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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丹)』, 정신세계사의 에소테리시즘, 그리고 국선도


news letter No.758 2022/12/20

 

 


          

     1984년은 유리 겔러와 소설 『단(丹)』이 한국을 뒤흔든 해였다. 당시 어린아이였던 나는 TV전파를 타고 염력으로 숟가락을 구부리게 한다는 초능력자만 알았다. 나중에 보니 종교사(?)적으로 더 중요한 사건은 『단(丹)』의 출간과 이례적인 성공이었다. 기성 종교 위주가 아니라 대중의 종교적 관심이 드러난 사건들을 통해서 한 시대를 서술해 보는 ‘대중 종교사’나 ‘민간 종교사’ 같은 분야가 생긴다면 그 방면에서 두 사건은 1984년의 종교사를 장식하는 대표적인 일화가 될 것이다. 1980-90년대는 얼마 지나지 않은 과거이지만 20세기 후반기 한국 대중의 종교적 열망을 연구하기 좋은 시기인 것 같다.

     당시의 변방 종교사 관련 서적들을 살펴볼 때 자주 등장하는 출판사가 있다. 정신세계사다. 모두가 유리 겔러나 인도 요기와 같은 외국 초능력자에 빠졌을 때 ‘우리나라에도 도인들이 있다’고 나섰던 사람이 『단(丹)』의 실제적 주인공 봉우 권태훈(1900-1994)이었다. 큼지막하게 서예로 쓴 단(丹)자, 그리고 홍안백발의 신선과 같은 사진이 들어간 인상적인 책을 기획하고 펴냈던 당시 정신세계사의 송순현 대표나 봉우 선생의 녹취를 풀어내서 글을 쓴 김정빈 작가는 요즘 나이 셈법으로는 청년들에 불과했다. 오늘날 관점에서 볼 때 주변부적 문화 취향의 책이 2주 만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1985년에도 서점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 중 하나였다. 대형 기획 없이 한 명의 나이든 도인과 젊은이들이 문화 흐름을 만들었고, 아웃사이더가 인사이더가 되는 시대였다. 에소테리시즘적 세계관을 국내에 보급한 정신세계사 같은 출판사를 연구 영역으로 끌어오고 싶다.


     이상은 국선도에 대한 글을 쓸 일이 있어 한국의 수련문화에 대해서 조사하던 차 별외로 떠오른 생각이다. 이제 국선도 얘기로 들어가 보자. 국선도 창시자 고경민(1936-재입산?) 청산거사가 저자로 되어 있는 『삶의 길』(1977)은 국선도의 원리와 수련 과정에 관한 책이다. 저자가 청산으로 되어 있다고 한 데는 그 스스로가 직접 썼는지 누가 그의 구술을 듣고 글로 옮겼는지 모르겠어서이다. 본문에 ‘나’라는 말 대신에 ‘청산’이라는 삼인칭으로 묘사되고,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않고 산속에서 산 사람에게서는 나오기 힘든 유려한 문체로 서술되었기 때문이다. 『삶의 길』에도 『단』의 김정빈과 같은 역할의 이름 없는 작가가 있을 수 있겠다는 추측을 해 본다. 사실 내용이 청산에게서 나온 말이고, 학술서가 아닌 이상 누가 옮겼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청산의 수련기는 할아버지와 단둘이서 절 근처에서 살던 13살 소년이 산속에서 우연히 스승 청운도사를 만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스승으로부터 호흡법을 배우고 20여 년간 고된 수련 생활을 한다. 문명과 멀리 떨어진 동굴에 거주하고 산속에서 솔잎과 칡뿌리를 먹고 살아간다. 우연히 산속에 버려진 새끼 고양이 두 마리를 길렀는데 잘 먹어서 너무 몸이 커진다. 알고 보니 호랑이 새끼다. 깊은 산 속에서 호랑이 두 마리를 반려동물로 키우고 강도 높은 수련을 하며 결국 국선도의 계승자가 된다. 그 자신이 산속에서 경험한 일들과 수행담은 보통 사람들이 읽기에는 무협지 속 영웅 이야기처럼 들린다. 모든 이야기들이 상당히 세부적인 사항까지 생생하게 묘사되는 있는 점들이 내러티브의 장점이다. 이런 선도 체험담이 어느 날인가는 신화학에서 다루어질 가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갖은 고생 끝에 국선도의 법을 깨우친 청산은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상고시대부터 산속에서 스승에게서 제자로만 전해지던 법을 세상에 알리기 위하여 1967년에 세상으로 나온다.

     중간중간에 스승에게서 전해 들은 옛날 이야기라는 형식으로 과거 국선도 도인들의 이야기가 상당히 길게 삽입되어 있다. 국선도를 최초로 세상에 전수한 천기도인은 지금으로부터 약 9700년 전에 살았으니 단군보다도 앞선다. 이야기의 현재는 청산의 수련 과정이고, 사이사이 스승이 해 주는 과거 이야기를 통해서 국선도의 계승도가 설명되는 액자 형식이다. 이런 형식으로 한민족과 국선도의 과거를 설명하는 방식은 상당히 영리하다. 신화와 현실의 구분이 애매해지고, 청산 역시 ‘들은 이야기’가 되기에 그 근거를 따져 물을 수 없다.


      이와 같은 이야기들은 일단 흥미롭고 ‘신화’의 영역으로 서술하면 큰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런데 수련의 원리, 과정, 목표에 대한 설명들이 추상적인 개념들이다. 이런 부분이 ‘청산이 호랑이 타고 수련하기’나 ‘신선이 용타고 산 넘어가기’보다 이해하기 힘들다. 이럴 때 무엇을 중요한 내용으로 판단하고 정리를 하는 게 좋을지 방향을 잃곤 한다. 수련의 핵심적인 내용을 파악함에 있어 요즘 쓴 2차 문헌이라도 교단 내부에 있는 사람들이나 동양철학 영역에서 쓴 글들은 사실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수련단체들이 쓰는 개념을 ‘문화 간 번역’ 없이 날 것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 이해하기 어렵고 불친절하다는 느낌이 든다. 헤매고 있던 중 “수련문화 연구에서 가장 난제라 할 수 있는 것은 해당 수련법의 매뉴얼이나 관련 문헌들에 등장하는 각종 용어들과 수련 방법에 대한 설명들을 연구자의 입장에서 재서술하는 작업이다. 해당 단체의 수련이 지닌 원리와 실제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개념이면서 학문적인 서술에 적합한 용어를 찾아와 수련의 방법과 내용을 학문적인 언어로 서술해야만 비로소 수련문화에 대한 연구물이라 일컬을 수 있다”(조현범, 『한국 종교교단 연구 XI. 수련문화 편』,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20, 30쪽)”는 부분을 읽고서, 비슷한 분야에서 다들 유사한 어려움에 직면하는가 싶어 반갑기도 했다. 그런데 나름 ‘보편적’이고 ‘학술적’인 범주로 바꾸려고 시도하는 과정에도 문제는 여전히 있다. 한문으로 이루어진 고유의 개념을 어디까지 일반적인 학술어로 바꿀 수 있을까? 내가 이해한, 쉬운 부분 위주로만 글을 쓰고 있는 게 아닌가? 이해 가능한 단어로 바꾸는 과정에서 내가 아는 것으로만 환원시키는 것이 아닐까? 그런 불확실한 마음을 가지면서 계속 쓰고 있다.

     그러던 중 강돈구 선생님의 『어느 종교학자가 본 한국의 종교교단』(2017)의 선도계 수련단체에 대한 부분을 읽으면서 안도감을 느꼈다. 중요하게 보고 있는 지점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이고, 내가 이해하지 못한 수련 체험에 대한 철학적인 설명이 많이 들어가 있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팔이 안으로 굽어서만은 아닐 것 같은데 그동안 되어 있는 연구들을 살펴 보면, 여기서 민망해 하실 것 같아 존함을 한 분씩 거론할 수는 없으나, 확실히 종교학자들이 여러 방면에서 중요한 점이 무엇인지 전체 맥을 잘 잡고 있었다. 선배 학자들이 낯선 분야에서 입문격으로 써 주는 글들은 후학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종교학적 글쓰기의 장점 중 하나는 추상적이고 내부적인(emic) 언어를 소통가능하게 ‘번역’해 주면서 내외부의 안팎을 넘나들며 무엇이 진짜 ‘문제’인지를 보여주는 데 있는 것 같다. 그런 글들을 읽고 배울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다.


     아직 본격적으로 『단』과 국선도의 이야기들, 다른 수련 단체들의 ‘신화’를 비교해 보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모티브뿐만 아니라 전개와 구조도 유사한 점이 있다. 민중의 기억 속에는 이런 수련담이 옛날이야기 형식으로 전해지고 있었던 것일까? 어디까지가 20세기 후반 ‘도’와 ‘기’ 열풍에서 만들어낸 현대 신화일까? 최근 곁가지로 쓰는 글 덕분에 든 단상이었다.

 

 

 

 

 



 

 

 


최정화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최근 『종교문화비평』에 「기울어진 세속주의: 독일의 통일국가 만들기 과정에서 세속주의가 작동되는 방식」(2022, 42호)과 「‘종교’에 해당하는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가? 종교사와 비판적 실재론적 접근」(2021, 40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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