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또‘방편(소신공양)’의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일까?"

2010.7.6



지난 6월19일에 '종교, 폭력, 평화'라는 주제로 한국종교문화연구소가 2010년 상반기 정기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여기에 참석한 필자는 다소 혼란스런 마음으로 이 학술대회를 지켜보았다. 그 이유는 지난 5월 31일 **스님이 '4대강 개발 즉각 중지'라는 유서를 남기고 낙동강의 한 지류 제방에서 소신공양을 하였다는 뉴스를 필자가 접한 이후 여러 의문들이 엉켜 나를 계속 불편하게 했기 때문이다. 최근의 소신공양을 둘러싼 일련의 현상들이 자칭 불자이며 또한 종교 사회학을 전공하는 필자에게 무슨 이유로 이러한 불편함을 지속적으로 제공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보다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우선 불자로서의 정체성 문제인데, 소신공양은 불살생계라는 불교의 기본적인 계율에 어긋남에도 불구하고 “뭇 생명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불사르는 행동”으로 대보살행으로 높이 평가받고 잇다는 것이다. 여기서 후자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흔히『법화경』「약왕보살본사품」에 나오는 소신공양이 부처님에 대한 최고의 공양이라는 설법이 언급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수경스님은 **스님을 현대판 약왕보살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율장에서 자살을 바라이죄로 분류하여 불교는 자살을 금하고 있으며, 올해 1월 10일 한국불교종단협의회 산하 불교인권위원회는 불교자살방지대책위의 결성을 촉구하며 “불교는 생명을 가장 존중하는 종교입니다. 생명을 존중하는 불교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침묵한다면 부처님에 말씀을 실천하는 일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라며 자살방지에 불교계가 앞장서야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한 적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끊는” 소신공양의 자살행위는 제외되는가.

이에 대한 한국 불교종단의 공식적인 답은 들을 수 없으나 **스님의 소신공양이 현재 불교계 전반에서 높이 숭앙되고 있는 맥락에서 그리고 지난 6월 5일 조계사에서 열린 '** 스님 소신공양 국민추모제'에서 스님의 소신공양은 “자살이 아니다.”라고 선언적으로 규정되었듯이 현재 불교계의 분위기는 소신공양과 분신자살을 구분하려는 경향이 농후하다. 소신공양은 불교 수행의 한 방법이고 구도의 한 방편으로 범인(凡人)의 자살과는 그 목적과 동기에서 차별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적 자살’은 그 동기와 목적이 숭고하기에 정당화될 수 있다는 의미로 들린다. 이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논리와도 같은 것이 아닌가. 혹자는 이러한 필자의 의문들을 **스님의 소신공양을 너무 교리적/논리적으로만 이해하려한다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 또한 스님의 소신공양에 담긴 뜻- 뭇 생명에 대한 사랑, 무차별 개발로 인하여 고통받는(을) 생명에 대한 연민과 절박감, 행동의 필요성 등 - 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 생명의 보존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가차 없이 버린다는 것을 불교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는 여전히 필자는 괴롭히는 질문이다.

한편, 이 같은 의문들은 사실 좀 부차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정말로 필자를 따라다니는 질문은 왜 한국사회에서 ‘불의’에 대한 저항이 ‘분신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형태로 등장하게 되었으며, 또 이러한 결단이 종종 영웅적으로 인식되고 있는가이다. 뛰르케임이 그의 저서『자살론』에서 명확히 하고 있듯이 자살은 단지 개인적인 동기로 설명될 수 없으며 자살은 사회적 사실로 해당 사회에는 자살을 유발하게 하는 ‘집합적 성향’(collective disposition)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언급할 것은 한국에서 사회적/정치적 저항의 표현으로 ‘이타적’ 분신자살이 행해지고 이것에 대중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지극히 현대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특히 한국의 경우 분신이 전통적인 자살방법이 아니었다. 유교의 영향으로 가능한 신체를 훼손하지 않는 자살방법(독약을 마심, 목을 맴, 물에 빠짐, 단식 등)이 선호되어 왔기 때문이다.

저항적 분신자살의 시발점을 찍은 것은 1963년 베트남에서 불교탄압에 맞서 분신을 선택한 틱광득(Thich Quang Duc, 釋廣德) 스님이라 할 수 있으며 그의 행동은 베트남 불교도들의 저항과 함께 광범위한 반독재, 반정부운동을 이끌어냈다. 맹렬한 화염 속에서도 몸을 꼿꼿이 세우고 있는 그의 사진은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흥미로운 것은 ** 스님의 소신공양에 대한 기사에서 흔히 틱광득 스님(앞에서 언급된 사진과 함께)의 분신이 함께 언급되고 후자가 일종의 롤모델로서 상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보도 형식은 저항적 성격이 비교적 약한 그러나 한국 최초로 소신공양을 행하였다는 1998년 충담 스님의 소신공양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물론 ** 스님과 충담 스님의 소신공양은 여러 면에서 차이점을 보인다. 즉 후자의 경우는 한 종단의 수장(태고종 승정)으로 비교적 높은 나이(세수 85세)에 자신의 소신공양 의사를 미리 대중에게 천명한 후에 공개적으로 분신을 실행하였으며 이러한 결단의 동기로 보다 일반적이고도 광범위한 이슈 -분단조국 통일, 생로병사 중생제도, 불교계 화합흥륭 등 3대 원력 - 가 내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러한 이타적 혹은 저항적 분신자살이 불교계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한국의 노동운동의 촉발제 역할을 한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의 분신을 시작으로 특히 민주화학생운동이 한창이던 1991년 4월과 5월에는 대학생 7명이 연이어 분신자살을 했으며 1995년 현대차와 대우조선 노동자의 분신자살, 1996년 김영삼 정권 타도를 외친 대학생의 분산 그리고 최근의 일로는 2008년 1월 비록 실패로 끝났으나 한 태안주민이 기름유출 피해보상건으로 분신을 시도 하였다. 유사한 맥락에서 한국 사회에서 치열한 대결양상을 보이는 노동운동에서 2009년 쌍용파업노동자들의 자살이나 1년 전 우리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노무현 대통령의 자살 또한 좌절과 저항을 온 몸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한국 사회에서 널리 퍼진 단식, 삭발 또한 몸에 대한 가학적 공격을 통해 사회적/정치적 저항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중에서도 분신자살 혹은 소신공양이 우리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노성환이 지적한 바와 같이 다음과 같은 분신자살의 특징 때문이다. 분신자살의 공개성, 시각성, (반대세력에 대한) 공격성, 죽음의 보장성(확실성) 그리고 종교성(상징성)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비록 ** 스님이 공개적으로 소신공양을 행하지 않았으나 일부 불교계 매체가 ** 스님의법구(法句) 사진을 공개한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결코 범인이 따라갈 수 없는 ** 스님의 숭고한 희생정신, 철저한 자기수행의 결과로서의 소신공양을 조금도 폄하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무엇보다 ** 스님의 소신공양이 불러온(올) 긍정적 효과 즉 4대강 개발에 대한 반대세력의 집결과 결속 등을 과소평가하지도 않는다. 후자와 관련하여 조계종과 불교계 NGO단체들이 6월 16일 대규모 추모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추모행사 일정을 발표했는데 7월 12일 오전 11시에 전국 본말사에서 열리는 초하루 법회를 **스님 추모법회로 개최하고 이를 위해 전국 1100여개 사찰에 추모 자료집을 제작해 배포할 계획이며 추모법회에 앞서 “**스님 소신공양의 뜻을 잊지 않겠다.”는 내용을 담은 현수막이 전국 사찰에 게시될 것이라고 한다. 7월 17일에는 서울 시청광장에서 범시민행사로 대규모 국민 추모문화제가 열리고 **스님 추모영상과 추모공연이 행해질 것이라 한다. 이렇게 한국 사회에서는 다시 한 번 한 개인의 죽음이 유발한 집합적 저항의례가 전개될 것이다.

그러나 소신공양이 가져온 이러한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이미 한국에서 위험수위를 넘어버린 (개인적/이기적) 자살빈도는 차지하더라도 사회적/정치적 저항의 표현으로 자살 더 나아가 분신자살이 선택되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자살이 일종의 사회적 소통의 도구 내지 언어로 암암리에 인정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를 자아낸다. 과연 우리는 전태일이 살았던 독재정권 시대와 같이 자살 밖에는 다른 저항의 수단이 없는 것인가? 왜 우리는** 스님의 소신공양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며 애도하는 동시에 스님의 신성화 작업을 시작하고 이 사건을 도구화하여 미래 저항운동의 자원으로 이용하려는 것인가? 지난 6월 5일 한 불교매체가 “**스님의 영롱한 사리 30과 수습”이라는 타이틀로 기사를 작성하고 전면에 해당 사리의 사진을 올려놓은 것을 보고는 필자는 다시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불편함을 이기려고 필자는 한국의 불교계가 **스님의 희생을 통해 다시 화합하고 동일한 목표를 향해 힘을 모을 수 있게 되었다면 어떻든 간에 좋은 일이 아닌가하며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우혜란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woohairan@hotmail.com

저서로 <<주요논문으로 <한국사회에서 여성 종교지도자의 카리스마 구축구조>,<천도재의 새로운 양태-낙태아를 위한

천도재>,<현 한국사회에서 합동 천도재의 복합적 기능에 대하여> 등이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