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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775호-하노이 답사 소감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3. 4. 25. 18:01

하노이 답사 소감

 

news letter No.775 2023/4/25

 

 



          
           
     2023년 1월 6일부터 1월 13일까지 일주일 동안 하노이 지역 종교 답사를 다녀왔다. 원래는 2020년 2월 21일부터 2월 27일까지 갈 계획이었다. 그래서 그해 1월 초에 답사 일정과 계획을 다 세우고 비행기 표도 사 놓았었다. 비행기 뜨는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다 아는 그 일이 2월 초에 느닷없이 밀어닥쳤다. 처음에는 그냥 가려고 했다. 하지만 하노이에 있던 분이 만류하였다. 대학이며 연구소, 심지어 성당도 다 문을 닫아서 오더라도 계획했던 답사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7월이면 갈 수 있겠지 싶었다. 여름에 가면 더워서 힘들려나 했을 뿐이었다. 웬걸. 그로부터 3년의 세월이 우당탕 퉁탕 흘러갔다.

    하노이 시내에서는 사회과학원 도서관, 한남(漢喃) 연구원, 국립 도서관, 하노이 대교구 성요셉 대신학교 도서관 등을 다녔다. 베트남 천주교 문헌들을 직접 보러 간 것이다. 대신학교 도서관에서는 감사하게도 내게 실물을 몇 권 복사해주었다. 그리고 오래된 천주교 성당들도 방문하였다. 성요셉 주교좌 성당, 안타이 성당, 끄어박 성당, 타이하 성당, 풍쾅 성당, 함롱 성당, 팅리엣 성당, 하동 성당이 내가 가 본 성당들이었다. 그 외에 문묘, 진국사(鎭國寺) 불교 사찰, 진무관(眞武觀) 도교 사원, 옥산사(玉山祠) 사당 등의 종교 유적을 답사하고, 호지명 묘소도 가 보았다. 하노이 시내를 벗어나 좀 더 먼 곳도 갔다. 홍강을 건너서 하노이 동북쪽 외곽과 맞닿아 있는 박닌 지역에서 쑤언호아 성당, 기적이 일어난 장소여서 순례객들이 자주 찾는다는 성 빈첸시오 공소, 그리고 박닌 교구 주교좌성당도 돌아보았다.

    하노이 답사의 하이라이트는 홍강 하류 삼각주 유역에 있는 닌빈 지역 답사였다. 팟지엠 교구의 푹냑 성당을 보러 간 것이다. 그곳은 베르뇌 주교가 처음 선교사로 파견되었을 때 도착한 곳이다. 그는 곧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지만 몇 년 뒤 풀려난다. 그리고는 만주 대목구로 옮겨 와서 요동 반도의 봉천, 양관, 차쿠 등에서 10년 동안 활동한다. 그다음에는 조선 대목구장 주교로 임명되어 조선에 와서 10년 동안 활동하다가 병인년에 체포되어 순교한 인물이다. 닌빈에서는 푹냑 성당 외에도 서키엔 성당과 팟지엠 주교좌성당, 시토회 수도원 등도 방문하였다. 서키엔 성당은 샤를 달레 신부가 묻힌 곳인데 그 무덤은 결국 찾지 못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하노이 답사기를 한 번 써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하노이 답사 동안에 나에게 인상적이었던 글자와 문헌 이야기만 하려고 한다. 길거리의 간판과 표지판을 읽기가 무척 어려웠다. 기본적으로는 로마자 자모인데도 어떻게 발음하는지 몰라서 여기가 어딘지, 저것이 무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한자 문화권에 속하는데 어떻게 한 세기 만에 이렇게 문자 생활이 바뀔 수 있는지 놀라웠다. 이런 변화가 극명하게 반영된 것은 베트남 천주교 문헌이다.

    처음에는 중국에서 한문으로 지은 천주교 문헌이 들어왔다. 그런데 이미 베트남에는 13세기 이후로 한자를 사용한 독자적인 표기 방식이 있었다. 그것을 남(喃)이라고 부른다. 남쪽 나라 사람들의 입말이라는 뜻일까? 그런데 옥편에는 ‘재잘거릴 남’이라고 훈을 달았다. 마치 그리스 사람들이 북쪽 나라 사람들을 브르브르하는 이상한 소리를 지껄인다고 바르바로스라고 부른 것과 비슷한 형국일까?

     좌우간 베트남 천주교는 한문 문헌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새로 천주교 문헌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중국 천주교 문헌에서는 예수를 耶穌라고 쓰지만, 베트남 천주교 문헌에서는 支秋라고 적었다. 그것만이 아니라 온갖 천주교 용어들도 중국식 한자와는 달랐다. 글자만이 아니라 유럽 천주교 문헌의 번역 경로도 달랐다. 라틴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를 출발어로 하지만, 한자를 거쳐서 정립된 것도 있고, 곧바로 옮겨진 것도 있었다.

     그러다가 20세기에 들어와서 또 한 번의 변화를 겪는다. 1651년에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 알렉상드르 드 로드 신부가 만들었던 로마자 표기 방식이 국어라는 이름으로 널리 쓰이면서 천주교 문헌도 이 글자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베트남 천주교에는 역사적으로 한자, 남, 국어의 세 가지 표기로 된 천주교 문헌이 존재하였다. 이것들의 중심적인 사용 시기는 다르지만, 차례로 교체되었는지 아니면 혼용되었는지 그 실상은 아직 모른다. 각 문헌에 담긴 내용이 얼마나 다른지도 나는 모른다. 좀 더 공부해야 알 것 같다. 아마 조선 천주교 문헌의 번역 경위를 연구할 때 비교 대상이 될 수 있겠다. 이렇게 흥미진진하고 도전적인 연구 주제가 머릿속에 떠올랐기에 오늘도 나는 행복하다.

 

 

 

 

 

 

 

 

 

 

 

 

 

조현범_
한국학중앙연구원
작년에 쓴 글로는 <순암 안정복의 기록에 나타난 조선 천주교의 초기 상황>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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