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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의 비극과 근대의 내파(內波) 혹은 근대의 쓰나미
2014.4.29
‘미개한’ 애도와 도착적인 시선
지금 흐르는 이 눈물은 어떤 종류의 것일까, 지금의 이 슬픔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사태 이후로 아직도 이 눈물과 슬픔을 제대로 해명할 길이 없다. 틈만 나면 라디오 뉴스에 귀를 기울이고, 텔레비전 화면에 눈을 고정하며, 인터넷 뉴스기사를 더듬어보지만, 누구도 이 눈물과 슬픔의 기원과 본질을 말해주는 이를 찾기 어렵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전문가들의 발언에서도 모호했던 그 까닭은, 세월호 사태에 반응하는 국민정서를 미개한 것으로 보았던 한 정치인 자녀의 시각에서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언론매체가 유통하는 비탄과 애도의 장면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하나는 통제되고 절제된 슬픔과 애도의 몸짓을 하는 소위 ‘문명인’의 모습이다. 다른 하나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통곡하고 분노를 표출하는, 통제력을 잃은 ‘미개인’의 모습이다. 제임스 와일스(James M. Wilce)는 《부끄러운 통곡 Crying Shame》(2009)에서 애도를 원시적인(미개한) 것으로 바라보는 서구 근대의 시각이 형성되는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지적 궤적을 분석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19세기와 20세기 초의 서구인의 시선에 포착된 비서구인의 애도의 주요 특징은 울부짖으며 상실의 아픔을 표출하는 행위인데, 그것은 (서구인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적인 행위라기보다는 동물에 가까운 행위로, 따라서 부끄럽고 미개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와일스는 이러한 인식 태도는 오늘날에도 서구 학자의 의식에서 온전히 자리 잡고 있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음악학자 A. L. 로이드(A. L. Lloyd)는 애도는 합리적인 질서에 저항하는 원시적인 혼돈의 자리로서, 오늘날까지 인간 발달 과정에서 남아 있는 고대의 잔재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세월호의 침몰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표출하는 애도 방식과 정서를 미개한 것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한국 사회에 어느 지점에서 형성되고 있는 것일까? 이 시선은 미개의 대척점인 근대 문명의 망루에 올라서지 않고서는 성립하기 어려운데, 대한민국 자체를 미개한 것으로 싸잡아 버리는 태도를 보면, 그의 근대 문명의 표준은 서구의 틀에 맞춰져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대한민국에 살면서 (혹은 사는 척하면서) 대한민국의 미개함에 분통을 터뜨리는 그 치기어린 청년의 태도를 이해해 줘야 하는 건 아닐까? 혹은 이러한 인식은 그만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막스 피카르트는 그의 저서 《침묵의 세계 Die Welt des Schweigens》(2000)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의 시선이 어떤 한 부분만을 붙잡고 있을 때에는 그것을 보상받기 위해서 그 부분을 인위적으로 확대시키려고 하며 그리하여 그 부분(경제적인 것 혹은 심리적인 것 혹은 인종적인 것)을 절대화시킨다. 그러한 양적 팽창을 통해서 인간은 어떤 폭넓음을 가장한다.” 이 비극적인 참사의 원인 규명과 대책 마련을 위해 관련 기관들은 동분서주하고 있고, 언론매체도 발맞추어 세월호와 연관된 모든 정보를 쏟아내고 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두 가지 단어와 만나게 된다. 오대양 사건과 구원파. 수사 당국은 기독교복음침례회의 자금이 세월호 선사인 청해진해운과 그 실질적인 소유주인 전 세모그룹 유병헌 회장의 일가에게 유입되었는지를 조사하고 있다고 한다. 당연히 관련자의 위법 행위를 밝혀야 하고 밝혀지면 처벌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세월호 참사의 핵심은 아니다. 더욱이 기독교복음침례회를 ‘이단’으로 규정하는 기독교계 학자들이 등장해서 기독교복음침례회를 ‘비합리적인(사이비) 종교’로 몰아가는 태도는 지나치게 단편적이다. 종교와 경제의 조합은 역사적으로 존재해왔다. 경제적, 곧 물질적 토대가 없는 종교 활동은 애초에 불가능한 터, 종교의 경제 행위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의 사회적 위해성과 위법성뿐이다. 또한 어느 종단이든지 그 주류에서 벗어난 비주류, 혹은 종파적 성격의 종교 단체는 존재한다. 이와 관련해서 정통과 이단의 정립 문제는 그 종교 내부에서 논의되어야 할 사안일 뿐이다. 그렇지만 언론매체는 소위 정통에 속한 학자 혹은 성직자의 발언에 기대는 어설픔을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 규명과 재발 방지라는 특정한 사안에만 사로잡혀 그 사태와 관련된 모든 것에 시선을 확장하려는 태도는 사태 파악의 핵심을 놓치기 쉬우며, 그 과정에서 획득된 희생양으로 사태 해결의 종지부를 찍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
근대의 내파와 위험사회
세월호의 비극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 배경에는 생때같은 어린 학생들의 희생과 더불어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선체의 침몰 과정과 구조 활동의 목격도 있다. 세계에서 배를 가장 잘 만드는 나라에 속하면서도 수명이 다한 배를 수리하고 개조해서 사용하는 알뜰한 나라, 침몰하는 순간에 승객보다 먼저 구조선에 올라탄 선원들의 무조건적인 반사 행위, 수 백 명의 고귀한 생명을 그대로 바다에 내어준 배와 항공기와 같은 근대 문명의 이기(利器)들, 정보통신기술 강국에서 벌어지는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인 정보 전달 체계, 사태에 대한 총체적인 파악과 판단 능력의 빈약함을 보여주는 정부 관료와 당국자들, 언론매체의 흥행성 기사들, 밀양 송전탑 반대 시위자가 세월호 희생자 가족 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어느 정치인의 정신 나간 소리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만큼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해하기 힘든 행태들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1995년 대구 상인동 가스 폭발 사고, 삼풍백화점 붕괴, 2003년 대구지하철 화재사고, 올해 2월 경주 마우나리조트 붕괴사고, 그리고 4월 16일 세월호 참사에 이르는 일련의 인적 재해는 성찰 없이 진행된 압축적 근대화의 결과로 우리 사회가 초위험사회에 직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성찰 없는 근대화’는 근대의 내파, 혹은 근대의 쓰나미를 불러 일으켜 통제 불가능한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노진철은 자신의 저서 《불확실성 시대의 위험사회학》(2010)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일반시민의 불안을 고조시키는 것은, 전문가들이 특정한 유형의 위험과 그에 따르는 위해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황이다. 원자력에너지기술, 태양광기술, 정보통신기술, 생명공학, 나노공학, 컴퓨터공학 등 새로운 복합기술이 일상화된 사회에서는 위험하지 않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근대화와 산업화를 통해 경제성장을 이루면 행복한 삶이 실현될 것이라는 평범한 사유에서 근대의 내파, 근대의 쓰나미는 말한다. “어디까지 성장해야 행복을 맛보겠는가? 나, 근대의 쓰나미가 항상 네 곁에 머무는데.” 후쿠시마원전사고로 주춤했던 원자력 낭만주의가 다시 일본 정부에 의해 일본 사회에 부추겨지고, 우리 정부의 수장도 동해안선을 따라 원전을 새로 지어 원전 강국을 달성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일어날 가능성은 낮지만 결과가 엄청난 우발적 사고는 언제 어디서나 터질 수 있는 ‘정상 사고’”라는 충고는 그 의지 앞에서 무력하다. 또한 전문가들은 일어날 가능성이 적고, 현재의 수준에서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진단을 내놓는다. 그러나 미래의 위험에 관한 그들의 의식과 대책에는 전혀 신뢰가 가지 않는다. 철학자 김영민은 《동무론》(2008)에서 한국 사회는 사적인 호의와 공적인 신뢰가 뒤섞여 있다고 지적한다. 단적으로 말해, 공과 사의 경계가 뚜렷하게 분별되어 각각의 영역에서의 행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호감 혹은 호의에 의해 사람과의 관계를 형성하고 그 관계를 통해 공적인 영역에서의 이익을 추구하거나 공유하려는 무리들이 소위 ‘모피아’, ‘해피아’, ‘원전마피아’인 것이다.
항간에 승객을 구조하지 않고 먼저 탈출한 선원들에게 소명의식이나 직업윤리가 결여되었다는 비난이 일고 있다. 안정적인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이러한 직업윤리나 소명의식을 운운할 자격이 없지만, 그 선원에게서 그러한 의식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이 든다. 그렇다고 그들의 무책임성을 질타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비단 그들의 급여조건과 고용상태의 열악함에 기댄 발언도 아니다. 막스 베버(M. Weber)에게 근대적 이성은 사회적 합리성을 의미했다. 곧 합리성의 사회적 구현이 근대 서구사회의 성격을 규정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합리성이 구현된 사회에서 비로소 통용되는 것이 소명의식이고 직업윤리이다. 곧 합리적인 사회 체계에 따른 분업과 전문화의 측면에서 소명의식과 직업윤리는 언급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의 공적 영역이 사적인 호감과 호의에 의해서 지배되는 상황에서 개인의 책임을 문제시 한다면, 사태가 벌어질 때마다 희생양을 찾아 미봉책만 내세우는 데 급급할 뿐,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불가능한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끝으로 한 마디만 하자. “너무 아프고 슬프이. 잘 가시오 친구들, 정말 미안하오.” 한영애 ‘조율’의 가사를 조용히 기도로 삼으며, 아픔을 달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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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지 꽃들은
따뜻한 오월이면 꽃을 피워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 철새들은
가을 하늘 때가 되면 날아가야 한다는 것을
문제 무엇이 문제인가
가는 곳 모르면서 그저 달리고만 있었던 거야
지고지순했던 우리네 마음이
언제부터 진실을 외면해 왔었는지
잠자는 하늘님이여 이제 그만 일어나요
그 옛날 하늘빛처럼 조율 한번 해 주세요
정다웠던 시냇물이 검게 검게 바다로 가고
드높았던 파란 하늘 뿌옇게 뿌옇게 보이질 않으니
마지막 가꾸었던 우리의 사랑도 그렇게 끝이 나는 건 아닌지
잠자는 하늘님이여 이제 그만 일어나요
그 옛날 하늘빛처럼 조율 한 번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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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laetor@hanmail.net
논문으로<간디와 프랑켄슈타인,그리고 채식주의의 노스탤지어:19세기 영국 채식주의의 성격과 의미에 관한 고찰
>,<개
신교 주일예배의 변용과 특성>,<신자유주의와 종교의 불안한 동거: IMF이후 개신교 자본주의화 현상을 중
심으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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