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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가 머무는 ‘상자’, 유성기(留聲器)
2016.6.28
근대에는 수많은 테크놀로지가 발명된 시기이다. 증기, 철도, 전기, 비행기, 라디오, 유성기, 영화 등, 수많은 문명의 이기(利器)들이 개발되었고, 현재에도 우리 삶 곳곳에서 활용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근대는 우리가 최초로 다양한 기술을 산업화하여 우리 일상에 깊이 활용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근대와 전근대를 나눌 때, 기술-산업화가 이를 구분하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산업화된 테크놀로지는 서구의 산물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서구에서 개발되어 전 세계로 확장된 서구세계의 발명품이다. 아시아인들에게 이러한 테크놀로지의 산물은 서구에서 유입된 신기한 물건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아시아의 작은 나라인 조선에도 다르지 않았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유입된 이 문명의 이기들은 서구에서 배를 타고 조선에 들어온 ‘박래품’(舶來品)이었다.
박래품으로서 조선에 등장한 이 문명의 이기들은 그 형성 과정에 대한 이해 없이, 결과로서만 조선인들 앞에 나타났다. 다시 말해 이들은 조선 내부의 축적된 기술을 바탕으로 형성된 산물이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신기한’ 물건이었다. 이렇게 특정한 테크놀로지의 산물을 결과로만 접했을 때, 인간은 이런 새로운 대상에 대한 이해 방식을 고안하게 된다. 첫 번째 방식은 대상의 원리보다는 눈에 보이는 현상을 중심으로 접근하면서 상상력을 작동시키는 것이다. 그 대상이 전에 볼 수 없던 ‘신기한’ 물건이라면, 호기심과 상상력은 더욱 배가된다.
조선에 박래된 대부분의 근대적 문물은 이러한 상상력의 작동 속에서 놀라움과 신기함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개별 테크놀로지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 상상력과 결합되어 발현되었다. 예를 들어 철도와 비행기 등은 인간의 공간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했으며, 영화는 인간의 시각에 대한 환상을 자극했다. 그리고 유성기는 ‘소리’에 대한 조선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소리는 내뱉어지는 순간 사라져 버리지만, 유성기의 상상력은 소리의 일회성을 초월하여 ‘영원’을 꿈꾸게 하는 것이었다.
유성기가 조선에 유입된 것은 1887년으로 추정된다. 1897년 미국 선교사 알렌(H. N. Allen)이 최초로 들여와서 각부 대신 앞에서 시연했다는 설이 있기는 하지만, 이에 대한 문헌적 근거를 찾기는 어렵다. 1941년 <<신동아>> 기사에는 1887년 박정양이 전권대신으로 미국에 갔을 때, 이를 수행한 이완용과 이하영이 당시 “미국서 성(盛)히 선전되고 있”는 유성기를 보고 기이하게 여겨 이를 조선에 가지고 들여와 순종에게 헌상하였고, 순종이 이를 매우 진기하게 여겨 이완용과 이하영을 크게 칭찬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이렇게 조선에 들어온 유성기는 매우 놀라운 기계였다. 소리란 뱉어지는 순간 흩어져 사라지는 공기와도 같은 것인데, 이 놀라운 기계는 사라지는 소리를 잡아 상자에 담아두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소리를 잡아둘 수 있다는 것은 당시 누구에게나 신기함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기함은 당시 신문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899년 4월 20일에 발간된 <<독립신문>>의 한 기사는 노래를 유성기에 넣고 “각부 대신 이하 제 관인이 춘경(春景)을 구경하라고 삼청동 ‘강은정’에 잔치를 배설하”였다고 하면서, “명창 광대의 춘향가를 넣고 그 다음에 기생 화용과 금랑 가사를 넣고 말경에 산홍과 학봉 등의 잡가를 넣”었는데, 이 작은 기계에서 이것들이 완연히 나오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고 기이하다며 칭찬하고 종일토록 놀았다고 쓰고 있다.
이렇게 소리를 잡아서 저장할 수 있다는 것은 단순히 놀랄 만한 사실로 그치지 않는다. 소리를 저장하고, 이를 지속적으로 반복할 수 있다는 점은 인간의 오래된 꿈인 ‘영원’을 실현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라지는 소리를 저장해서 지속적으로 반복할 수 있다면 그리고 이를 후대까지 전할 수 있다면, 소리는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인간의 오랜 염원인 ‘불멸성’으로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불멸에 대한 상상은 당시 유명한 명창이었던 이동백과 명고수 한성준의 대화 속에서 나타난다. 한성준은 이동백의 목소리를 들어 조선의 소리요, “조선의 단 하나뿐이 명창”이라고 설명한다. 이에 이동백은 “늙으면 죽는 거지만 소리만 남어 있으면 허겠단 말이다.”라고 말하였다. 이를 들은 한성준이 “유성기 소리판이 있어서 후세에 전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 결국 근대적 테크놀로지인 유성기를 통해 사라질 소리를 ‘영원히’ 간직할 수 있다는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대담기사가 나온 당시의 조선 사회에는 어느 정도 유성기가 일상화된 시기였다. 따라서이들 역시 유성기에 저장된 소리가 영원히 반복되지 않는다는 기계적 한계를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과학이 지속적으로 발전한다면, 결국 미래에 자신들의 목소리가 영원토록 간직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피력한다. 이러한 기대는 유성기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음에도, 테크놀로지에 대한 인간의 환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계속되는 문명진보를 통해 종국에는 ‘이 기이한 과학’이 인간에게 ‘영원’과 ‘불멸’을 선사할 것이라는 ‘믿음’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물신적 믿음은 더 나아가 물신적 욕망으로까지 나아간다. 1930년 <<매일신보>>의 한 기사는 <진기한 축음기 제>라는 기사를 다루고 있다. 그 내용은 경성에 있는 축음기 상(商)들이 모여 축음기 제(祭)를 지냈는데, 식장에 축음기를 안치하고 신관을 두어 ‘제사(祭詞)’를 드리고, 숭배하였다는 기사이다. 이 의례가 어떤 의도에서 기획되었는지는 짧은 기사를 통해서는 온전히 파악할 수는 없다. 단지 ‘경성축음기상조합’이 이 의례를 기획하였고, 유성기 발명 53주년을 맞아 이를 기념하였다는 점에서 축음기의 판매를 촉진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들이 축음기를 식장에 안치하고 숭배하였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근대에 조선에 유입된 근대적 테크놀로지는 다양하다. 그리고 매우 짧은 기간에 압축적으로 유입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은 다양한 근대적 테크놀로지들이 경쟁하는 역동적인 장을 형성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동성 속에서 사람들은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상상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상상력을 읽어내는 것이 근대를 읽어내는 또 다른 방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도태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논문으로 <한국 초기 개신교 문서에 나타난 문자성>이 있고, <비평으로서 신화 연구하기>라는 글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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