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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社稷)과 기곡제(祈穀祭)
2016.2.16
설을 지내고 나니 비가 내리면서 봄의 기운을 재촉한다. 뉴스에선 또 다시 추위가 찾아올 것이라고 하지만 2월에 내리는 비를 봄비라 우기며 봄을 기약한다. 음력과 양력의 두 가지 시간을 살아가는지라 한 해의 희망도 두 번씩 가져본다. 음력의 시간을 따라 조선시대 정월로 돌아가면 당시도 지금처럼 1월은 분주하였다. 조상에 대한 제사도 지내고 친척이나 이웃 사람, 그리고 지인들에게 인사도 다녀야 했다. 조정(朝廷)에서도 첫 날 조회를 가지며 한 해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종묘, 사직, 선농, 산천 등에 제사를 거행하였다.
정월에 나라에서 지낸 여러 제사 중에서 ‘기곡제(祈穀祭)’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제사는 절망 중에서 찾은 희망이기 때문이다. 기곡제는 한 해의 농사가 잘 되길 비는 의식이다. 조선시대 농경은 삶의 기반이면서 문화이며, 종교였다. 유교의 제천 의례가 우리나라에 수용된 것은 고려 성종대인데 이때의 제천 의례란 음력 정월의 기곡제(祈穀祭)와 음력 4월의 우사(雩祀)였으니 둘 다 농경과 관련된 것이었다. 기곡제는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맞추어 맹춘(孟春)에 천자가 좋은 날을 택하여 상제(上帝)에게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제천의례였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잘 아는 것처럼 제천의례가 폐지되었다. 그것은 농경과 연관된 기곡제와 기우제를 제거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기곡의 의식은 사라졌을까? 풍년의 바람과 불안도 사라졌을까?
이런 기곡제가 다시 설행된 것은 조선후기 1683년(숙종 9) 정월에 이르러서이다. 어디에서 어느 신에게 한 해의 농사를 부탁했을까? 1683년(숙종 9) 정월에 숙종은 사직단에 신하를 보내어 기곡제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1695년(숙종 22) 정월에 국왕이 직접 사직단에 나아가 기곡제를 거행하였다.
왜 이 시기에 기곡제가 관심을 다시 받았을까? 현종대와 숙종대는 무엇보다도 재난과 기근의 시기였다. 17세기 후반에 지속적으로 발생한 이상기후, 가뭄, 전염병 등으로 인해 인구수가 100만 명 이상이나 감소하였다. 1695년 기곡제를 거행하기 전에 숙종이 비망기에서 “바로 내년 농사의 결과에 이 동쪽 땅의 억만 생령(生靈)의 생사가 판가름난다”고 할 정도로 당시 상황은 절실하였다. 이러한 절박한 상황에서 시작된 ‘사직의 기곡제’는 점차 정례화되었다. 숙종대 부정기적이었던 기곡제는 영조대에 이르러 친행은 대사(大祀), 섭행은 소사(小祀)로 구분되어 『국조속오례의』에 등재되었다. 그리고 1696년(정조 11)에 섭행의 기곡제 역시 대사로 간주되었다.
사직은 토지신인 사신(社神)과 곡식신인 직신(稷神)을 가리킨다. 토지와 곡식은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데에 가장 기본적인 필요조건이며, 이 필요조건을 충족시켜 주는 신에 대한 보답이 사직제의 기본적인 목적이다. 또한 사직은 일정 영토 내에 토지와 인민에 대한 통치권과 연관된 신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국가를 상징하기도 하였다. 국가의 성립은 새로운 사직신의 탄생이며, 역으로 국가의 소멸은 해당 국가의 주권이 미치는 영토의 소멸이자 해당 지역 사직신의 소멸이었다. 그리고 조선시대 사직은 제천의례인 원구제의 폐지 이후 최고의 제사로 규정되어 한 해의 소망을 담는 그릇이 되었다. 당연히 대한제국기 원구단이 건립되자 기곡의 의식은 그곳으로 옮겨졌다. 현대의 시각에서 볼 때 농사는 ‘과학’일 것이다. 농업은 농업 기술이며 생명과학이다. 그러나 또 한편 농업은 신화이고 의례이다. 절망이 깊어질수록 바람은 간절해져 잠자는 신을 깨운다. 이제 우리도 하늘을 대신하여 백성의 꿈을 받아주었던 사직처럼 서로의 꿈을 받아주는 기술을 배우자.
이욱_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논문으로〈조선시대 왕실 제사와 제물의 상징: 혈식(血食)·소식(素食)·상식(常食)의 이념〉,〈조상제사의 의미와 기억의 의례화〉등이 있고, 저서로《조선 왕실의 제향 공간 -정제와 속제의 변용》,《조선시대 재난과 국가의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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