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뉴스 레터

308호-한식(寒食)날 왕릉의 제사(이욱)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4. 4. 25. 15:42

 

 

                         한식(寒食)날 왕릉의 제사 

                

                       


                              

2014.4.1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이 왔다. 봄소식이 늦은 이곳에도 산수유가 피고 목련의 꽃봉우리가 터질 듯 솟아오르고, 개나리의 노란 띠가 봄 바람에 출렁인다. 이런 화창한 봄기운을 느낄 때 만나는 명절이 한식(寒食)이다. 동지로부터 105일째 되는 날인 한식은 우리에게 부모와 조상의 무덤을 찾는 날로 전승되었다. 화창한 봄날에 무덤을 찾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어제 청춘’, ‘오늘 백발’의 인생사를 봄의 언저리에서 생각하게 한다.

 

 

        조선시대 한식날이면 민간에서 무덤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에서도 관리들이 능(陵)과 원(園)에서 제사 지내기에 분주하였다. 조선시대 왕릉은 추존왕까지 포함하면 31대 51기나 된다. 그 외 왕의 사친이나 왕세자의 무덤인 원(園), 폐위된 왕의 무덤인 묘(墓)가 있었다. 유교 이념에서 볼 때 능묘는 종묘를 비롯한 사당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등하였기에 속례(俗禮)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런 열악한 지위에도 불구하고 무덤은 종교적 대상으로 더 오랜 지속력을 가졌다. 조선시대 사당 제사는 불천위(不遷位)가 되는 매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4대를 넘지 못한다. 4대가 지낸 선조의 신주는 정결한 곳에 묻어 그 제향을 멈췄다. 그러나 무덤의 제사는 4대가 지나도 영원하였다. 물론 후손이 찾지 않는 무덤은 평토가 되고 사람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그러나 문중이 형성되고 씨족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서 4대가 지나도 조상의 무덤을 보살피고자 하였고, 심지어 망실된 시조, 중시조, 입향조의 무덤을 찾고자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왕릉은 오죽했을까? 태조의 고조가 되는 목조로부터 대대로 조성된 왕릉을 관리하고 그 제향을 지내주었다. 불천위의 세실(世室)이 아니더라도 한식 때만큼은 모든 왕릉에 제사를 지내주었다. 1786년(정조 10)에 한식날 국가에서 제사 지내주어야 할 왕릉이 30군데나 되었다. 여기에 종묘, 영희전, 궁원묘(宮園墓) 등까지 합치면 전체 45곳에 139명이나 많은 수의 제관(祭官)이 필요했다. 이 숫자는 중앙에서 제향을 위해 파견하는 관리의 숫자이다. 조선후기 국가제사의 규모와 횟수를 늘이는 가장 큰 요인이 이러한 왕실의 제사였다.

 

 

        이 많은 관리들이 자기 집 제사를 뒤로하고 나랏님 제사에 솔선하여 나섰을까? 조선시대 관리들에게서 제사는 ‘성스런 경험’이라기보다 ‘업무’였던 것 같다. 하고 싶은 일도 업무로 주어지면 하기 싫어진다. 헌관(獻官)으로 차출되면 서계(誓戒)에 나가야 하고 재계(齋戒)해야 하며, 향축(香祝)을 받아 능소까지 가서 제향을 지내고 남은 음식의 일부를 가지고 와서 중앙에 바쳐야 했다. 가야할 곳은 많은데 가고 싶은 사람은 별로 없다. 그 결과는 지위가 낮고 빽없는 자들이 맡는 것이다. 이에 문신들은 빠지고 무신(武臣), 종실(宗室), 산직(散職), 나이든 사람들이 능제의 헌관으로 차출되었다. 그들이 형색이 어떠했을까? 여비를 별도로 지급하지 않았던 당시 제관의 초라한 형세는 제사의 위세를 대변하였다.

 

 

        문신(文臣)들이 거부하는 제사, 이것이 동아시아 정교분리의 시작이다. 관리이자 학자이며 제관이었던 정교일치의 독특한 성격이 늘어나는 제사로 인해 균열이 생긴다. 방법은 제관의 일을 전담하는 사람들을 만드는 것이다. 갑오개혁 이후 등장하는 제조, 전사관 등은 이러한 직책이다. 관리들이 제관에서 해방되어 근대적 관료로 나아가기 위한 방식이었다.

 

 

        조선 후기는 효를 기반으로 제사가 널리 확산되던 시기였다. 무덤을 찾아 모여드는 후손들의 무리를 통해 죽음의 자리에서 희망을 찾았고, 더 나아가 가문의 위세를 보여주고자 하였다. 이런 현실은 공공의 권위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라는 또 하나의 과제를 부여하였다. 그리고 그 공공의 질서에서 유교는 점차 주변화되었다. 영원한 것이 어디 있을까? “아차 한번 늙어지면 다시 청춘은 어려워라”

 


 이욱_
한국학중앙연구원
leewk99@daum.net
논문으로〈조선시대 왕실 제사와 제물의 상징: 혈식(血食)·소식(素食)·상식(常食)의 이념〉,〈조상제사의 의미와 기억의 의례화〉등이 있고, 저서로《조선시대 재난과 국가의례》등이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