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뉴스 레터

756호-무녀와 남격의 대결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2. 12. 6. 18:46

무녀와 남격의 대결


news letter No.756 2022/12/06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총독부 유리건판 사진들이 온라인으로 공개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https://www.museum.go.kr/dryplate/), 내가 가장 먼저 검색해 본 것은 무당들의 사진이었다. 무녀, 무당, 굿 등의 키워드로 검색하자 기대한 것보다도 훨씬 많은 사진들이 나왔다. 그 대부분은 1910년대에 도리이 류조(鳥居龍蔵, 1870-1953)에 의해 촬영된 것들이었다. 내친김에 몇 시간을 투자하여 그의 사진 자료 전체를 하나하나 살펴본 결과 무당들의 모습이나 굿 연행 장면이 찍힌 수십 장을 얻을 수 있었다. 좀 더 잘 알려진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아키바 다카시(秋葉隆)와 아카마츠 치죠(赤松智城)의 사진들이 1930년대 이후에 촬영된 것들이니 그보다 10-20년이나 이른 시기의 것들인 셈이다.


    한국에서 도리이 류조는 관련분야 전공자들이 아닌 한 낯선 이름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1970년대에 전집이 발간된 이래 장기간의 연구와 재평가를 거쳐, 고고학, 민속학, 인류학 등 분야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이력은 당시 기준으로 보더라도 대단히 독특하다. 1880년대에 소학교를 중퇴한 그는 10대 때부터 츠보이 쇼고로(坪井正五郞)가 주도하여 설립한 도쿄인류학회(東京人類学会)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츠보이가 1892년 도쿄제국대학에 인류학교실을 설치하자 상경하여 표본정리 담당 직원이 된다. 이후 그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의 경로를 따라 요동반도, 대만, 쿠릴열도, 남중국, 오키나와, 한국, 만주, 사할린, 시베리아 등 동북아시아 전역을 망라하는 현지조사를 행한다.

     마침 『동북아 인물전』(원광대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편, 근간)이라는 공저서 기획에 참여하고 있던 나는 그의 한국 무속 관련 현지조사와 연구들을 집중적으로 다루어 보기로 했다. 1910년 8월,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의 초청을 받아 총독부 학무국의 촉탁이 된 도리이는 함경도 지역을 대상으로 한 1차 조사 직후 신도담화회(神道談話會)라는 모임에서 “조선의 무인(巫人)에 대하여”라는 강연을 한다. 이 강연은 이후 논문 형태로 정리되어 그의 저서인 『일본주위민족의 원시종교: 신화종교의 인종학적 연구(日本周囲民族の原始宗教: 神話宗教の人種学的研究)』 (岡書院, 1924)에 “조선의 무격”이라는 제목으로 실린다. 또한 1920년대 초에 불교조선협회(佛敎朝鮮協會)의 연구모임에서 “조선의 무(巫)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이루어진 강연도 있다. [橫井誠應 編, 『朝鮮文化の硏究』 (東京: 佛敎朝鮮協會, 1922) 수록] 세 텍스트의 내용은 많은 부분 겹치지만 미묘한 관점의 변화도 있어 흥미롭게 읽힌다. 아직 ‘무속’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고 있다는 것도 시선을 끈다.

     한국 무속에 대한 도리이의 서술은 서양인 관찰자들의 선행연구를 일절 참고하지 않았고, 아키바와 아카마츠, 그리고 무라야마 지쥰(村山智順) 등에 의해서 이루어진 보다 체계적인 후속연구들에 비하면 소략하고 엉성한 부분도 많다. 그러나 그만큼 독특한 시각도 있다. 특히 한국 무속을 시베리아 샤머니즘이나 일본 고신도(古神道)와 비교하는 내용은 훗날의 한국인, 일본인 연구자들에게도 계승되는 관점이다. 도리이는 무당의 치병 의례를 병자의 몸속에 있는 악령을 꼬드기거나 억지로 끌어내는 과정으로 설명하였는데, 그것은 그가 몽골 현지조사에서 만난 샤먼들의 설명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었다. 한편 그는 한국과 일본의 샤머니즘을 유교, 불교 등 외래문화가 도입되기 이전의 원형적인 민족문화로 파악하고 있는데, 이 역시 이후 양국의 민속학자들 사이에서 꽤 오랜 기간 지속되었던 주제다. 다만 도리이는 일본과 한국이 그런 원형문화를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을 특별히 강조한다. “오늘날에는 조선이니 일본이니 합니다만 원래는 모두 같은 민족이었습니다. 이것이 서로 나뉘어 있지만 일한(日韓)은 동조(同祖)입니다.”


     도리이의 무속 이해에서 드러나는 또 한 가지 특이한 시각은 유형론이다. 아직 “한강 이북의 강신무, 이남의 세습무”라는 이론이 없는 상태에서, 그는 이와는 상이한 지리적 구분을 시도한다. 한국 무속의 형태를 북방과 남방으로 나누는 것은 같으나, ‘북방파(北方派)’를 함흥 이북 두만강 지역까지로 대단히 좁게 설정한 반면, ‘남방파(南方派)’에는 함흥 남쪽 한반도 전역을 포함시키고 있는 것이다. 길주를 중심으로 하는 북방파의 가장 큰 특징은 무당이 남성이며, 독경(讀經)이나 점술을 더 많이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는 북방의 남성 무당들이 만주 지역 샤머니즘과 더 깊은 관련이 있으며, 보다 ‘원시적’이고 ‘일본과 같은 계열’인 남방계의 여성 무당들과 함경도 지역을 무대로 경쟁 관계에 있었을 거라는 가설을 내놓는다.

    이 독특한 분류는 비슷한 시기 한국 무속을 관찰한 한국인, 서양인, 일본인들의 기록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그는 당시 함경도 외의 지역에도 박수, 판수 등으로 불리는 남성 무당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듯하다. 이런 오류는 기본적으로 도리이의 무속 조사가 함경도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던 탓일 터다. 그가 찍은 사진 가운데에는 평안도, 경상도, 제주도 무녀들의 것도 있지만 남격(男覡)은 한 사람도 없고, 양적으로도 함경도에 비하면 훨씬 적기 때문이다. 다만 함경도 지역 무속 전통에 남북 차이가 있었으며, 그 경계에서 양자 사이의 모종의 경쟁 관계가 있었다는 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1930년에 이루어진 무라야마의 전국적인 무격 분포 조사에서도 함경북도는 남격이 여무(女巫)의 수를 압도하고 있는 예외적인 지역이었다. 해방 이후의 무속 연구에서도 함흥 이북은 거의 다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에서 도리이의 보고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도리이는 함경도 지역에서 나타난 무녀와 남격의 경쟁 관계에 대한 한 가지 흥미로운 신화를 전하고 있다. 옛날 어느 사람이 길주(吉州)에서 역인(役人) 임무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길주에서 명천(明川)으로 가는 길에(두 지역은 모두 도리이가 ‘북방계’로 분류한 곳들이다), 언덕에서 북소리가 나고 있었다. 하늘에서 도깨비가 내려와서 놀고 있나 싶어서 가까이 가 보니 괴이한 남성 노인 무당이 기도를 하고 있었다. 마침 그곳에 다 쓰러져 가는 장승이 있었다. 그런데 그가 기도를 하니 장승이 새것처럼 변하는 것이다. 서울 사람이 신기해 하자, 늙은 무당은 이렇게 말했다. “보시오, 하늘 한 편에 별이 나타났는데, 저걸 보니 서울에 뭔가 사변이 난 모양이오.” 두 사람이 함께 서울에 가 보니 열두 개의 창고가 잠긴 채 열리지 않아 온 나라가 곤란해하고 있었다. 수많은 무녀들이 동원되어 기도를 했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길주의 남성 무당이 신에게 기도하자 창고의 문이 모두 열렸다. 이렇게 하여 남방의 무녀들보다 북방의 남격이 존경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도리이는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은 해석을 시도한다.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은 함경북도의 남성 무당들이다. 이것은 중국에 불교가 들어와서 승려들이 도사를 신통력으로 압도했다는 이야기와 유사하다. 따라서 마치 불교와 도교처럼 함경도 남방의 무녀와 북방의 남격은 경쟁 관계였으며, 후발주자인 남성 무당들이 자신들의 우위를 선전하기 위해 ‘우리는 서울에서 인정받았다’며 권위를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리이는 함경도의 독특한 무속 지형을 두고 북방 샤머니즘으로부터의 전파나 일본과의 동조론을 끌어내려고 했지만, 그것은 그가 가진 자료만으로는 검증할 수 없는 무리한 주장이었다. 그만큼 거창하지는 않지만, 현지조사와 해당 사회의 맥락을 반영해서 이루어진 무녀-남격과 승려-도사의 경쟁 관계에 대한 비교는 꽤 설득력이 있다. 각각은 브루스 링컨이 말하는 ‘강한 비교’와 ‘약한 비교’의 좋은 사례다. ‘약한 비교’는 꼼꼼하게 다루어진 적은 수의 사례들을 통해 상대적으로 소박한 결론을 도출하지만, 연구자가 책임질 수 있고, 반론과 토론에 열려 있다는 점에서 훨씬 강력한 잠재력을 가진다.

 

 

 

 

 

 

 

 



 


한승훈_
한국학중앙연구원
최근 발표한 글로는 《무당과 유생의 대결: 조선의 성상파괴와 종교개혁》, 〈역사적 최제우와 청림교의 비밀결사들〉, 〈조선후기 반역자들의 의례〉, 〈결탁, 참여, 해방: 정치-종교 관계의 층위들〉 등이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