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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530호- 가짜 종교, 가짜 불교, 가짜 기독교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8.07.10 18:27

                     가짜 종교, 가짜 불교, 가짜 기독교

 

 

            news  letter No.530 2018/7/10              

 


 


       가짜, 진짜에 대한 논의는 종교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다. 어떤 종교가 되었든지 항상 창시자에 대한 시비가 뒤따르고 교리에 대한 옳고 그름의 논쟁이 일어나며 그 과정에서 소위 이단이나 사이비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종교의 탄생과 더불어 시작된 이러한 가짜/진짜 논쟁은 나만 옳다고 주장하는 종교가 지닌 하나의 아이러니로 보인다.


       한국사회의 양대 종교인 불교와 기독교를 살펴보자. 부처님의 깨달음을 의심하는 직계 다섯 제자의 에피소드나 예수님을 가짜 예언자로 낙인찍는 사태는 가짜/진짜 가르기로 요약되는데 이러한 논쟁을 통해 불교와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탄생한 것이다. 그후 불교와 기독교의 역사가 보여준 대승불교와 프로테스탄트 기독교의 출현도 가짜/진짜 논쟁의 산물이다. 그런데 이러한 진위논쟁은 진공상태가 아니라 특정한 사회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만 일어난다. 이는 새로운 종교의 창안이나 교리체계의 확립이 한 두 사람의 종교적 천재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처했던 사회적 문화적 갈등과 관련된 현장의 산물임을 의미한다.

       얼마 전 나는 어느 뉴스 미디어에서 북한의 불교는 가짜이고 승려로 자처하는 북한의 성직자는 진짜 승려일 수 없다는 보도를 접하였다. 그 기사에 따르면 북한에서 유일하게 허락된 교회인 봉수교회도 북한의 ‘보여주기 식’ 교회일 뿐 진짜 교회가 아니다. 이 기사를 접하고 나는 가짜/진짜 논의가 불러 올 수 있는 “진짜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북한의 종교들은 “가짜“이고 남한의 종교들은 ”진짜”라고 주장하는 이러한 종교의식에 대해 되묻고 싶어진 것이다. 나 자신이 이런 가짜/진짜의 단정에서 얼마나 자유스러울 수 있는지 또 이러한 단정을 극복할 수 있는 현실 이해의 유연성을 갖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싶어 졌다.

       나는 전형적인 이산가족의 한 사람이자 재미 동포이다. 이러한 처지와 신분을 활용하여 2000년대 초반 남북화해의 분위기가 고조되었을 때 북쪽의 고향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후 재미 불교단체를 이끌던 스님(도안스님)과 함께 불교인 북한 방문 및 가족 상봉을 도왔다. 따라서 북한의 종교 실상을 누구보다 가깝게 접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고 그 과정에서 불교와 기독교에 대한 북한 사회의 시선을 직접 포착할 수 있었다.

       북한 승려의 모습은 분명히 우리와 달랐다. 유발(有髮)의 모습, 남한 승려의 것과는 다른 형태와 색깔을 지닌 가사(袈裟), 심지어 반야심경(般若心經) 독송의 절차와 운율도 달랐다. 큰 절의 경우에도 스님이 상주하는 것이 아니라 행사가 있을 때만 승려 복장으로 갈아입고 참집한다. 우리는 법문에서 부처님의 자비와 수행을 말하지만 북한의 승려들은 통일과 민족의 단합을 법문의 주 내용으로 삼는다. 봉수교회의 설교도 마찬가지다. 민족화해, 남북 교인들이 함께 사는 일, 외세에서 벗어나 우리끼리 화평하게 살자는 것이 설교의 주된 내용이다. 남쪽의 이산가족과 종교인들이 참석한 법회이고 예배이니 보편적 자비와 사랑의 이야기보다 우리가 처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통합의 강조가 법문과 설교의 주제가 된 것은 당연하다. 이것을 북한체제 선전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것이 북한의 불자와 기독교인이 살아 온 방식이니 말이다. 짧은 기간 머물며 듣고 접한 내용들, 그것이 북한이 담지한 불교의 모습이고 기독교의 현장인지도 모른다.

       부처님의 메시지와 예수님의 가르침은 특정 시대와 상황에 담겨 표출될 수밖에 없다. 소위 자유세계와 민주주의 체제라고 하는 이 시대, 이 현장에서 부처님의 메시지와 기독교의 가르침은 어떻게 발설되고 있는가? 우리가 주장하고 또 듣기를 원하는 메시지가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서 동일하게 표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불전의 말씀과 성서의 메시지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달랐고 또 달리 해석된다. 그것이 8만대장경이고 구약/신약성서의 이야기가 아니었던가?

       나에게는 종교의 정치적 컨텍스트, 곧 공산체제나 자본주의체제에서 종교의 메시지가 어떻게 정치적으로 맥락화 되어 전달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요세프 로마드카(Josef Lukl Hromadka, 1889-1969)이다. 냉전체제하 체코의 기독교 신학자였던 그는 동구 사회주의 교회의 입장을 대변한 신학자다. 1956년 헝가리사태가 일어나자 서구 유럽은 이구동성으로 소련을 비난했지만 로마드카는 동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사회주의 체제가 개혁과 함께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에 큰 기대감을 가졌고 나아가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의 대화를 주장했다. 그는 서방세계의 비윤리적이며 파괴적인 면을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당시 미국 국무장관 덜레스와의 논쟁은 유명하다. 현장을 대변할 줄 알았던 그는 예수님의 메시지가 현장에서 살아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세계에만 살아 있다는 고식적 생각을 비판한 것이다. 이러한 로마드카가 암울한 냉전시대였던 1960-70년대 남한사회의 기독교 신학자들로부터 각광을 받았다는 사실은 현재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북핵 위기의 국면이 평화 무드로 전환되어 가는 이 시점에 북한의 가짜 불교와 가짜 기독교라는 해묵은 종교론을 끌어 들이는 미디어의 보도를 접하면서, 나는 나 자신의 종교관을 되돌아보고 싶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등장한 이후 언제, 어느 곳에 진짜 불교가 존재해 본적이 있는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진짜 기독교의 원형은 어느 현장에 있었던가? 불교와 기독교는 항상 특정한 정치, 문화, 사회 속에 존재해 왔고 종교는 정치, 문화, 사회와 항상 맞물려 있다. 내가 알고 이해하는 불교와 기독교가 원형이고 다른 사람이 알고 이해하거나 다른 정치체제 속에 존재하는 불교와 기독교는 틀렸다고 할 수 없다. 단지 나와 다를 뿐이지 나와 다르다고 가짜로 치부할 수는 없다. 우리와는 여러모로 다른 북한의 종교문화 속에서 진짜 불교와 진짜 기독교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출현하기를 기대해 본다. 깨달은 불자는 내 눈에 띄지 않을 터이고 순교자 역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터이니 말이다.

      

 


이민용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장
주요 논문으로 <서구불교학의 창안과 오리엔탈리즘>, <학문의 이종교배-왜 불교신학인가>, <불교에서의 인권이란무엇인가?>, <백교회통-교상판석의 근대적 적용> 등이 있고, 역서로《성스러움의 해석》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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