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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고 아픈 종교의 자유
: 비판을 통하여 종교적 반성을 할 자유
2016.6.21
나는 불교학을 전공하면서 불교신자가 되었다. 배우고 가르치고 더욱이 믿는 바대로 내 삶이 꾸려져야 옳겠는데 그러하지 못해서 부끄러울 때가 많다. 무언가를 믿는 신자 이전에 무언가를 배워서 아는 학자라 해도 제 분야의 현상들이 원리(原理)를 이탈한다 싶으면 스스로 ‘송곳’이 되어야 할 것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불교인으로서 ‘옳지 않다’ 싶을 때, 그런 성찰을 공유하고 개선을 촉진하기 위하여 단체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혁신은커녕 해묵은 부끄러움이 자괴감 · 무기력증으로 변하고, 만성위궤양처럼 속 깊이 쓰리고 아픈 종교가 되어버렸다. 말을 하자면 입이 쓰고, 외면하고 침묵하자면 속이 아픈 이야기다.
종교 현상에 관심 있는 독자들이라면 대개는 알고, 어쩌면 더 이상 흥미롭지도 않을 불교계 추문이 끊임없이 생산되어 왔다. 그 중 하나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본사 용주사에서 일단의 신도들이 현 주지에게 범계(犯戒) 혐의를 두고 작년부터 집단시위를 해오다가, 주지 등으로부터 명예훼손과 업무방해로 고소를 당한 사건이다. 그 신도들의 시위에는 조계종 총무원의 종무행정에 관련된 정치적 역학관계를 비판하려는 목적도 있겠지만, 출가자 계율을 어긴(것으로 추정되는) 주지에게 신도들이 저항을 한다는 점에서 근래 보기 드문 사건이다. 물론, 가끔 다른 교단에서도 권력층의 행정력이나 개별 성직자의 허물에 집단적으로 저항하는 평신도들의 의사표시가 있었던 것 같다.
문제는 그러한 저항시위에 동참하는 신도나 불참하는 신도나, 모두들 매우 부끄러워지고 우울해진다는 거다. 자기가 신앙하는 대상체계의 부조리나 부도덕을 알게 되면, 각자에게 귀중한 신념이 무참히도 짓밟히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일단 모른 척 외면하고 싶어질 거다. 특히 보수적인 불교계 사찰 분위기에서 출가불자에게 저항하는 재가불자의 역할은 쓰디쓰다. ‘우리 스님’에게 대드는 놈(者)은 보통 나쁜 정도가 아니라 수행을 해치는 마구니고 승단을 해치는 해종(害宗) 행위자로 몰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주사에서는 소수 신도들끼리 주춤주춤 이의를 제기하더니 짱짱하게 저항의사를 결집 시키고 있다.
특정종단과 특정사찰 내부의 문제이던 것이 주지 등의 고소로 말미암아 사회법상 다툼으로 비화되었고, 제3의 당사자가 된 법원이 해당신도들의 책임감과 용기에 큰 힘을 실어주는 결과가 되어 버렸다. 2016년 3월31일 수원지방법원의 양식 있는 판사들이 ‘종교의 자유’에 대한 유권해석으로 올바른 판결을 내린 것이다. 여기에 그 판결문의 일부를 인용하려는데, 독자가 종교인이든지 종교 연구인이든지 간에, 우리에게 널리 익숙한 종교의 자유라는 용어를 이참에 자세히 한 번 더 음미해보자는 의도에서다.
“우리 헌법 제20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종교의 자유에는 자기가 신봉하는 종교를 방해받지 아니하고 수행할 자유에서 나아가 자기가 신봉하는 종교를 선전하고 다른 종교를 비판하는 선교의 자유와 자기가 신봉하는 종교 또는 자기가 속한 종교집단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종교적 반성을 할 자유도 포함된다. 만약 언론· 출판 및 집회· 결사의 목적이 자신이 속한 종교집단의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한 건전한 비판으로서 같은 종파에 속하는 신자들 및 일반인들에게 비판하고자 하는 내용을 알려 종교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보장받기 위함이라면 그로 인하여 같은 종교에 속한 신자가 평온하게 수행할 권리에 일정한 침해가 발생하더라도 그 침해방법이 위법하다거나 허위의 사실을 적시함이 분명하거나 수인한도를 넘는 침해행위가 과도하게 지속되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와 같은 비판할 권리는 최대한 보장받아야 한다.”(판결문 4p. 인용)
어느 종교기관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모이고 돈이 모이고 교세가 커지는 상황에 이르면 자정(自淨)능력을 시험받게 된다. 그 자정이라는 과업에 대해서 말하자면, 불교계의 경우, 사부대중 가운데 출가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재가자에게도 중요한 책임이 있어 왔다. 계율이 바로 그처럼 평소에도 신자 자신과 소속공동체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도록 오래 전에 생겨있는 잣대지만, 겉모습 갖추기에만 몰두하는 사이에 본질의 경계가 흥청망청 모호해지는 수가 있었다. 그동안 불교계 사찰은 혹시 기독교계 대형교회들을 선망하지 않았을까? 대형교회나 대형사찰의 신자들 중에서 자기 교회나 사찰이 청빈(淸貧)을 유지하지 않고 부(富)와 권세의 거점기관이 되는 것을 염려하고 반대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었을까? 선거 때마다 철새처럼 날아드는 정치권력 지망생들에게 종교인으로서 냉정하고 중립적인 자세를 얼마나 지킬 수 있었을까?
종교와 관련해서 연구하는 동지[道伴]들에게 솔직히 묻고 싶다. 위의 판결문에서 재확인된 종교의 자유 -비판을 통하여 종교적 반성을 할 자유- 개념을 잣대로 오늘날 경험들을 추측하자면, 우리 사회는 어느 정도의 종교 자유를 확보하고 있을까. 종교인이야말로 가장 명쾌하게 ‘옳은 것과 그른 것’을 학습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일반적인 학습과정은 학습내용에 대해서 굳이 ‘신념’까지 불러일으킬 정도는 되지 않겠으나, 종교 학습은 교조의 가르침을 배울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그것이 체화(體化)되도록 격려한다. 바꿔 말하자면, 종교인은 올바르게 사는 길을 배울 뿐만 아니라 그것이 올바름을 단단히 믿게 되는 학습과정을 거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불자로서 어떤 사안(事案)이 반(反)불교적이라고 판단될 때나, 종교인으로서 현안이 반(反)종교적이라고 판단될 때는 주저 없이 비판하고 반성하는 목소리를 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종교계에서 스스로 비판하고 반성하는 자유의 목소리가 크지 않고 미미했던 사실은 우리에게 연구해야 할 과제가 될 것이다.
금강대학교 응용불교학과 객원교수
주요 논문으로 〈3 poor에 대응하는 불교계 역할에 관한 시론〉, 〈사찰경영의 과제와 그 수행 전략: 사회복지와 거버넌스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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