾았는데, 영화평은 그리 좋지 않다. 영화의 구성은 <드라큘라> 원작 소설을 따르지만, 내용이 만화 같고 허술한 곳이 많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특히 드라큘라 역에 대한 지적이 있는데, 당시 유명했던 영국의 간판 배우 크리스토퍼 리가 등장한다고 홍보했지만, 실제로는 켄 크리스토퍼라는 생소한 배우가 드라큘라 역을 맡았다고 한다. 알고 보니 그는 당시 주한미군에 근무하던 미군 중사였고 켄 크리스토퍼라는 이름은 가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가 지루하거나 재미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비교적 영화평에 까다롭지 않은 편이기도 하지만, 원작 소설을 나름 한국식으로 토착화한 면이 있다. 특히 드라큘라를 물리치는 장면에서 스님이 드라큘라와 최종 대결을 펼친다는 설정은 참신하다.

 

마침 유튜브에서 영화 전편을 볼 수 있었다. 다시 보니 국민학교 시절의 공포는 전혀 없고, 심각한 분위기의 코믹물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1982년 당시, 해가 떨어진 어두운 저녁에 보았던 영화는 무척 무서웠다. 선원들이 모두 죽어 있는 배 한 척이 항구로 들어오는 푸르스름한 색감의 첫 장면과 곧이어 나오던 붉은 손 글씨 자막부터 공포스러웠고, 중간중간 드라큘라가 등장할 때는 앞열 의자 뒤편에 숨어 고개를 숙이고 눈을 질끈 감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다시 보니 웃기지만, 드라큘라가 혈액원에서 얻은 혈액 봉투를 음료수 마시듯이 빨아먹는 장면도 당시에는 공포스러웠다.

 

어머니와 함께 영화를 다 보고 나왔을 때, 당시 나는 가시지 않는 공포와 두려움으로 어머니께 성경책을 사달라고 졸랐다. 영화의 한 장면 때문이었다. 여주인공은 드라큘라에게 물렸지만 아직 드라큘라로 변하지 않았고, 그저 몸이 아픈 것으로 여겨져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그때 성당 신부님께서 병문안을 오셔서 성경책을 선물했는데, 여주인공이 그것을 받고 기겁하면서 발작을 일으켰다. 이 장면이 뇌리에 남았던 나는 영화가 끝나고 어머니와 함께 서점에 들러 작은 성경책 한 권을 샀다. 그리고 그날 밤 성경책을 꼭 껴안고 비로소 잠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 일이 있은 후 교회에 갔을 때, 분반 공부 시간에 이 이야기를 했었다. 그리고 그다음 주에 김순종 선생님께서는 어른들이 보는 큰 관주 성경책을 나에게 선물로 주셨다. 속지에는 한 면 가득 편지와 함께. 책장을 찾아보니 그 성경책이 그대로 있었다. 그때의 감정들이 고스란히 되살아왔다.

 

 

며칠이 지난 아침,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 아니 엄마가 사주셨던 그 작은 성경책은 어디 있지? 서둘러 책장 이곳저곳을 살펴봤지만,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 없었다. 어렴풋이 언젠가 이사하던 날, 수많은 성경책들을 모두 챙기는 게 불필요하다고 느꼈던 것이 기억났다. 그리고 몇 권을 버렸던 것도. 이삿짐을 싸는 분주함 속에서 같은 유형의 두 성경책을 두고 나는 별다른 고민 없이 큰 성경책을 택했던 것 같다. 작은 성경책, 드라큘라의 공포가 묻은 성경책보다 선생님의 관심과 따뜻함이 느껴졌던, 메모가 적혀 의미 있던 관주 성경책이 선택되었고, 작은 성경책은 폐지 모음으로 분류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버려진 성경책이 어머니께서 주신 유일한 책이었다는 게 번뜩 자각되었다. 하지만 그 성경책은 이제 없다. 아뿔싸! 이런 철없는 짓을 하다니. 그것도 그 중요한 것을 내 손으로 버렸다니. 아직 어머니는 곁에 계신다. 그래서였을까. 그 소중함을 미처 인식하지 못한 것이.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내가 8살 때 사주셨던 이순신 장군 위인전기는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데 말이다. 상실은 애착을 남긴다. 큰 후회를 남긴다. 하지만 이내 이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김순종 선생님의 성경책에 어머니의 성경책도 함께 있는 것이겠지.

 

이렇게 의미는 어떻게든 발견된다. 가치와 의미의 내용은 변하지만, 인간은 언제든 어디서든 무엇으로부터든 의미와 가치를 찾는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의미를 찾는 행위는 곧 종교적 행위이고, 그런 행위와 인식을 지닌 인간은 종교적 인간일 수밖에 없다. 엘리아데는 로케(Rocquet)와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바로 여기, 정해진 리듬과 주기가 우리에게 주어진 이 우주 안에서, 인간적 조건을 받아들입니다. 우리의 인간적 정황을 이 근본적인 조건에 근거하여 받아들이는 것이에요. 겉모습은 어떻든지, 근본적 인간은 삶의 의미를 논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종교적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 미로의 시련(Ordeal by Labyrinth) 김종서 역, 189

 

여기에서 우리란 일차적으로 현대인을 의미하지만, 결국엔 인류 전체를 의미하고, ‘근본적 인간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을 뜻한다. 엘리아데는 시대적 맥락을 따라 종교인(religious man)과 종교적 인간을 동의어로 사용하기도 하고 구별하기도 한다. 성과 속(The Sacred and the Profane, Harcourt, Inc., 1959)의 마지막 부분인 근대 세계에서의 성과 속(pp. 201-213)”에서 이것이 잘 드러나는데, 두 종류의 성과 속한글판에서는 이 두 용어가 모두 종교적 인간으로 번역되어 혼동이 있지만, 영문판에서는 두 용어가 분명히 구별된다.

 

우선, 엘리아데가 볼 때 원시사회와 고대문명의 고대인은 그 자체로 이미 종교인이면서 종교적 인간이다. 하지만 현대인의 관점에서 종교인은 통상 제도 종교에 몸담은 사람으로서 이른바 세속화된 비종교인(nonreligious man) 및 무종교인(the irreligious)과 상반된 개념이다. 반면, 종교적 인간은 종교적 본성을 지닌 인류 전체를 뜻하므로 여기에는 현대적 의미의 종교인과 비종교인 모두가 포함된다.

 

이런 맥락에서, 비록 과거 인류가 지녔던 가치가 오늘날에는 변했어도, 현대인을 포함한 인류 전체가 여전히 우주적 리듬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고 엘리아데는 강조한다. , 고대인이 낮과 밤, 빛과 어둠에 부여했던 가치는 오늘날 사라졌어도, 우리 모두는 여전히 낮과 밤, 빛과 어둠의 교차라는 우주적 리듬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형태로든 인간은 그러한 우주적 리듬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존재라는 측면에서, 모든 인류는 시대를 가로질러 결국 근본적으로 종교적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엘리아데의 어법을 따른다면, 현재의 나는 현대적 의미의 종교인이 아니다. 더 이상 제도 종교에 몸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종교적 인간이다. 내가 종교인이던 시절의 성경책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관 속의 드라큘라와 연결된 버려진 성경책으로부터 어머니와 관련된 삶의 의미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버려진 성경책이야 이제 어쩔 수 없지만, 곁에 계신 어머니께 잘해 드려야겠다. 어머니께서 아직 함께 계셔서 천만다행이다.

 

 

 

 

 

김재명

건양의대 의료인문학교실

최근 저서로 죽음학교실(공저), 세속주의를 묻는다(공저)가 있으며, “보건의료에서의 종교와 영성의 역할에 대해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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