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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다”: 종교학의 스펙에 대한 두 번째 단상




2015.7.7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의 그 긴 이야기 중에서 가장 강렬하게 남은 것은 그 대사 한 마디였다.

난...
더 이상 내가 아니다.
적어도 이전의 내 모습은 아니다.

 

 

23살의 의대생 에르네스토 게바라의 ‘도전’은 단순한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젊은이의 도전정신이 버무려진 것이었다. 분명 어떤 ‘변화’를 꿈꾸는 것이었지만 그게 어디로 향할지는 모르는 그런 미지의 것이었다. 훗날 라틴아메리카의 혁명을 이끄는 체 게바라가 될 이 젊은이는 ‘라틴 아메리카와의 만남’을 통해서 어떤 앎을 획득하였고, 그것으로부터 과거의 자신과는 전혀 달라진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배움, 앎은 무엇이었을까?

 

 

배움에 대한 인상적인 이야기 중의 하나는 “덕virtue은 가르쳐 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프로타고라스와 소크라테스의 대화였다. 프로타고라스는 당대 뛰어난 변론술과 수사학 선생으로서 그럴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 소크라테스는 예의 ‘질문법’을 통해서 덕과 그 부분으로 이야기되는 정의, 경건, 지혜, 절제를 관련시켜서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을 논파하며 덕이 전문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즉 이성을 통한 사유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프로타고라스는 소크라테스와의 대화를 통해서 덕의 교사로서 자신이 부적격자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는데, ‘프로타고라스 딜레마’라는 이야기로 그 고백을 증명해 내고야 말았다(프로타고라스와 제자 에우아틀로스 사이의 수업료 지불 재판).

 

공통적으로 말하는 ‘앎’이란 건, 소크라테스에게는 ‘지행합일’로 인도하는 그러한 앎이란 건 ‘존재론적 변형’을 불러오는 것이다. 사사키 아타루가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에서 ‘읽으면 달라진다’고 설파한 앎과 행위의 ‘신비적 고리’는 앎을 통해서 주체 자체가 변형됨으로써 기존의 행위를 규제하는 문법이 사라지고 새로운 문법이 들어섬으로써 자연스레 행위의 변화가 뒷받침되는 것이다. 종교적 영역에서 ‘회심’이라 부르는 것과 비슷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연애에서 ‘사랑에 빠지다’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과 비슷할지도.

통상의 배움에서 우리는 ‘지식’을 획득하고 그것으로 다른 이를 가르칠 수도 있고, 그 지식을 토대로 다른 더 고난이도의 일을 수행할 수 있게 되리라 생각한다. 그때의 앎은 ‘존재론적 변형’보다는 사회적 문화 자본의 확장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수준의 앎에서 종종 이런 진술을 만나게 된다. 명백하게 소크라테스에 대한 반론으로, ‘아는 데, 잘 안 되네’,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물론 소크라테스류의 주장으로 보건대 ‘그건 제대로 안 게 아니다’라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


종교연구자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그는 뭔가를 가르치기 이전에 ‘어떤 덕’을 알아내는 것인가? 좀 더 영화 속 대사에 비추어 보면, 어떻게 종교학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나’가 다른 존재라고 선언할 수 있는가? 다른 이는 모르겠지만 내 경우 예전에 이에 대한 고민으로 짧게 썼던 ‘종교학의 스펙’이란 글에서 ‘스펙 제로 영역의 새로운 상상력’에 기대를 걸고 있었고, 그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사다리의 비유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언급한 바 있다(《비평》 10호, 278쪽). 새로운 지평에 올라섰을 때 이제 그 지평에 올라서는 데 사용한 사다리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니 얽매이지 말고 걷어찰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다.


 

‘종교’ 개념의 한계를 숙고하면서 종교연구자의 물음이 ‘종교’를 묻는 것인가 ‘인간’을 묻는 것인가 다시 묻게 되었다. 그리고 ‘종교학의 종말’ 혹은 ‘종교의 종말’, 그러한 것들의 사망선고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해답을 찾는 길은 하나가 아닐 것이고, 그것은 어떤 전문가가 배우려는 자에게 전수해 줄 수 없는 그 무엇이라고 여겨진다. 그 질문들 안에서 스스로 발견해야 하는 일종의 ‘소명의 탐색’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종교학의 여행을 통해서 분명 나도 체Che의 대사를 되뇔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 비트겐슈타인의 사다리 이야기가 계속 떠오른다. 최초의 ‘종교학의 스펙’에 대한 물음에 대한 귀결점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주 천연덕스럽게 결코 여기가 ‘그’ 자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 주장이 비록 고집스럽고 무모해 보인다고 해도. 그렇게 체득하게 된 덕은 어떠한 실천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앎’은 여전히 존재 지평의 변형이고, 과거의 자신과의 결별적 화해이며, 세계의 변화이다. ‘흔들리는 대지’ 위에서 세계는 탄생하며, 그렇게 聖이 현현되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으리라. 소크라테스가 덕을 통해서 정의와 경건을 연결했듯이, 세계의 변형 논리 안에서 세계의 질서는 聖을 피워 올리는 것이 아닐까 하고. 나는 거기에서 지금 무모하게 ‘종교 밖’의 인간을 바라보고 있다고 고집스럽게 믿고 있다.

 

 

 



심형준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zeekfrid@gmail.com
논문으로 <종교 개념의 적용과 해석에 대한 연구>, <섹슈얼리티의 성스러움: 금기 너머의 더럽고 위험한 성스러움과 정상(正常) 섹슈얼리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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