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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307호-루돌프 오토와 성스러움(이창익)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4. 4. 25. 15:41

 

 

                          루돌프 오토와 성스러움 
               

                       


                              

2014.3.25 

 

 

        성스러움은 단일한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의 속성이 하나로 융합된 두꺼운 어떤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세상에는 절대적으로 좋은 것도 없고 절대적으로 나쁜 것도 없다. 심지어 죽음조차도 그러하다. 죽음은 인간의 생명을 끝장내는 두려운 대상이면서도, 인간적인 조건을 완전히 탈피하여 다른 세계로 갈 수 있는 통로로 간주된다. 죽음이 공포의 대상이면서도 매혹의 대상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루돌프 오토(Rudolf Otto)는 1917년에 <<성스러움>>(Das Heilige)이라는 책을 출간하였으며, 이 책으로 인해 종교 연구의 가장 중심적인 인물 가운데 한 명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엘리아데가 평가했듯이 오토는 섬세한 심리학적 감식력을 지닌 신학자이자 종교학자였다. 오토는 신 관념이나 종교 관념이 아니라 ‘종교 경험의 양태’에 대한 분석을 통해 종교현상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포착함으로써, 성스러움에 대한 가장 체계적인 묘사를 전개했던 사람이다. 엘리아데는 신이 없는 세계 속에서 어떻게 신을 만날 것인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종교라고 이야기했다. 즉 그의 종교 이야기는 ‘신의 부재’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와 다르게 오토는 ‘신의 현존‘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신이라는 절대타자 앞에서 인간은 어떤 경험을 하게 되는가?

 

 

        오토는 “성스러움이란 종교 영역에 고유한 해석과 평가의 범주이다.”라고 말한다. 처음부터 오토는 종교에 고유한 인간 의식의 영역을 확인하기 위해 성스러움이라는 범주를 사용한다. 그런데 그는 종교의 고유한 범주인 성스러움이 칸트에 의해 오염되어 버렸다고 생각한다. 칸트는 의무감을 통해 굳건히 도덕률을 지키려는 의지를 ‘성스러운’ 의지라고 부르는데, 이로 인해 완벽한 도덕적인 의지가 성스러움의 개념을 장악해 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토가 <<성스러움>>이라는 책을 쓴 것은 도덕이나 이성으로 환원된 종교를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오토는 칸트 이래로 사람들이 의무나 법칙의 성스러움만을 강조하게 되었다고 불평을 터뜨린다. 또한 오토는 절대성, 완전성, 필연성, 실체성 같은 합리적인 관념 역시 성스러움의 본래적인 의미가 아니라고 말한다. 칸트와 다르게, 오토는 성스러움에서 윤리적이고 합리적인 의미을 제외할 때 남게 되는 ‘의미의 잉여’가 바로 성스러움의 본래적인 의미라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오토는 성스러움에서 도덕적인 요소와 합리적인 요소를 제거했을 때 남게 되는 잉여물을 묘사하기 위해 특별한 용어를 창안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다. 성스러움 안에 감추어진 이러한 ‘의미의 잉여’는 성스러움의 (비도덕적이며) 비합리적인 측면을 가리킨다. 성스러움의 이러한 비합리적 측면에 대해서 오토는 ‘누멘적인 것’(numinous)이라는 용어을 사용한다. 이 용어는 ‘신’을 뜻하는 누멘(numen)이라는 라틴어에서 조어한 것이다.

 

 

        오토는 신 앞에서 선 인간의 심리적 경험을 ‘압도적인 신비’(mysterium tremendum)이자 ‘매혹적인 신비’(mysterium fascinans)라는 정반대의 감정 요소로 표현한다. 인간은 신이 지닌 압도적인 힘 앞에서 두려워 도망치고 싶은 감정에 휩싸일 뿐만 아니라, 이와 반대로 신 안으로 빨려 들어가서 신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충동에 휘말리게 된다. 그런데 ‘압도’와 ‘매혹’이 누멘적인 경험을 구성하는 ‘내용‘이라면, ‘신비’는 이러한 역설적인 경험을 감싸안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신비는 종교 경험을 감싸안는 옷 같은 것이다. 오토에 의하면, 진정으로 ‘신비로운’ 대상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우리는 그 안에서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완전히 다른 것’(wholly other)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누멘적인 경험이란 압도와 매혹에 휩싸이는 완전히 다른 것에 대한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우리가 유령 이야기에 공포와 매혹의 감정을 동시에 느끼는 것은 유령이 결코 존재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완전히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오토는 ‘완전히 다른 것’을 체험하는 공포와 매혹의 이중적인 감정 속에서 종교의 뿌리를 찾고자 했다. 물론 어떤 종교는 공포의 요소를 더 강조하기도 하고, 어떤 종교는 매혹의 요소를 더 강조하기도 한다. 또한 ‘완전히 다른 것’이나 ‘완전한 타자’에 대한 강조가 극단으로 흐르게 될 때, 우리는 그러한 종교현상을 ‘신비주의’라고 부른다. 신비주의는 일상적인 경험과 종교적인 경험의 차이를 극대화하는 종교현상이기 때문이다.

 

 

        오토는 절대성, 완전성, 필연성 같은 성스러움의 합리적인 측면은 칸트가 말하는 ‘순수이성’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성스러움의 비합리적인 측면은 ‘순수이성’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 있는 어떤 것, 말하자면 ‘영혼의 밑바닥’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순수이성’에서 생겨나는 종교의 합리적 요소는 선험적인 의식의 산물이다. 오토는 ‘누멘적인 경험’도 선험적인 의식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누멘적인 의식’이란 감각 대상 너머의 초월적인 대상을 파악하는 고유한 해석과 평가의 범주인 것이다. 오토는 인간이 지닌 이런 ‘누멘적인 의식‘으로부터 종교적인 관념과 감정이 형성된다고 말한다. 나아가 오토는 인간 정신의 감추어진 기질로 인해 인간은 종교를 향하도록 운명지어져 있으며, 이러한 기질이 점차 ‘종교적인 충동’으로 성장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적인 충동’은 스스로 완전히 투명해질 때까지 계속해서 감정, 표상, 관념을 생산하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종교라는 거대한 피륙이 직조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토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오토에 따르면 성스러움의 합리적인 요소는 ‘순수이성’의 산물이고, 비합리적인 요소는 ‘누멘적인 의식’의 산물이다. 양자는 독립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똑같이 선험적이다. 그런데 오토는 여기에 또 다른 선험성을 추가한다. 그는 종교 안에서 합리적인 요소와 비합리적인 요소의 결합은 내적 필연성에 의한 선험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종교사는 합리적인 요소와 비합리적인 요소의 점진적인 상호침투의 역사이며, 신 개념은 항상 서서히 윤리적인 요소로 채워질 수밖에 없다. 인간의 의식은 필연적으로 합리성과 비합리성의 선험적인 종합을 성취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오토의 말은 ‘종교학의 아버지’로 불리던 막스 뮬러(F. Max Mller)의 입장을 떠올리게 한다. 막스 뮬러는 종교는 유한을 통해 무한을 지각하는 것이자, 여기에 윤리적인 요소가 덧붙여져야 비로소 종교다운 모습을 갖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오토의 주장은 기독교 호교론의 입장으로 흘러간다. 성스러움의 합리적인 요소와 비합리적인 요소의 선험적인 종합을 주장할 경우에, 비윤리적이거나 비합리적인 종교는 아직 ‘종교적인 의식’의 선험성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 열등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신앙’이란 신성한 진리의 이해를 위한 독특한 인지 능력이며, 자연적인 ‘이해’의 능력과는 대립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루터처럼 오토는 ‘종교적인 의식’의 독립성을 주장함으로써 종교를 다른 영역으로 환원할 수 없는 독자적인 범주로 재정립하고자 했다. 특히 오토는 신 관념 안에서 합리적인 요소와 비합리적인 요소가 서로 의존하는 형태는 세계 곳곳에서 발견된다고 말한다. 신을 도덕화하는 과정은 불완전할지라도 어디에서나 발견된다는 것이다. 오토는 종교의 역사적인 진화 과정을 인간의 ‘종교적인 의식’의 자기실현의 과정으로 보았던 것 같다. 예컨대 누멘적인 경험의 압도와 공포의 요소는 합리화의 과정을 통해 정의와 도덕성에 대한 ‘신의 분노’라는 개념으로 다듬어진다. 그리고 매혹의 요소도 합리화의 과정을 통해 신의 자비와 사랑을 통한 ‘은총’의 개념으로 다듬어진다. 그리고 누멘적인 경험을 감싸안는 신비의 형식은 신의 모든 합리적인 속성의 ‘절대성’이라는 개념으로 변형된다. ‘절대성’이란 우리의 이해력을 넘어선 것을 감싸고 있는 옷 같은 것이다. 오토는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정리한다.

 

 

 비합리적인 요소의 살아있는 지속적인 활동으로 인해 종교는 ‘합리주의’에 빠지지 않게 된다. 합리적인 요소로 가득 채워져 있을 때 종교는 광신주의나 단순한 신비성으로 가라앉거나 적어도 이러한 것만을 고집하지 않게 되며, 그리하여 문명화된 인류의 종교가 될 자격을 갖추게 된다. 합리적인 요소와 비합리적인 요소가 건전하고 아름다운 조화 속에 함께 결합 하여 존재하고 있는 정도가 바로 종교의 상대적인 등급을 측정하는 기준을 제공한다. 또한 이 기준은 특히 종교적인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기준을 적용할 때, 우리는 기독교가 다른 점에서처럼 여기에서도 모든 동종의 종교들보다 완벽한 우월성을 보여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토, <<성스러움>>, <선험적인 범주로서의 성스러움 2>)

 

 

 


 이창익_
한림대학교 생사학연구단 HK연구교수
changyick@gmail.com
주요 논문으로 〈신 관념의 인지적 구조: 마음 읽기의 한계선〉, 〈종교 사용 설명서: 종 교 교육에 대한 시론적 접근〉, 〈사랑이 조각하는 죽음의 공간〉 등이 있고, 저서로는 《조선시대 달력의 변천과 세시의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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