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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375호-회귀와 반란의 몸짓, 또는 소외의 몸짓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6. 8. 24. 16:04

 

 

회귀와 반란의 몸짓, 또는 소외의 몸짓

(정진홍, 《지성적 공간 안에서의 종교: 종교문화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위하여》에 대한 서평)




2015.7.14

 

 

벌써 3년 6개월 전의 일이다. 2011년 가을(10.8~11.5)에 나는 5주 동안 매주 토요일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서울역사박물관 강당 맨 앞줄에 앉아 있었다. 교육부에서 후원하고 한국연구재단에서 주최하는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4기 10강으로 진행된 정진홍 교수의 강좌 <지성적 공간 안에서의 종교: 종교문화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위하여>의 토론자 가운데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현재 서평을 쓰려는 책과 똑같은 제목의 강의였다. 5주 동안 매주 상당한 분량의 원고가 책자로 묶여 배포되었고, 단행본 분량의 강의가 4주 8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마지막 5주는 토론자 3명의 질문과 강연자의 답변, 그리고 청중질문으로 이어졌다. 대략 200명 이상의 다양한 청중이 매주 함께했고, 특히 정진홍 교수와 많은 세월을 공유했을 법한 연배의 참여가 두드러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석학인문강좌 40권으로 출간된 현재의 책에도 이때 오간 토론과 답변이 모두 실려 있다.

 

당시 익산에서 다소 느슨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나에게 매주 서울로 올라와 강의에 참여하는 것은 무척 신나는 일이었다. 제사보다는 젯밥이라고, 사실 가장 좋았던 것은 강의 후에 이어진 뒷풀이 모임이었다. 정진홍 교수의 제자들이 참여하여 매주 토요일 저녁 이야기꽃을 피운다는 것은 요즘 같은 시대에 흔치 않은 일이다. 그런 기회가 또 있을지 모르겠다. 정진홍 교수는 20~30년 동안 많은 나의 선후배의 ‘학문적 중심’이었다. 중심은 언제나 회귀할 수 있는 고향이지만, 동시에 우리는 언제나 중심으로부터의 소외, 중심에 대한 반란을 품어야 자기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반란과 소외를 통해 중심과 자기 사이의 거리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 거리로 인해 중심은 회귀와 소외라는 이중적 구조 안에 들어올 수 있다. 아마 정진홍 교수에게 종교학을 배운 제자들은 대부분 이러한 구도 속에서 정진홍 교수와 관계를 맺었을 것이다. 5주 동안 우리는 중심과 자기의 거리를 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진홍 교수는 언변이 좋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정진홍 교수는 인문강좌가 열린 5주 동안 예전과 다른 긴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는 종교학, 종교, 일반 시민이라는 여러 겹의 청중을 상대로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했으리라 생각했다. 다시 말해서 종교를 이야기한다는 것의 어려움을 강단 위에서 5주 동안 몸소 보여준 것이다. 이 책에는 원래 강연에는 없던 원고가 하나 들어 있다. 마지막 제5강인 “당대 종교문화에 대한 비판적 인식: 오늘, 우리 종교문화의 모습”이 그것이다. 이 원고는 2014년 9월 20일에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이라는 강좌에서 <종교와 역사: 오늘의 한국종교>라는 제목으로 강연된 바 있다. 공교롭게 당시에도 나는 토론자로 참여한 바 있다. 그때는 오히려 젊은층의 참여가 더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나에게 단순한 책 이상의 것이다. 책의 문자들이 구술되는 현장을 이미 경험해 버렸기 때문이다.

 

 

 

책의 ‘머리말’을 보면 왜 이 책의 제목이 ‘지성적 공간 안에서의 종교’인지를 알 수 있다. 저자는 종교인이든 아니든 모두가 ‘종교적으로’ 종교를 이야기하고 있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있다. 즉 신념 또는 신앙에 따라 종교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도저히 종교에 대한 지적 담론이 형성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제1강에서 ‘종교를 정의하는 일’에 대한 질문이 이어진다. 그는 상식적인 자명한 종교 정의, 특히 세계종교 개념에 의해 ‘지워진 종교’와 ‘치워진 종교’를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그는 종교를 역사와 문화 안에서 살피는 ‘거리 두기’ 또는 ‘거리 짓기’를 방법을 제안하면서, ‘종교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무엇을 얼컬어 종교라 하는가’를 묻자고 말한다. 이렇게 볼 때 비로소 종교가 사실은 ‘물음과 해답의 문화’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제2강에서는 인간의 존재 자체가 물음을 낳고, 인간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일상과 비일상의 차원으로 세계를 구조화하고, 나아가 초월신비신성의 범주를 이용하여 문제를 풀어나간다고 말한다. 그런 초월적 범주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물음과 해답의 도식이 바로 종교인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종교는 적합성을 잃고, 인간의 실존과는 관계 없이 자동적이고 기계적인 물음과 해답의 도식을 강요하기도 한다. 종교가 공식이나 주문의 차원으로 하강하면서 적합성을 잃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종교는 ‘병든 언어’라고 비판한다. 그런데 적합성을 잃은 병든 언어는 생존을 위해 필연적으로 종교적이지 않은 다른 수단에 의존한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병든 언어의 정치화’가 낳는 폐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힘과 공동체’에 관한 제3강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저자는 종교공동체는 물음과 해답에 대한 감동공동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감동의 경쟁은 필연적이고, 따라서 감동의 정오(正誤)에 대한 판단이 생겨난다. 그런데 감동의 정오는 보통 힘의 논리에 의해 판가름난다. 종교공동체는 자기만의 신화와 의례를 통해 스스로를 ‘절대적인 물음과 해답’으로 정립하려 한다. 이처럼 종교는 그냥 힘이 아니라 절대적인 힘을 추구한다. 이렇게 해서 종교가 서서히 일상 밖으로 빠져나가 스스로 비일상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제4강은 이러한 종교의 절대적 경직을 이완시킬 해법에 대한 모색이다. 저자는 개념적 실재와 경험적 실재를 구분하면서 개념으로 경화된 종교를 다시 경험의 자리로 되돌려 살피려는 시도를 전개한다. 비일상으로 날아가버린 종교에게 일상의 뿌리를 다시 들려주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종교의 시공을 역사문화적으로 세밀히 재성찰할 필요가 있다. 다시 이야기는 원점으로 돌아간다. 종교인이든 무신론자든 반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너무나 종교적인 정의에 입각하여 종교를 이야기한다. 종교언어로 종교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종교 이야기가 종교적인 이야기의 자리에서 순환한다. 종교를 이야기할 수 있는 ‘지성적 공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현재 우리의 종교 이야기가 갇혀 있는 ‘종교적인 미로’에서 탈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에게 미로 안에서 정직하게 수많은 실로(失路)을 겪으라고 권한다. 실로 없는 수직적인 비상 역시 ‘해답의 절대화’를 초래할 뿐이기 때문이다. 지성은 반복적 실로를 통해서만 얻어진다.

 

그렇다면 이러한 논의에 입각하여 현재 한국사회의 종교문화를 진단한다면 어떠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제5강의 이야기는 ‘오늘의 종교문화’에 대한 묘사와 제언이다. 저자는 현재 한국의 종교들이 ‘다문화종교의 상황’에 놓여 있는 ‘소외공동체’라고 이야기한다. 다른 종교들과 견주면서 종교들이 제각기 자기 자리에서 극심한 자기만의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소외의 출구로 종교들은 거대화극단화상품화를 추구하고, 이러한 생존 격률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정치와 타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제 종교는 생존을 위해 무엇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만 같다. 심지어 자기를 포기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극대화를 추구하든 극소화를 추구하든, 자기만의 은어에 갇히든 자기의 종교언어를 포기하고 영성과 힐링으로 변형되든, 현재 모든 종교의 반응 양태는 모두 문화적 소외의 산물이다. 소외가 내향하면 종교는 ‘우리끼리의 이야기’를 낳고, 소외가 외향하면 종교는 누구나 살 수 있는 상품으로 변형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저자는 당대 종교가 겪는 소외 구조에 대한 현상학적 접근을 제안한다. 소외 의식이 낳는 새로운 종교성의 출현을 기다려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종교에 대한,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가 있다면, 종교의 창조적 힘이 새로운 종교문화의 출현을 초래할 것이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은 이 책에 대한 간략한 스케치다. 이 책은 ‘종교적인 공간’이 아니라 ‘지성적인 공간’ 안에서 종교를 이야기하는 방법에 대한 모색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는 당대 종교 문화를 ‘지성적 공간’ 안에 옮겨 서술해 보려는 실험적 시도까지 전개하고 있다. 최근 10년 동안 정진홍 교수는 거의 4~5년 주기로 《열림과 닫힘: 인문학적 상상을 통한 종교문화 읽기》(2006), 《정직한 인식과 열린 상상력: 종교담론의 지성적 공간을 위하여》(2010), 《지성적 공간 안에서의 종교: 종교문화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위하여》(2015)를 연속적으로 펴냈다. 이번에 출간된 책은 10여 년 동안 일관되게 전개해온 그의 사색의 결실이라고 생각한다. 닫힌 종교를 열린 종교로 전환하는 길의 모색, 종교의 수많은 주제에 대한 자신의 인식과 상상력을 정직하게 열어보이려는 시도, 종교라는 물음과 해답의 문화가 부딪히는 역사적 행로에 대한 구조적 서술. 독서를 통해 정진홍 교수가 이렇게 다듬어 놓은 ‘이야기 중심’으로 회귀하고, 다시 그 중심과 자기의 거리를 재며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 후학의 몫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그것이 소외의 몸짓이든 반란의 몸짓이든 말이다.

 

 

※이 글은 《대한민국학술원통신》제263호(2015년 6월 1일)에 실린 글을 전재한 것이다.

 

 

 


이창익_
한림대학교 생사학연구소 HK연구교수
changyick@gmail.com
주요 논문으로 〈신종교는 언제 종교가 되는가: 통일교회에서 메시아의 죽음이 갖는 의미에 대해〉, 〈소리의 종교적 자리를 찾아서: 시, 축음기, 그리고 카세트테이프〉 등이 있고, 저서로는 《조선시대 달력의 변천과 세시의례》 등이, 역서로는 《종교, 설명하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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