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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와 함께 하는 비행- 〈귀향(鬼鄕)〉을 보고


 

 



2016.4.5

 

 

 

 

영화 귀향을 보았다. 우선 제목이 눈에 띈다. ‘鬼鄕’으로 표기된 것을 영화를 보면서 알았다. 그러나 ‘귀향’으로 영화 제목을 표시한 것은 ‘歸鄕’을 환기시키기 위한 것이었을 테다. 사실 ‘鬼鄕’이라고 하면 ‘귀신의 고향’이라는 말이 된다. 그러면 의도하는 바, ‘영혼으로 고향에 돌아온다’는 의미를 담을 수 없었을 거다. 이 영화의 영문 제목은 “spirits' homecoming”인데, 이를 바탕으로 생각해 보면 ‘魂’이나 ‘靈’을 써서 ‘혼귀향’이나 ‘영귀향’, 아니면 ‘영혼귀향’이라고 해야겠지만, 그러면 별로 맛이 살지 않는다.

 

영화의 제목만이 사유를 불러오지는 않았다. 이 영화가 위안부라는 한국의 ‘아픈 역사’의 희생자를 다루는 것이기는 하지만 ‘집단적 치유’라는 차원에서 하나의 굿판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또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 역사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우리네 종교 이야기이기도 한 것 같다. 그러나 무속의 ‘한국적 특성’은 다르게 이해되기도 한다. 그 이야기를 순서대로 풀어내 보고 싶다.

 

단 치유와 굿판 

 

비극적 사건을 겪고 나서 ‘귀신을 보는 능력’을 갖게 된 은경은 극중에서 영옥(영희)을 동무 정민과 만나게 해 주는 영매일 뿐만 아니라 관객들을 위안부로 끌려가 고통 받았던 '나비'들과 만나게 해 주는 영매이기도 하였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하나의 큰 굿판이기도 하다.

 

과거의 역사는 고통 받은 자들의 회상, 기억 그리고 영매의 인도로 ‘현실’화 되었다. 그 현실이 얼마나 ‘사실’인가도 물론 따질 수 있겠지만, 사실 굿판에서 그것은 무의미해진다. 거기에는 고통, 회한, 공감, 분노, 용서, 눈물이 어우러지는 감정의 거대한 용광로가 만들어지게 된다. 극중에서 은경의 꿈에 이끌려 사람들은 그 고통의 기억에 생생하게 ‘참여’하게 된다. 같이 두려워하고, 같이 아파하고, 같이 미안해하고, 같이 눈물을 흘린다. 그렇게 일시적 제장 공동체가 출현한다.

 

그 자리에서 ‘역사’는 더 이상 어떤 사실의 집합으로 존재하기를 그친다. 그 역사는 생생하게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고, 느껴짐으로써 ‘진실’로 다시 태어난다. 그렇게 그 기억은 누군가의 역사에서 그 제장에 참여한 사람들의 진실한 이야기, 즉 ‘신화’가 된다.


집단 치유? 사람들이 의사가 되는 것도 아니다. 단지 누군가의 고통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 전부다. 위안부 문제가 그러한 공감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달라질 것은 많지 않다. 정부의 정책을 바꾸는 데에까지 이르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일본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치유’는 시작된 것으로 느껴진다.


과거 그녀들은 ‘화냥년’, ‘미친년’ 등으로 기억되었다. 아니 그녀들에 대한 기억 자체가 한국 사회에서 억압되어 있었다. 그 고통의 흔적은 은폐되어 있었다. 이런 이야기가 시민의 힘이 아니었으면 스크린에 걸릴 수 없었다는 바로 그 사실 하나 만으로도 그 억압이 현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다.


그녀들의 희생과 고통, 그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그녀들이 어떤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또 어떻게 기억되어야 하는지, 그런 것들이 저 제장에 참여한 사람들의 ‘공감’으로부터 크게 달라질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녀들이 저 억압된 기억에 갇혀 외롭게 죽어가지 않을 수 있는 계기도 만들어질 것이다. 아니 이미 ‘나비’와의 연대를 통해서 작은 규모에서 이루어졌던 일이 〈귀향〉이라는 영화를 통해서 더 폭넓게 확산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지 모르겠다.

 

그녀들의 고통이 인정받는다는 것이 그녀들의 치유의 첫 걸음이었듯이, 그 동안 그런 어두운 기억이 우리 사회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아왔던 사람들에게는 외면하고 무시한 죄, 그러면서도 나라와 민족, 국가를 논한 위선자의 얼굴을 가지고 산 죄를 깨우치고 드러내는 기회를 갖게 해서 ‘대한민국의 시민’이라는 떳떳한 자기인식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하는 것 같다.


아직 치유는 완성되지 않았다. 하나의 가능성으로만 주어져 있다. 그것이 종교적 의례의 한계이기도 하다.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상상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바꿀 것인가가 과제로 남겨져 있다. 거기에 실질적인 치유가 자리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굿판이라는 문화적 장치의 직관성

 

이것이 ‘한국적인 것’이기 때문에 공감할 수 있고, 다른 종교적 장치들에 비해서 나은 것이라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다른 종교적 장치, 즉 기독교, 불교 등의 의례로는 위안부 소녀의 ‘귀향’(鬼鄕)에 ‘함께’ 참여하기 어려울 것이다.

 

무속이 하나의 전통으로 20세기부터 정리되기는 하였지만, 긴 역사 속에서 무속은 하위문화로 치부되어 왔다. 그러나 종교적 색안경을 끼지 않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굿판에서 ‘고통 받은 영혼’과의 만남을 가질 수 있다. 그것이 하위문화라서가 아니라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굿판에 공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한국적이어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쉽게 혼령의 관념을 떠올리고 그들과의 만남을, 살아있는 사람과의 만남처럼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다른 종교적 장치들은 교리적인 자체 신화적인 변용을 거쳐 다소 복잡한 형태를 가지고 있어 신자가 아니라면 쉽게 공유할 수 없는 한계를 갖는다. 그런 면에서 ‘귀향(鬼鄕)’은 굿판에서밖에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 같다.

 

거기엔 절대자도, 열반도, 복잡한 신학도 필요치 않다. 아픔이 있고, 한이 있고,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그 제장(혹은 영화관)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보는 것만으로도 복잡한 설명이 필요 없이 ‘그곳’으로 비행할 수 있다. 그리고 〈귀향〉에서와 같이 그녀들의 아픔을 공유할 수 있다.

 

‘인제 왔냐? 밥 묵자’


설명이 필요치 않다. 그 밥상에 우리도 함께 자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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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원고는 필자의 블로그(steinsfactory)에 작성된 “귀향, 歸鄕, 鬼鄕: 인제 왔냐? 밥 묵자”라는 글을 수정 보완한 것임을 밝힙니다.

 

 

 


심형준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논문으로 <종교 개념의 적용과 해석에 대한 연구>, <섹슈얼리티의 성스러움: 금기 너머의 더럽고 위험한 성스러움과 정상(正常) 섹슈얼리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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