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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460호-혈식을 원하는 신(神)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7. 3. 7. 20:33

 

혈식을 원하는 신(神) 



 news letter No.460 2017/3/7

 

 

 

 

 

 

 

 

최근 고지혈증 때문에 조심하고 있는 나에게 맑은 피가 어떤 것일까라는 부질없는 질문을 던져본다. 어릴 땐 코피도 자주 나고 다치기도 많이 하여 피맛을 가끔 보았지만 지금은 그럴 경우가 거의 없다. 단지 지난 해 연구소 심포지엄 주제인 희생제를 준비하면서 피맛을 온전히 보았다. 피는 산 사람, 또는 생물의 생명력인데 왜 신들이 좋아할까?


조선 사람들은 피를 생기(生氣)와 연관된 것으로 보았다. 피는 살아있는 인간만이 아니라 신에게도 필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제사에 반드시 혈성(血腥)의 생고기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피가 신을 부를 수 있는 힘이 있고, 신은 이에 의존하여 살아(?) 간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에 대한 음식을 혈식(血食)이라 하였다.


혈식이란 다음 몇 가지의 함의를 가진다. 첫째는 화식(火食)에 반대되는 혈식이다. 여기서 혈식은 인류가 불을 다룰 수 있기 전에 사람들이 먹던 피 묻은 생고기를 의미이다. 토굴에서 살고 동물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으며 날고기를 먹던 원시 시대를 표현하는 최대의 상징어가 혈식이다. 이에 의하면 제상(祭床)에 혈식을 올리는 것은 아득한 태초 인류 모습을 기억하기 위해서이다. 성왕(聖王)에 의한 문명의 발달은 그 이후의 역사이다.


둘째, 혈식은 신의 음식을 가리킨다. 이것은 사람이 먹는 음식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제사는 신께 혈식을 제공하는 것이다. 신이 먹을 수 있도록 가축을 성화시키는 일련의 과정으로 희생제를 이해한다면 혈식은 바로 그 정의에 정확히 일치한다. 난도(鸞刀)라는 칼로 가축을 도살하여 모혈(毛血)을 올리고, 간료(肝膋)를 태우고, 생고기를 바치는 제사는 혈식의 향연이다. 신은 혈식을 흠향함으로써 인간과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신이기 때문에 혈식을 하는 것이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혈식을 함으로써 신이 된다는 점이다. 혈식은 혼령을 신으로 만들어주는 매개체이다. 유교의 생사관에 의하면 사람이 죽더라도 혼령은 일정 기간 지속된다. 자신은 부모의 혼령을 버려두지 않고 시신을 매장한 후 신주(神主)를 만들어 혼령을 안착시키고 때에 맞추어 음식을 공궤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신지(神之)’라고 표현하였다. ‘신지’란 인간에서 신이 되는 과정이며 그 사이에 혈식이 있다. 이것은 인간보다 앞서 존재하여 현재도, 미래도 영원히 있는 오직 하나 뿐인 신을 섬기는 것과 다른 방식이다. 인간은 혈식을 통해 새로운 신을 계속 만들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혈식은 공공의 제사를 의미한다. 제사가 민간에까지 확산되면서 혈식의 성격이 약화되었다. 사대부와 민간의 조상신들은 식단을 혈식에서 상식(常食)으로 바꾸었다. 고기가 없어도 밥과 국이 있으면 제사는 가능해졌다. 술을 더 좋아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혈식의 모습을 유지하고자 했던 곳이 국가와 향촌의 공공 제사이다. 혈식을 먹는다는 것은 국가로부터 제사를 받는 것을 의미하였다. 때론 서원과 같이 향중의 제사를 받는 것이다. 이런 제사에서는 소를 못 잡더라도 양이나 돼지를 희생으로 바쳤다. 그리하여 혈식은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 공공의 제사로 간주되었다.


유교가 한국사에 남긴 유산 중에서 중요한 것은 공공의 질서이다. 많은 신들 중에서 어떤 신들을 공공의 신으로 섬길 것인가? 곧, 어떤 신에게 혈식을 바칠 것인가를 물었다. 종묘 공신당(功臣堂)이 그렇고, 성균관의 문묘(文廟)가 그러했다. 그리고 결정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공론(公論)이었다. 혈연 속에 연결된 끈끈한 친족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공과 덕을 갖춘 신을 만들 수 있을까? 공의를 논하지 않는 사회, 공의를 말하지 않는 종교는 정당한가? 혈족에 갇힌 사회가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공의로운 사회, 그 사회는 혈식을 원하는 또 다른 신인가 보다.


이욱_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논문으로〈조선시대 왕실 제사와 제물의 상징: 혈식(血食)·소식(素食)·상식(常食)의 이념〉,〈조상제사의 의미와 기억의 의례화〉등이 있고, 저서로《조선 왕실의 제향 공간 -정제와 속제의 변용》,《조선시대 재난과 국가의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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