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의례화된 <마태수난곡>”에 대한 단상

                

                       
                              

 2014.11.18

 

 

 

        최근 국내에 흥미로운, J.S. 바흐의 <마태수난곡> 공연 DVD가 출시되었다. 이는 2010년 4월 11일 베를린 필하모니 홀에서 사이먼 래틀(Simon Rattle)의 지휘로 연주된 공연 실황을 담은 것이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공연 DVD 자체는 이전에 이미 출시된 적 있는데, 최근에 블루레이/DVD 합본에 한글 자막이 첨부되어서 다시 출시되었다). 그런데 이 공연은 보통의 <마태수난곡> 공연과는 조금 달랐다. 원형의 무대에는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좌석 외에 긴 직사각형 모양의 테이블과 작은 사각형의 의자 같은 구조물이 놓여있었고, 복음사가를 비롯한 솔로이스트들은 노래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수난곡을 ‘연기’했다. 합창단 역시 어느 때에는 예수의 제자들을, 어느 때에는 예수의 죽음을 부르짖는 군중을 연기하며 무대 위와 관객석 사이를 오가며 노래했다. 이제까지의 <마태수난곡> 공연이 주로 귀로 ‘듣는’ 체험에만 집중되어 있었다면, 이 공연은 ‘듣고’ ‘보는’ 체험, 나아가서 관객들 사이로 들어가 관객들 역시 이 드라마의 일부로 끌어들이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이 공연을 연출한 피터 셀라스(Peter Sellars)는 이전에 모차르트 오페라의 파격적 연출로 물의를 일으킨 적 있으며, 소위 괴짜 연출가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이 <마태수난곡> 공연을 ‘무대연출한(staging) 것’이 아니라 ‘의례화(ritualisation)’했다고 말했다. 이는 그가 의도한 것이 단지 수난곡의 극화, 오페라화만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게 해주는 말이다.

 

 

        <마태수난곡>은 복음사가 마태가 쓴 복음서, 즉 마태복음에 따라 최후의 만찬 무렵부터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까지를 그린 음악이다. 그리스도교에서 예수의 수난은 일찍부터 음악과 연극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재현되었으며, 그 이전에 이미 의례 안에서 복음서를 읽는 사제의 목소리를 통해 재현되었다. 하지만 피터 셀라스가 수난곡을 의례화하고자 한 시도에서 굳이 이 예술의 기원에 의례가 있었다는 일반론, 기원론을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셀라스의 이 ‘의례화된’ 수난곡에서 예수를 연기하는 자가 예수의 목소리를 노래하는 베이스 크리스티안 게르하허(Christian Gerhaher)가 아니라, 복음사가를 노래하는 테너 마크 패드모어(Mark Padmore)라는 점이다. 물론 바흐의 원곡에서의 음악적인 비중 역시 예수보다는 복음사가에 집중되어있다. 그러나 이를 연출하면서 예수의 역할을 예수 역의 가수가 아닌 복음사가에게 연기하게 한 것은 셀라스의 통찰력이었다. 합창석보다도 더 위 관객석의 한 부분에 고정된 채, 노래할 때만 잠깐씩 보이고 들리는 예수의 존재는 이 의례의 주인공으로 부각되지 않는다. 대신 이 의례에서 복음사가는 인간 예수가 겪는 갈등과 고통을 노래와 연기를 통해 온 몸으로 구현해낸다.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을 안아주는 것도, 유다의 배신의 입맞춤을 받아주는 것도, 마지막에 무대의 한 가운데 놓여있는, 최후의 만찬의 식탁이었던 그러나 이제는 무덤 속 관이 된 나무 탁자 위에 누워있는 존재도 복음사가다.

 

 

        이러한 연출은 이 ‘수난곡/의례’의 구도에 대해 시사해주는 바가 있다. 의례는 신적인 존재의 이야기를 지금 이 순간에 재현한다. 그러나 그 재현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매개를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수난곡에서 그 매개를 담당하는 존재는 복음사가다. 우리가 이 의례에서 기억하는 예수는 복음사가의 인간적인 시선을 통해 제시된 예수이다. 피터 셀라스는 예수를 무대 밖에 위치시키고 그에게서 일체의 연극적인 요소를 배제시킴으로써 그가 이 수난극이라는 매체 바깥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암시한다. 동시에 복음사가에게 예수의 모든 인간적인 감정과 행위를 부여함으로써 그가 실질적인 이 이야기의 주체임을 보여준다. 그러기에 복음사가는 이 수난곡/의례에서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매개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이 의례에서 기억하는 바로 그 신성한 존재 자체이기도 하다.

 

 

        20세기 중반의 <마태 수난곡>의 명 해석자 중 한명으로 꼽히는 칼 리히터(Karl Richter)처럼, 이 수난곡의 핵심은 예수의 신성을 뒤늦게 깨닫고 고백하는 군중들의 짧지만 강렬한 합창, “Wahrlich, dieser ist Gottes Sohn gewesen”(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에 담겨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에게는 복음사가가 예수와 동일시되며, 신성한 예수의 목소리는 무대 밖으로 밀려난 채 인간적인 고뇌와 갈등, 비통함만이 부각되는 듯한 피터 셀라스의 이 해석이 못마땅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복음사가라는 매개 없이, 그리고 그의 언어를 다시 음악이라는 매체로 놀랍게 구현한 바흐 없이 과연 우리가 감히 신성이라는 것을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언어와 움직임과 소리의 옷을 입지 않고는 종교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 반 델 레우의 말은 다시 음미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피터 셀라스의 의례화된 <마태수난곡>은, 복음사가의 언어와 움직임과 그리고 소리 - 바흐가 만들어낸 그 소리, 이러한 매체 없이 종교가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최화선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hschoe72@gmail.com
최근 논문으로 <이미지와 응시:고대 그리스도교의 시각적 신심(visual piety)>, <후기 고대 그리스도교 남장여자 수도자들과 젠더 지형>, <기억과 감각: 후기 고대 그리스도교의 순례와 전례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