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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세대를 위해 고민하고 아파했던 어른들
: 어지러운 선거철에 이회영을 생각한다
2016.4.12
선거일이 내일이다. 인간사회의 건강한 가치가 실종된 선거판의 추한 모습들로 인해 정치에 대한 무관심은 정치혐오로 이어지고 있다. 말로는 국민을 위한다고 떠들면서 자기 이해만을 위해 이합집산하는 정치가들 말고, 진정으로 다음세대를 고민하고 준비하는 정치가를 찾기 힘든 현 상황을 나는 솔직히 쳐다보기 싫은 심정이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에 괴롭다. 그렇다고 딱히 할 수 있는 일도 없으면서 말이다.
얼마 전, 대순진리회에서 하는 정월 대보름 치성(양력 2월 22일 새벽)에 참석했다. 영대에서 치성에 참여하거나 관찰하는 일은 외부인에게는 허용되지 않는데, 백경언 교감이 몇 달 동안 노력한 결과로 내게는 허용되었다. 더욱이 앞에서 두 번째 줄에 서서 제의 과정을 다 관찰할 수 있었다. 그곳에 있는 동안 친절하게 안내를 하고 설명을 해주었던 여성분은 입도 20년 동안 제사상이 진설되는 방에 들어 올 수 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24시 예식이 시작되기 전, 달밤에 한복을 입고 전국에서 모여든 6000∼7000명으로 추산되는 신도들이 줄서 있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대부분의 신도는 예식 진행을 직접 볼 수 없다. 그래도 예식에 참여해 치성을 드린다.
그곳에서는 한복을 꼭 입어야 하고, 제의가 시작 되면 안경 착용도 허락되지 않는다. 관찰자인 나는 하나라도 머리에 담아두려고 절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머리를 들고 있었지만 그곳에 참여한 모든 분들은 진설과정부터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제의 형식은 유교적이다. 강증산 상제를 중앙으로 좌우에 많은 신격들이 모셔진다. 그곳에 진설된 음식들은 제의에 참여한 모든 신도들이 나누어 먹는다. 제의가 끝나고 그 방을 벗어나오기 전, 그곳을 책임지고 있던 여자 분이 나에게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보아야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라고 한 말씀을 하셨다.
그곳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2월 22일 월요일의 대종교 제107주년 중광절(重光節) 행사(10:30-14:30)에 참여했다. 신도들 40여 분, 방문객 20여 분이 모여 치러진 조촐한 행사에 나는 저절로 숙연해졌다. 그곳에 갈 때면 언제나 많은 어른들이 떠오르고 숙연해진다. 그날 행사에서는 대종교의 창시자인(1908) 홍암 나철(弘巖 羅喆)선생의 행적을 기리고, 후손들이 대종교의 정신을 잘 받들지 못하고 있음을 반성하였다.
나는 그곳에서 한국의 교육환경을 떠올렸다. 현대화에 집착하는 서양 중심적 사고로 인해 우리는 미국의 독립정신과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정신은 교육하고 알리려 노력하면서, 정작 대종교인의 독립운동과 저항정신은 거의 알려고도 하지 않고, 제대로 분석·평가하려고도 하지 않고 있다.
나는 여기에서 무정부주의자였던 우당 이회영(友堂 李會榮, 1867-1932)을 잠시 생각해보고 싶다. 그는 대종교의 창시자인(1908) 홍암 나철(弘巖 羅喆)의 결사조직과 연락하여 을사오적 저격(1906)을 시도했으며, 신채호, 김구, 이동휘, 이동녕 등과 비밀조직 신민회(新民會, 1907)를 창설했다. 조선의 명문세족이었던 그는 학문과 교육에 힘쓰며, 무력항쟁을 할 수 있는 기지를 만들기 위해 가문의 재산을 정리하여(당시 화폐로 600만 환, 현재가로 600억 원이 넘는다고 한다) 가문 전체(6형제와 가솔 40여명)를 데리고 만주로 떠나 경학사(耕學社)를 만들고, 조국의 탈환을 위한 신흥(新興) 무관학교를 세운다.(이덕일, 『아나키스트가 된 조선 명문가, 이회영과 젊은 그들』, 역사의아침, 2009, 60-61쪽.) 공동의 우애와 공동 소유의 정신에 따른 이상 농촌의 건설은 그 후 그를 무정부주의로 가게 하는 경험적 계기가 된다. 그는 1919년 북경으로 이주하여 중국에서의 독립운동과 상해임정 수립에 참여한다. 부드럽고 한없이 베푸는 그의 성품은 시대의 조류에 자극받아 그로 하여금 일상의 생활양식을 비롯해 인류의 정치제도를 성찰하게 하고, 이상적 건국방략을 모색하게 한다. 그는 신채호를 만나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러 선진국의 현 정치제도를 그대로 답습, 모방하여 가지고는 자유평등의 사회 즉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인간 생활 전반에 걸쳐서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가 실현될 수 없지 않겠는가?”, “그들의 정치를 모방한다면 부자유와 불평등에 의해 불만, 불평, 억압이 생겨나는 저주스러운 현대사회의 결함을, 새로이 독립할 우리나라에서도 반복하게 되지 않겠는가?”(李丁奎, 『友堂 李會榮 略傳』, 을유문화사, 1985, 75-76쪽.)
이회영은 1920년 서유럽으로부터 러시아를 들렀다가 북경으로 들어온 조소앙(趙素昻)을 만나 혁명의 경과와 득실을 듣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냉혹 무자비한 독재 정치가 만인에게 빈부 차이가 없는 균등한 생활을 보장한다는 이상을 성취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처럼 자유가 없는 인간 생활이 가능할까? 그리고 인간 생활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들이 말하는 평등 생활이 하루에 세 끼 밥을 균등히 주는 감옥생활과 무엇이 다른가?” 조선 후기와 일제의 어두움을 절실히 경험한 이회영은 러시아의 정치는 “새 왕조가 세워지면 전날의 천민이 귀족이 되듯이 신흥 지배계급이 나타날” 수 있다고 보게 된다. 독립 후 다음 세대들이 살아갈 보다 나은 세상을 구상하고 성찰하고 또 성찰하면서 한 없이 열려있던 그의 생각은 인간에 대한 강한 믿음과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회영이 일상생활에서 정치적 권력 장악과 같은 욕구를 버리고 평등의 덕을 실행한 것은 당시에도 잘 알려져 있었다. 획일적 통제를 거부하는 이회영이 구상한 미래의 조선은 정치 민주화와 경제 민주화를 국가와 경제의 사회화를 통해 실현하는 사회이다.
“처참하고 고독한 생활”을 이어가던 이회영은 1932년 11월 66세의 나이에 무장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다시 만주로 가려고 대련(大連)행 기선에 오른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젊은 동지들도 사선을 넘나드는데 다 늙은 내가 어찌 죽음이 두려워 주저할 수 있겠는가’라며 떠난 이 길이 그의 마지막이 되었다. 이회영은 뒤를 따라온 밀정과 왜경에 체포되어 고문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정부주의자는 부르주아적 권력이든 프롤레타리아적 권력이든 모든 정치적 권력을 거부하고, 다시 반권위주의적 실천으로, 투쟁의 길로 나아간다. 부단한 투쟁과 피폐한 소외의 길 에서 힘들게 살아내야 하는 것이 그들의 운명일지 모른다. 이러한 그들의 삶이 귀하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정부주의는 개인들의 자발적 유대를 진정한 사회적 관계로 보기 때문에 신채호와 이회영은 민족해방을 중심 과제로 삼지만, 그들의 민족해방 원리는 개체의 자주성과 자유 연대를 기초로 한다.
1945년의 광복은 형식적 독립이었다. 남북 분단 및 식민 잔재는 오늘날 냉전을 고착시키고 사회 불균등을 심화시키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오늘날 권력만을 쫓는 정치판의 작태를 접하면서, 무정부주의 철학이 더 큰 의미로 다가온다. 그것은 우리에게 일상의 생활을 지배하는 권력에 대한 비판적 분석의 필요성과, 반(反)권위주의적 생활양식의 가치에 대한 관심을 가지라고 요구한다.
차옥숭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
논문으로는 <소래 김중건의 삶의 여정과 사회 개혁 사상>, <동서 교섭의 관점에서 본 몸과 마음 이해-동학과 스피노자를 중심으로> 등이 있고, 저서로 《동아시아 여신신화와 여성정체성》(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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