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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311호-종교가 가진 모순적 구조(이찬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4. 4. 25. 15:52

 

 

                             종교가 가진 모순적 구조

 

 

                                

2014.4.22 

 

 

    성서(창세기)에 의하면 힘들여 하는 노동은 본래 신의 형벌이었다. 하지만 니체(F. Nietzsche)가 조롱한 바 있듯이, 이제는 아무리 신의 형벌이라도 그것이 자본이 축적되는 형벌인 한, 다시 신의 축복으로 간주되는 시대로 역전되었다. 이러한 관점은 막스 베버(Max Weber)의 책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요지와도 통한다.

 

 

    베버에 의하면, “오직 신앙으로”(sola fide)를 강조하며 구원의 기준을 ‘개인’에게 두었던 프로테스탄트는 직업을 ‘소명’으로 간주하고, 노동을 통한 재물의 축적을 신적 ‘은총’의 증거로 해석했다. 프로테스탄트 성향이 강한 북유럽 국가들에서 자본주의가 태동했다고 분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처럼 진리의 기준을 개인의 내면 안에 두는 자세는, 적어도 자본주의가 개인적 성과를 반영하며 형성되고 유지되는 한, 자본주의를 강화한다. 자본주의와 ‘오직 신앙으로’를 내세운 종교적 주관주의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가령 신자들이 마음의 위안을 얻고 다시 열심히 일해 더 많은 성과를 올리면, 교회에서는 그것이 신의 은혜라며 설교하고, 신자는 다시 그 종교 시설로 몰리면서 위로받곤 한다. 그런 점에서 대형 종교 단체일수록 경쟁사회, 성과사회의 보이지 않는 첨병 노릇을 할 가능성이 크다. 모순을 모순으로 보지 못하도록 종교와 사회가 상보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자본주의가 “초기에는 기독교에 기생하나 종국에는 기독교의 역사가 자본주의의 역사가 되는 형태로 발전해왔다”고 단언하기도 한다.

 

 

     그 뿐 아니다. 벤야민은 폭력을 ‘법 정립적 폭력’과 ‘법 보존적 폭력’으로 규정하고서 이들 폭력을 중단시킬 수 있는 ‘신적 폭력’을 일종의 ‘가정’으로 요청한 바 있다. 정립된 법의 배후에 어떤 권위가 부여되어 있는 듯 신비적 기초를 제공해 법을 보존시키는 역할을 종교가 담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가 사회적 법을 정당화하고 그 유지로 인한 구조적 폭력을 용인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특히, 제도종교일 경우 더욱 그렇다.

 

 

      물론 이런 현상은 종교와 사회 사이에서 벌어지는 문제만은 아니다. 종교 안에서도 모순적 구조는 진행된다. 모(창)와 순(방패)이 서로를 필요로 하는 상관적 존재이듯이, 종교 안에서도 개인적 선택과 제도적 요구는 모순적 관계를 유지한다. 가령 그리스도교의 세례라고 하는 주관적 선택은 신앙공동체에 주어진 위계와 정통 교리에 대한 동의 및 복종과 병행한다. 그런 식으로 개인의 선택은 해당종교의 제도를 정당화한다. 그러면서 그 제도적 위계라는 상위의 권력으로부터 개인의 내면은 압박을 받는다.

 

 

      이 때 압박을 그저 수용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 종교적 행위의 주관적 선택은 말 그대로 주관적인 선택이기에 제도 안에 갇히지 않을, 나아가 제도를 뛰어넘을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의 선택은 제도와 구조를 바꿀 수 있는 가능성도 있고, 동시에 제도와 구조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는, 즉 종교에는 양면성 혹은 이중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가 종교를 정당화하면서 동시에 종교를 넘어설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종교는 갈등을 조장할 수도 있고, 동시에 평화를 확산시킬 수도 있다.

 

 

      위험사회를 말하고 있는 울리히 벡(Ulrich Beck)은 그 사례로서, 종교를 개인적 선택으로서의 종교와 제도적 제한으로서의 종교로 구분하면서, 전자를 근본주의에, 후자를 세계시민주의에 연결 짓는다. 근본주의는 나름의 보편주의를 지향하지만, 사실상 배타적 주관주의에 머문다. 그래서 세계시민주의를 거부한다. 근본주의 입장에서 보면 세계시민주의는 신앙적 주관성에 입각한 보편주의를 억압하는 폭력이다. 하지만 세계시민주의 입장에서 보면 근본주의는 관용적이지 못하고 갈등을 조장하는 폭력이다. 그런 점에서 경계의 대상이다. 근본주의는 종교 안에 필연적으로 내장되어 있는 성향이다. 그 내장되어 있는 폭력성을 또 다른 내장적 초월성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는 사회적 종속물에 머물 수도 있고, 사회의 변혁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대부분의 종교들에서 관찰할 수 있는 현상들이다. 가령 종교가 사회와 분리된 개인 안에 내면화한 사회일수록 사회 문제를 개인적으로 해결하게 하거나 탓을 개인 안에서 찾도록 할 가능성이 더 커진다. 현재적 불행의 원인을 개인의 전생이나(힌두교/불교) 선천 세계의 원(怨)에서 찾는다든지(증산계열의 종교), 구원을 개별 영혼이 내세에 들어가는 것으로 이해한다든지(그리스도교), 모든 것이 은혜[四恩]라면서 고통을 개인에게 부여된 은혜(또는 마음) 차원으로만 치환시킨다든지(원불교), ‘공즉시색’의 철학을 구조적 폭력마저 긍정하는 원리로 가져온다든지(불교) 하는 일들은 현실 종교에서 얼마든지 벌어지는 일이고 또 벌어질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자본의 축적을 축복으로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거나 이용한다.

 

 

      그 뿐 아니다. 비비오르카(Michel Wieviorka)가 폭력을 집단적 이익 추구를 위한 전쟁과 같은 ‘정치내적(infrapolitical) 폭력’과, 종교나 이념 등 절대적 가치 아래 벌어지는 원리주의적 테러 같은 ‘초정치적(metapolitical) 폭력’으로 구분한 바 있듯이, 종교는 자칫 폭력의 의미를 과잉시켜 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기제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폭력들을 신적 은혜의 피상성에만 연결시키면서 개인으로 하여금 수용하도록 하거나 사회적으로 정당화시키는 경우가 그것이다. 《폭력의 철학》의 저자 사카이 다카시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 두 폭력이 융합하고 있다면서,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예로 든다. 이 전쟁은 대량 살상무기를 제거한다는 명문 하에 미국이 벌인 일이지만, 결국은 이라크의 반미세력을 타도하고 부시 정권과 밀접한 미국 기업들에게 전후 이라크 복구 사업 독점 참여의 기회를 주면서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부시정권의 배후에 보수적 백인 개신교계가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종교가 대외적 폭력과 전쟁을 추동하거나 정당화하면서 갈등과 분쟁의 계기로 작용하는 사례라 할 만 하다.

 

 

      물론 이와 비슷한 상황은 아시아만 하더라도 인도, 미얀마,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과 분쟁의 현장에서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 종교가 차이를 발생시키면서 동시에 그렇게 발생된 차이를 무력적 극복의 대상으로 간주하게 하는 기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종교가 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적 성과사회를 정당화하거나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것은 이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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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3월 19일 종교자유정책연구원 주최의 ‘종교인권시민강좌’ 당시 강연문의 일부이다.


                                                                   
 이찬수_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chansuyi@hanmail.net


논문으로 <한국종교의 평화인식과 통일운동: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종교평화학의 모색 : 평화학과 종교가 만나

 

는 지점>등이 있고, 공저로 <<축의 시대와 종교간 대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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