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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와 종교> 참관기
news letter No.832 2024/5/28
지난 토요일인 5월 18일에 숭실대에 다녀왔다. 한국종교문화연구소에서 주관하는 <기후위기와 종교>라는 심포지움이 열린다는 걸 3월에 이미 알았고 오래 기다렸다. 1시 반 개회부터 저녁식사까지 함께 했다. 주제넘게도 마지막 질문자로 한 가지 질문과 한 가지 제안을 하였다. ‘기후위기와 종교’라는 주제로 읽을 만한 책이 무엇인가 물었고 다음 심포지움에서 기후위기-완화와 기후위기-적응이라는 각 단계별로 종교의 역할과 권능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사회를 맡은 최정화 선생님께 좋은 제안이라는 상찬을 받았으니 괜히 기대가 된다. 이후 오늘까지 머리 속을 맴도는 생각들을 메모하고 있다. 익숙한 학문 분야의 내용에 대해서는 반추할 여지가 많았지만 잘 모르는 분과와 관련한 내용에 대해서는 이해조차 급급하여 각 발표에 대한 잡상의 분량의 편차가 크다. 다섯 분이 수행한 발표로부터 받은 영감과 감화가 모두 컸지만 필자의 미숙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단 한 문단의 글이라도 생산하여 함께 한 분들과 나눌 수 있으면 무척 다행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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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우 선생의 발표는 역시 선수들의 선수라는 느낌이었다. 기후위기와 관련하여 20분 이내에 이렇게 다양한 개념과 사상과 이론을 욱여넣고 기후터널 비전 등 현실에 대한 비판과 심포지움 주제에 맞춘 종교사상을 소개하고 대안까지 소개하다니 나같은 사람들은 따라가기도 버거웠다. 일단 발표의 초반에 프랑스에서 붕괴학이 대유행이라는 전언이 인상 깊었다.
몇 년 전부터 흥미롭게 읽었던 몇 가지 주제의 책들이 바로 붕괴학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예를 들어 서양의 청동기 문명은 기원전 1200년 경에 몰락하여 이후 철기 문명이 일어서기까지 최소 200년에서 400년 정도의 암흑기로 떨어진 서로 단절된 문명이었다. 이 긴 시간 동안 남유럽에서 메소포타미아와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환지중해의 너른 지역에서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중국의 경우 위진남북조 400년간 국가라고 부르기도 착잡한 상태의 군벌들 끼리의 전란으로 인구가 절반이나 줄었다. 어째서 그렇게 사람들이 파리목숨처럼 죽어나가는 시대가 400년 이나 이어졌으며 그런 시기에 사람들은 생존확률을 높이기 위해 어떻게 살았을까? 이런 역사적 붕괴학 이외에도 다양한 방면의 붕괴학이 있는데 고담준론의 본향인 프랑스에서 사람들이 어떤 책들을 읽으면서 어떤 논의를 주고 받는 지 매우 궁금해졌다.
내가 이해하기로 김현우 선생 발표의 논지는 성장주의가 물신화되어 현대의 종교처럼 대중을 사로잡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당황스럽게도 물신/페티시즘이라는 단어가 종교학이나 신유물론 계열의 철학에서는 사회과학만큼 부정적이지 않은 듯 했다. 논평과 종합토론에서 관련한 토론이 오갔는데 흥미롭긴 했지만 내 공부가 짧아서 이해하기 어려웠다.
발표 후반에는 딱딱한 이론서가 아니라 말랑한 소설책도 나왔다. 노벨상이 장르문학에도 주어진다면 최초의 수상자가 되리라고 말해지는 어슐러 K. 르 귄의 <빼앗긴 자들>. 마침 나는 작년부터 SF 명작 중의 명작인 헤인 연작을 읽고 있었다. 읽는 내내 헤인 연작은 기후위기 소설이라는 의미의 클라이파이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전에 존재했던 최초의 클라이파이라는 걸 알아챘다. 그리고 여러 작품 속에서 다양한 기후대와 생태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방식을 민족지학처럼 그려낸다: 사막, 숲과 바다, 빙하기, 척박하고 황량한 단순 생태계, 착취적 문명에 의해 생명체가 살기 어려워진 생태계, 공전주기 즉 1년이 2만일이 넘어 인간은 4계절을 한 번만 겪게 되는 생태계. 이렇게 다른 기후와 생태 속에서 각 행성의 토착민들은 모두 다른 종교를 가진다. 예를 들어 <어둠의 왼손>이라는 작품의 배경은 빙하기 행성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행성의 종교는 에돈두라스라는 여신이 세상을 창조한 것으로 나온다. 빙하기와 여신 신화라는 설정은 의도한 것이었을까? 여하간 헤인 우주 연작에는 유교를 제외한 인류의 수많은 종교들이 레퍼런스로 활용된다. 헤인 연작은 ‘기후위기와 종교’라는 관점으로 보자면 완성된 클라이파이며 이 주제와 관련하여 사고실험을 할 때 많은 시사점을 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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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쁨 선생의 발표와 이어지는 논평에서는 많은 의문과 혼란을 느꼈다. ‘하늘이 무너질 때 틈에서 솟아나는 것들’은 심층적응인가 아니면? 기후붕괴의 상황에서 ‘연결이라는 감각’과 ‘기쁘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재발견하는 기회를 가지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오르테가가 말한 바 ‘해방적 재앙’이라는 것은 필연이면서 오히려 ‘문명의 근본적인 방향전환’을 시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가? ‘코큐니타스’는 재지역화의 가능성을 말하는가? 현재 상황에서 재지역화는 어떤 경로로 가능할까? 붕괴 이후의 상황까지 기다려야 가능한 것인가? ‘성장 없는 번영’이라는 미래상은 당장 격한 반대에 직면하게 될 터인데 추상적인 구호를 넘어서는 어떤 이미지나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기 위해서는 좀더 구체적인 가치와 덕목의 목록이 필요한 것 아닐까? 등등
사실 유기쁨 선생의 발표를 듣는 중 집중을 방해한 것은 솟아나는 질문뿐만이 아니었다. 피에르 클라스트르의 논저 <폭력의 고고학> 중 “남아메리카 인디언의 신화와 의례”중에 나오는 내용이 있다. 유럽인들이 남미에 도착한 직후 이들은 민족말살 행위(ethnocide)를 저질렀고 그 결과 15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남미의 토착민들 중 일부 부족들은 새로운 예언자들이 이끄는대로 대륙의 서쪽, 즉 현재의 페루로 향하였다. 남미인들은 1492년 이후 현재까지 세상의 종말을 맞이한 것이다. 기존의 종교와 신화가 새로운 현실에 대한 해석력을 잃은 상황, 그리고 새로운 예언자들의 출현과 사람들의 다양한 선택이 먼 옛날 먼 곳의 먼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미래가 될 수 있다는 새로운 자각이 솟아나고 있었다.
그리고 올 해가 2024년이기에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연작이 하나 더 있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우화 연작. 올해 7월 20일이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라는 작품이 시작되는 날이다. 작품의 출간은 1993년이었는데 30년 후 작중의 미국 상황이 현재 미국과 겹쳐지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21세기의 <1984>라고 불리며 30년 만에 차트를 역주행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후속작인 <은총을 받은 사람의 우화>와 함께 읽으면서 기후위기에 의해 붕괴중인 사회의 종교는 어떤 것일까를 사고실험 하기 좋을 듯 하다. 왜냐하면 작품의 주인공이 ‘지구종’이라는 종교를 창안하고 종교공동체를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기성 종교가 해명하지도 응답하지도 못하는 전대미문의 상황이 닥칠 것이다. 새로운 상황을 해석하는 교리를 만들어내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안하고 수많은 상실과 고통과 슬픔에 위로를 줄 수 있는 신흥종교가 많이 생겨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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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법과 심층생태학’이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김영준 선생의 발표는 법학과 철학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는지라 그냥 내용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 동물권이라는 개념이 지구법과 연관이 깊다는 내용이 머리로 쏙 들어왔고 지구법 논자들 사이에서도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았다는 내용도 쉽사리 납득이 되었다. 동물권이라는 게 동물을 단일한 층위로 묶어서 이야기할 수 있는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일단 인간들에게 대체로 잘 알려져서 이름과 생김새를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가시 권역의 동물들이 있고 반면에 어디서 사는지 이름이 무엇인지 생태적인 특성이 잘 알려지지 않은 비가시 권역의 동물들이 있다. 그리고 소나 돼지나 닭 같은 식용으로 사육되는 동물들이 있고 개와 고양이로 대표되는 다양한 애완동물들이 있다. 그리고 토착민과 인류 전체가 신경을 쓰지 않으면 곧 사라질 멸종 위기종의 동물들이 있다. 그리고 우리 인간과 친연성이 가장 높은 오랑우탄, 침팬지, 보노보, 고릴라 같은 대형 유인원이 있으며 뱀 등 혐오를 유발하거나 인간에게 유해성이 높은 동물들이 있고 인간의 잘못으로 본래 서식지를 떠나서 새로운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동물들이 있다. 전반적으로 보면 귀여운 동물과 귀엽지 않은 동물의 위계가 존재하는데 같은 동물로 묶어서 권리를 말하는 것은 19세기 휴머니즘 담론이 1세계 백인 지식인과 중산층 남성들만의 위선적이고 차별적이고 인종적인 성격의 담론이었다는 것과 무슨 차이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지구법에 대해 너무 광역의 추상적인 논의가 아닌가 싶었지만 로버트 L. 켈리가 <제5의 기원>에서 주장한 바 지구방위군으로 군축하는 법적 근거를 지구법에서 마련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얻었다. 기후위기 자체도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지만 현재의 대의민주제에서 선출되어 권력을 휘두르는 이들은 식량과 에너지와 자원의 확보를 위해 극우세력을 동원하여 전쟁을 일으켜서 실제로 이런 ‘우방 없는’ 전쟁 속에서 기후위기까지 더하면 말 그대로 가능한 최악의 묵시록적 종말 상황 속에 대다수 사람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붕괴학의 예측 가능한 범위에서 전쟁은 가장 어리석은 선택이지만 전쟁의 가능성을 낮출 수 있는 현실적 요인은 현재 찾기 어렵다. 심지어 종교조차 도화선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민족국가 자체의 군대를 해산하고 지구법 내 체계로서 지구방위군 군법을 만들어서 시행할 수만 있다면 기후위기가 현재 문명의 존립을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 하나를 없앨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다. 물론 너무 이상주의적인 주장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문명붕괴만큼 확실한 현실을 마주한 상태에서 이상주의적 해법보다 더 현실적인 해법이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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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우 선생의 생태언어학 발표에선 공적 담론을 해부하여 그 속에 숨겨진 무의식의 세계를 끄집어내는 경이로운 언어적 외과수술을 구경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뒤풀이에서 선생에게 묻고 들은 바, 현재 대한민국 정부의 기후위기 공익광고의 주제가 거의 탄소중립에 몰려있다는 점 자체가 경악스러웠다. 탄소중립을 전달하는 언어와 방식에서 드러나는 집단무의식 내용의 기만성과 형식적 무성의가 슬프고도 화를 치밀어 오르게 했다. 정부나 대기업은 손놓고 기후위기 해결은 개인이 해야 된다고? 그 중요한 기후위기 대응법인 탄소중립을 실천하는 주체는 (도시) 중산층 (중에서도 정상가족)이라니! 나머지 사람들은 손놓고 있으면 되는 건가?
나중에 확인해 보니 현재 대한민국 법체계에서 기후위기 관련된 법률은 2021년 의결된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 단 하나이다. 그런데 이 법안조차 헌법적 이념에 부합하지 못할 정도로 미흡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오히려 ‘기후악당법’이라 불리고 있다. 여하간 발표를 들으면서 속이 끓어오르고 있다가 최정화 선생의 날카로운 논평을 들으면서 냉온을 오가는 느낌이었다. 전반적으로 김성우 선생의 발표에 대한 논평이라기 보다는 또다른 주제의 발표를 들은 것 같았고 그레타 툰베리에 대한 의문이나 신화/민담이라는 이야기 창고 속의 비인간 존재가 생태학적 사고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논평도 매우 계시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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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인류세라는 용어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더 나은 개념이 뭐가 있을지 궁금하던 차에 장석만 선생의 발표는 그 궁금증을 해소해 준 단비와 같았다. 인류세 이외에 다른 용어로는 플란테이션세, 자본세, 단일세, 상생세, 크툴루세 등이 있는데 인류세라는 용어는 철학적으로 유용성을 가진다는 논변이 무척 인상 깊었다. 게다가 ‘행성화’라는 개념을 제시하여 기존의 ‘세계화’나 ‘지구화’에 대응하여 사고의 방향을 전환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 같다.
그리고 필자는 종합토론에서 장석만 선생에게 ‘기후위기와 종교’라는 심포지엄 주제와 관련하여 한 권의 책이나 필자를 소개해달라고 질문을 했는데, 결국 뒤풀이까지 함께 하게 되면서 다른 회원 선생님들의 고견을 들을 기회가 생겼다. 이때 추천받은 책은 아리안 콘티의 <Grounding God>이었다. 2023년에 나온 아주 따끈한 연구서로 부제가 ‘인류세에 대한 종교적 응답’인데 목차를 살펴보니 네 가지 종교와 두 가지 철학 사조를 통해 불확실한 인류세의 종말론에 대한 대응을 정리하는 내용인 듯했다. 철학과 종교학 모두 평소 공부할 기회를 만들지 못했는데 이 기회에 조금씩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 것 같다.
조원식_
독립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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