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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358호-엘리아데, 스미스, 링컨(이창익)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5. 3. 27. 17:26

                                 

                                엘리아데, 스미스, 링컨

 

    
                              

 

2015.3.17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종교학이라는 모호한 학문을 새로운 형태로 재탄생시킨 학자가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1986)였다면, 20세기 후반에 종교학계에서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학자는 단연 조너선 스미스(Jonathan Z. Smith, 1938~)였다. 특히 사후에 엘리아데는 젊은 시절의 파시즘 활동과 관련하여 미국 종교학계에서 혹독한 정치적, 학문적 비판을 받았다. 엘리아데를 두고 ‘파시스트’이자 ‘반유대주의자’라고 조롱하는 것은 일종의 학문적 유행이었다. 엘리아데의 저술에 대한 정치적인 독서는 엘리아데의 모든 저술 속에 녹아들어 있는 파시즘적 사유를 추적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파시즘이라는 단어는 모든 학문적, 이론적 사유 능력을 마비시키는 주문처럼 작동했다. 누가 파시즘이라는 단어가 환기시키는 죽음과 살육의 향기에 저항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엘리아데 비판자의 면면을 살펴볼 때 우리는 가끔씩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엘리아데 사후에 엘리아데의 반유대주의, 반역사주의, 파시즘 활동 등을 비판하는 데 앞장 섰던 애드리아나 버거(Adriana Berger)는 원래 엘리아데와 상당히 가까웠던 인물이다. 엘리아데가 쓴 1983년 11월 19일자 일기에는 “애드리아나 버거의 전화 (그녀는 올 여름부터 로스엔젤레스에 머무르고 있었다). 우리가 비용을 대서 1984년 1월부터 4월 1일까지 이곳에 와 머물도록 그녀를 초청했다. 그녀는 나의 서재를 정리하는 일을 도와줄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엘리아데의 일기 곳곳에서 버거는 엘리아데의 연구실과 원고를 정리하는 일을 도와주는 조수의 역할을 맡고 있다. 그러던 그녀가 왜 몇 년 뒤에는 ‘엘리아데 저격수’로 변신한 걸까? 정확한 사정을 짐작하기는 어렵지만, 엘리아데에 대한 정치적인 공격의 이면에는 우리가 짐작하기 힘든 사적인 인간 관계의 문제까지도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존경했던 학자에 대한 인간적인 배신감이었을 수도 있고, 학문적인 실망감이었을 수도 있고, 개인적인 내밀한 질투의 감정이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애드리아나 버거는 왜 자기가 비판했던 학자의 서재를 정리했던 것일까 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사람들이 엘리아데의 ‘위험한 저작’을 숙독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도, 이제는 비판을 위해서만 엘리아데를 인용하는 상황 속에서도, 꾸준히 엘리아데의 저술을 한줄한줄 진지하게 비판했던 학자가 바로 조너선 스미스였다. 스미스는 유대인이지만 결코 엘리아데를 정치적인 관점에서 비판하지 않았다. 스미스의 연구는 처음부터 엘리아데의 저술에 대한 비판적 해석에서 출발했고, 끊임없이 그의 독자들이 엘리아데를 다시 제대로 읽을 것을 주문했다. 스미스는 엘리아데에 대한 피상적인 비판을 결코 되풀이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학문적 담론의 차원에서 엘리아데의 사유를 넘어서고자 했다. 적어도 엘리아데가 현재에도 다시 읽힐 수 있다면, 그것은 상당 부분 스미스의 기여 때문일 것이다. 미르체아 엘리아데라는 신화는 이처럼 위태롭게 조너선 스미스라는 의례를 통해서 재생되고 있다.

 

 

        1965년에 노트르담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자동차를 운전하던 27살의 대학원생 조너선 스미스는 시카고에서 차를 멈추고 공중전화 박스로 달려간다. 그는 미르체아 엘리아데라는 저명한 종교학자에게 전화를 걸어 만남을 요청하기 위해 몇 시간 동안이나 공중전화 박스에 앉아 주저한다. 그러나 그는 결국 대학자에게 말을 건넬 용기를 내지 못한 채 돌아서고 만다. 그들의 첫 번째 만남은 이렇게 해서 2년 반 후로 연기된다.

 

 

        이듬해 조너선 스미스는 샌터바버라에 있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종교학과 교수가 된다. 그리고 마침내 방문교수로 샌터바버라로 온 엘리아데를 1968년 2월 14일 저녁에 처음 만나 종교학과 문학에 대해 여러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게 된다. 스미스는 엘리아데가 있던 시카고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기 위해 막 인터뷰를 마치고 온 참이었다. 스미스는 엘리아데에 대한 첫인상을 묘사하면서 “호기심에 가득 찬, 학식있고 재미있는, 점잖은 거인이자, 활기찬 잡담꾼이자, 진기한 이야기의 대가”였다고 말한다. 이때의 만남 이후에 스미스는 시카고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엘리아데의 학문적 활동 영역 속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그러므로 스미스와 엘리아데는 1968년부터 엘리아데가 죽은 1986년까지 같은 대학에서 계속해서 교류를 한 셈이다. 스미스는 엘리아데와의 교류를 “내 인생의 가장 큰 선물 가운데 하나”였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1971년 2월 12일에 노트르담에서 열린 엘리아데의 저작에 대한 심포지엄에서, 조너선 스미스는 엘리아데가 참석한 가운데 <흔들리는 중심축>(The Wobbling Pivot)이라는 다소 상징적인 제목의 글로 ‘종교학의 중심’인 엘리아데를 흔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고 있다.


 

 

             이러한 [몇 가지 비판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탄

 

             난쟁이의 자세를 취하고 있긴 하지만, 연이어 거인보다 더 멀리 보았다고 주장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 거인은 우리 모두

 

             에게 무엇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를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리고 훨씬 중요한 말

 

             이지만, 그는 우리가 이미 보는 법을 배웠던 사물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를 가

 

             르쳐주었습니다… 그의 학생인 우리가 할 일은 그저 우리의 주변적인 시각에서

 

             생겨나는 물음, 흐릿함, 그늘을 제시하는 것뿐입니다.

 

                                            (스미스, 《지도는 땅이 아니다》, 〈흔들리는 중심축〉)


 

 

        1971년부터 1976년까지 엘리아데의 지도를 받아 박사학위 논문을 썼고, 이제는 시카고 대학에서 종교학을 가르치고 있는 브루스 링컨(Bruce Lincoln, 1948~)은 최근 출간한 《신과 악마, 사제와 학자》(Gods and Demons, Priests and Scholars, 2012)라는 흥미로운 책에서 엘리아데와 스미스에 대한 자신의 추억 하나를 풀어놓고 있다. 대학원 과정을 이제 막 시작한 브루스 링컨은 1971년 가을에 조너선 스미스의 ‘종교학 입문’ 강의를 듣고 있었다. 당시에 스미스는 엘리아데와 개인적이며 지적인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링컨은 아직 엘리아데를 만난 적이 없었다.

 

 

        링컨에 의하면, 어느날 스미스가 낙담과 흥분으로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강의 시간에 늦었다. 스미스는 강의에 늦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스미스는 ‘질서와 무질서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였는가’에 관해 엘리아데와 한참 논쟁을 하고 있었다. 엘리아데는 질서가 먼저라고 주장했고, 스미스는 무질서가 먼저라고 주장했다. 스미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무질서란 선행하는 질서에 대한 대립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나는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교활한 논쟁가의 주장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것을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질서가 먼저였다는 것을 받아들일 준비는 되었습니다. 그러나 질서는 단지 0.5초 빨랐을 뿐입니다. 그 후로는 항상 무질서만 있었다고 주장하렵니다.”

 

 

        스미스의 이러한 말은 그가 엘리아데를 극복해나간 방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엘리아데는 종교를 ‘질서의 타락 과정’으로, 스미스는 종교를 ‘무질서의 재구성’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엘리아데와 스미스의 이러한 입장차에 대해 브루스 링컨은 둘 다 틀린 것 같다고 말한다. 링컨은 질서와 무질서는 ‘정치학’이나 ‘힘’의 탄생 이후에 만들어진 쌍둥이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링컨은 질서와 무질서란 모두 힘의 논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질서는 좋은 것이고, 무질서는 나쁜 것이라고 주장하는 정치적·도덕적 위계 질서라고 주장한다. 아마도 링컨의 이러한 주장이 엘리아데와 스미스 이후의 종교학을 지배하는 가장 지배적인 입장일 것이다.

 

 

        링컨은 《신화 이론화하기》(Theorizing Myth, 1999)라는 책에서 엘리아데의 저작이 갖는 결점이 자신에게 매우 아픈 고통과 슬픔을 준다고 고백한다. 엘리아데는 링컨이 유대인이자 마르크스주의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둘의 관계는 호의와 우정으로 지속되었다. 그래서 자신의 경험으로는 엘리아데가 과거에 반유대주의자였다는 것을 절대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링컨은 개인적인 관계와 학문적인 판단 사이에서 고통스러워 한다. 그런데 링컨은 엘리아데가 그의 《일기》와 《자서전》에서 스미스라는 뛰어난 학자와 얽힌 개인사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 둘의 관계가 스미스의 일방적인 짝사랑일지도 모른다는 소리처럼 들린다. 엘리아데가 스미스를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 수 없다.

 

 

        엘리아데가 세계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파시즘과 연루되어 비판받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개인사 속에서 엘리아데는 일정 기간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의 저작은 철저히 비역사적이며 비정치적인 방향으로 전회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역사’를 포기하면서, 엘리아데는 비로소 종교학자가 된다. 우리는 그의 종교학이 역사를 포기한 대가였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창익_
한림대학교 생사학연구소 HK연구교수
changyick@gmail.com
주요 논문으로 〈신 관념의 인지적 구조: 마음 읽기의 한계선〉, 〈종교 사용 설명서: 종 교 교육에 대한 시론적 접근〉, 〈사랑이 조각하는 죽음의 공간〉 등이 있고, 저서로는 《조선시대 달력의 변천과 세시의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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