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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772호-장애인에게 종교는 무엇일까?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3. 4. 4. 18:46

장애인에게 종교는 무엇일까?

 

news letter No.772 2023/4/4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세상에 무서운 죄업 세 가지가 있으니, 그 하나는 겉눈치로
            저 사람이 죄악을 범하였다고 단정하여 남을 모함하는 죄요, 둘은 남의 친절한 사이를
            시기하여 이간하는 죄요, 셋은 삿된 지혜를 이용하여 순진한 사람을 그릇 인도하는 죄라,
            이 세 가지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은 눈을 보지 못하는 과보나, 말을 못하는 과보나,
            정신을 잃어버리는 과보 등을 받게 되나니라.”(『대종경』제5인과품 27장)



원불교의 경전을 먼저 언급한 것은 원불교가 장애인에게 관심이 없다든가, 차별을 한다는 말을 꺼내기 위해서 아니다. 요즘 종교와 장애의 교차점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소위 4대 혹은 5대 종단으로 사회에 알려진 종교들을 중심으로 장애담론의 성격을 살펴보면서 장애인에게 종교는 무엇일까, 하는 의문을 조금씩 풀어보는 중이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의료, 교육, 사회복지 등의 분야에서 종교는 우리 사회에 많은 기여를 해왔다.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장애인 복지시설도 많다. 또한 장애인의 인권에 대한 종교의 관심도 높다. 예컨대, 발달장애인 가족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참사’가 잇따르자 5대 종단은 2022년 7월 12일 <정부는 죽음이 아닌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사회를 지금 당장 만들어라! -‘발달장애인 24시간 지원체계’ 구축을 촉구하며>라는 제하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런데 장애인의 자기서사와 종교단체의 장애담론을 나란히 놓고 생각하면, 그 어긋남의 기울기가 무척 가파르다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다. 종교는 장애인에게 활짝 문을 열고 환영한다고 하지만, 정작 장애인의 모습은 사찰, 법당, 교회, 교당, 성당에서 잘 볼 수가 없다. 해마다 등록 장애인의 숫자는 증가하고 있고, 나이가 50대가 넘어서면 장애인의 비율도 높아진다는데, 종교 공간에서 장애인의 모습은 좀처럼 만나기가 어렵다. 그 배경은 우리 모두가 쉽게 짐작할 수가 있다. 누구나 불편한 곳은 가고 싶지 않은 법이니까 말이다. 불편함은 장애인이 종교 건물에 접근하고 이동하기 어려운 물리적 장벽 때문만은 아니다. 종교의 장애담론에서 종종 장애인의 존재를 둘러싸고 불편한 정서가 조성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기독교의 경우, 가난, 질병, 장애, 죄를 연결하는 신념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으며, 특히 질병과 장애는 믿음으로 치유될 수 있다는 ‘신유’ 행위가 부흥회와 기도원을 중심으로 실천되고 있다. 신학자 최대열은 ‘죄와 장애’와 ‘믿음과 치유’의 대립적 시각에서 장애를 인식하는 종교적 장벽이 장애인의 종교생활을 어렵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장애인식의 개선과 장애인의 인권을 위한 종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릇된 장애인식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장애를 의학적 손상으로 보는 인식과 죄(장애)-믿음-치유(극복)의 구조에 바탕을 둔 종교적 서사가 결합되면서 일으키는 효과에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죄와 질병의 인지적 연관성에서 기독교의 죄 개념에 내포된 복합적인 의미이다. 종교학자 이유나에 의하면, 개신교 내한선교사에 의해서 제공된 죄 개념은 원죄의 의미보다는 행위와 관련된 죄로서 윤리적 규범의 성격을 강하게 내포한다. 봉건주의에서 근대주의로의 이행 과정에서 구습의 관념과 행위로부터 단절의 결의가 개종 과정에서 표출되었고, 그러한 과정에서 이전에 한국문화에서 공유되던 죄의 관념, 특히 불교적 업의 관념이 죄의 개념과 결합하면서 기독교의 죄 개념은 혼효적인 의미를 띠게 되었다는 것이다. 장애인의 자기서사에는 자신이 지은 죄가 무엇인지를 묻는 이야기가 종종 등장한다. 손상된 몸이나 마음을 갖게 된 것이 자신의 죄 때문에 벌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병인론적인 사고체계가 작동하는 것이다.

    죄와 장애를 연결하는 종교적 관념이 기독교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맨 위에서 적은 원불교의 경전은 버젓이 장애가 업의 결과라고 말한다. 그밖에도 ‘병신’, ‘불구자’, ‘소경’ 등과 같은 차별적인 용어가 원불교 경전에서 발견된다. 경전이 기록되던 당시 사회의 장애인식을 감안할 필요가 있고, 또한 윤리를 강조하기 위해 수사적 표현이라는 점은 고려할 수가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경우, 몇 차례의 경전 번역 과정에서 장애 차별적인 용어를 다른 용어로 대체하려고 노력해왔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물론, 경전 번역에서 용어와 표현을 수정하는 문제는 처음부터 한글로 기록된 경전의 용어와 문장을 수정하는 문제와 똑같지는 않다. 그것도 창교자의 말씀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경전이나 종법에서 장애인을 차별하는 용어와 표현, 나아가 규정이 개선될 수 없는 ‘성역’이라면, 장애인에게 종교는 그만큼 멀게 느껴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돌봄과 인권의 사각지대에 쉽게 놓이게 되는 장애인의 현실에서 종교는 든든한 지원군이다. 그러나 장애인이 종교의 당당한 구성원으로서 자격과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는 종교의 물리적·정서적 환경이 장애인에게 편안해야 한다. 장애인에게 편안한 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 환대의 공동체라면 누구에게도 편안한 공간일 수 있다. 그러한 환대의 공동체는 동정이나 시혜의 마음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한 방향으로 주고받는 관계에서는 이미 존재론적 격차와 권력의 서열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4대 종단을 중심으로 장애담론을 살펴보면서 다른 종단에 비해 천주교, 그리고 개신교 전체가 아닌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교단에서 장애인식이 돋보였다는 점을 남기고 싶다. 거듭 밝히지만, 다른 종단이 장애인에게 기울이는 관심이 부족하다는 말이 아니다. 장애인에 대해서 원불교든 불교든 기독교든 종교는 어느 정도 책임감을 느끼고 있음은 분명하다. 다만 문제는 종단 내부에 장애인‘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교의의 내용과 의례 방식을 수정하고 보완해야 하고, 그 점에서 현재로서는 천주교와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교단의 경우가 좀 더 눈에 띈다는 것이다.

  * * *

    한편, 우리의 일상생활을 돌아보자. 우리 곁에서 장애인을 볼 수 없는 까닭은, 장애인이 불편함을 느끼기에 모습을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미나, 포럼, 학술대회 등 각종 모임에 참여해왔으면서 부끄럽게도 내 자신은 한 번도 장애인을 머리에 떠올린 적이 없었다. 그러니 종교에 대해서 뭐라고 할 자격이 애초에 내겐 없는 것이다.

     저는 농인에요.
     저는 귀가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수화 통역을 붙여주는 등 배려를 해주세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귀가 잘 안 들리는 분이세요? 잠시 기다려주세요.
     전례가 없기 때문에 검토를 해보겠습니다.
     검토해봤는데 매우 어렵습니다.

     (아키야마 나미·가메이노부다카, 『수화로 말해요』, 삼인, 2017)

    장애인의 요구에 종교가, 나아가 우리가 이런 식으로 응대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박상언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논문으로 <배아줄기세포연구의 생명윤리담론 분석: 한국 기독교와 불교를 중심으로>,<간디와 프랑켄슈타인,그리고 채식주의의 노스탤지어:19세기 영국 채식주의의 성격과 의미에 관한 고찰>,<신자유주의와 종교의 불안한 동거: IMF이후 개신교 자본주의화 현상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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